아티나고라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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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26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오로 6세 교황과 1000여년 만에 만나는 등, 교회 일치 운동에 앞장섰다.Υπάρχουν πολλοί θεολόγοι, αλλά η θεολογία είναι μία.
신학자는 많지만 신학은 하나이다.
아티나고라스 1세
2. 생애[편집]
2.1. 초기생애[편집]
1886년 4월 6일, 오스만 제국 치하, 이피로스에서 태어났다. 아티나고라스의 부모는 그리스 계통의 정교회신자였다.
1903년 할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0년에 그는 신학 학위를 받고 수도승이 되었다.[2] 이후, 부제 서품을 받고 펠라고니아 교구에서 일하다가 당시 아테네 대주교이자 정교회 260대 세계총대주교, 멜레티오스 4세의 비서를 맡았다. 3년 후인 1922년, 코르푸의 대주교로 선출되어, 주교좌에 올랐다. 대주교로 있을 당시, 그는 코르푸의 로마 카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과 잦은 교류를하며, 우호를 증진하였다. 1930년 7월 램버스에서 열린 성공회 회의에서는 그리스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2.2. 남북 아메리카 대주교[편집]
1930년 8월 30일, 다마스키노스 당시 고린도 대주교[3] 의 추천으로 남북 아메리카의 대주교로 임명됐다. 취임 직후인 1931년 2월, 당시 그의 조국인 그리스는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불화로 큰 위기에 당면해있었다. 왕당파와 공화파는 사실상의 별도의 교구로 나뉘어 종교마저 분열될 만큼 당시 두 세력간 갈등은 극심했다. 우선 그는 현지의 주교들과 협력하여, 교회 행정을 중앙으로 집중하는데 힘썼고, 1931년 그는 제4차 성직자-평신도간 총회를 조직하는데 기여하였다. 신학교 등을 건설하면서 당시 분열된 그리스 사회의 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편, 미국 대주교로 재임하는 동안 헬레닉 칼리지 산하, 성십자가 그리스 정교회 신학대학원 설립을 추진했으며, 삼위일체 대성당을 축성하였으며, 1938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1948년, 세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을때도 떠나기 직전, 미국 내 모든 정교회 공동체에 순방하였다. 또한 보스턴에서 열린 성직자 모임에서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거룩한 투쟁'이라 일컫으면서,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해 강하고 단호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기독교도간 연대를 강조했다. 아티나고라스가 가졌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
Καταιγίδες αντιξοοτήτων ξεσπούν γύρω μας και το ολέθριο πνεύμα της καταστροφής απειλεί να πνίξει την ελευθερία της συνειδήσεώς μας, τα ανθρώπινα ιδανικά μας και τα ιερά του χριστιανικού πολιτισμού θεμέλια (...). Η Ελλάς από το ένα μέρος διεξάγει ήδη σκληρόν αγώνα δια να διατηρήσει την ελευθερίαν και την εδαφικήν της ακεραιότητα. Η Τουρκία αφ΄ ετέρου ευρίσκεται εις συνεχή επιφυλακτικήν στάσιν εν όψει της ίδιας απειλής. Το Δόγμα Τρούμαν απεδείχθη εν τη πράξει ως εις εκ των αποτελεσματικοτέρων παραγόντων εις τον αγώνα προς απόκρουσιν της επιθέσεως αυτής. Καλώ όλους τους Αμερικανούς όπως ενισχύσουν τας προσπαθείας του προέδρου Τρούμαν (...). Το να λησμονήση τις το ιερόν τούτο χρέος κατά τας κρισίμους ώρας θα ισοδυνάμει προς το να λιποτακτήση και να εγκαταλείψη την θέσιν του εις την ιερωτέραν μάχην εξ όσων εδόθησαν ποτέ δια την υπεράσπισιν των ιδανικών της χριστιανοσύνης.
-역경의 폭풍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파괴의 유해한 정신이 우리의 양심의 자유, 인간의 이상, 기독교 문명의 신성한 기초를 질식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중략) 한편, 그리스는 이미 자유와 영토 보전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반면에 튀르키예는 동일한 위협에 직면하여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트루먼 독트린은 실제로 이 공격을 격퇴하기 위한 투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요소 중 하나임이 입증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미국인들이 트루먼 대통령의 노력을 지지할 것을 촉구합니다. (중략) 결정적인 순간에 이 신성한 의무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가장 신성한 전투에서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2.3.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편집]
1949년 1월 27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로 즉위한 그의 가장 큰 사명은 교단을 통합하고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취임 직후 그는 당시 할키 신학교를 재조직하고, 튀르키예 정부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통하였으며, 교단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재편하였다.
아티나고라스의 화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55년 9월 6일 튀르키예에서 그리스인들이 약탈과 학살당하는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시노드 소집을 거부하고, 애도의 표시로 1957년 부활절까지 1년 반 동안 모든 공식 예배를 삼갔다.
1961년 9월, 로도스에서 제1차 범정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는 범정교회 회의 준비를 위해 소집했으며,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또한 그는 칼케돈 공의회로 인해 갈라진 형제들[4] 과의 화해를 추진하였고, 이어서 1963년 9월에 제2차 범정교회 회의, 1964년 11월에 제3차 범정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2.4. 교회 일치 운동[편집]
그리스 교도간의 화해와 대화를 오래전부터 추구해오던 아티나고라스는 재위기간동안 교회 일치 운동에 힘썼다. 재위기간동안 세계 교회 협의회의 발전에 관심을 꾸준히 가졌으며, 제노바에 직접 상임대표단을 파견했다.[5]
아티나고라스는 1967년 10월 28일 세르비아, 루미니아, 불가리아의 대주교와 만남을 가진 후 바티칸에 방문하였으며 마이클 램지 성공회 대주교와도 만남을 가졌다.
2.5. 사망[편집]
1972년 7월 6일 고관절이 골절되는 부상으로 입었으나, 빈에 가야 한다는 주치의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끝까지 이스탄불에 남는 선택을 하였다. 결국 그는 86세의 나이로 이스탄불에서 안식에 접어들었다. 이후, 봄의 성모 마리아 교회 부지 내 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편집]
서거 50주년이 다가오는 잊을 수 없는 세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대주교는 저와 다른 많은 사람에게 계속 영감을 주는 현명하고 용감한 목자였습니다. "자매 교회들, 형제 민족들"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그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4. 여담[편집]
- 세계 총대주교로 선출되어 미국을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길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였다.
- 그의 이름을 딴 '아티나고라스 인권상'이 매년 시상한다. 2006년에는 부시 前대통령 부부가 시상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