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티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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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아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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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키오스
프라비타스
에브페미오스
마케도니오스 2세
제5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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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고라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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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오스 1세



파일:포티오스.jpg
이름
포티오스
(영어: Photios, 그리스어: Φώτιος)
출생
820년
사망
893년
직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제 86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사후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포티오스 분열의 주역이다.


2. 생애[편집]


820년경 성직자 세르지오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로서 명망을 이어온 가문이었고, 삼촌 타라시오스는 784년부터 806년까지 콘스탄티노스 6세, 이리니, 니키포로스 1세 시대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역임했다. 814년부터 시작된 제2차 성상 파괴 운동 때, 세르지오는 성상 옹호론자였기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842년 테오도라가 성상 파괴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 복원을 선포하면서, 세르지오 집안은 복권되었다.

이러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자신의 집을 '학습의 중심지'로 삼아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며, 수많은 책을 모아놓은 도서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외삼촌이 테오도라의 누이인 이리니와 결혼하면서,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처음에 근위대 대장을 역임했고, 뒤이어 황실 서기관장이 되었으며, 압바스 왕조의 중심지인 바그다드에 사절로서 다녀오기도 했다. 그 후 856년 테오도라를 밀어내고 섭정이 된 바르다스의 중요한 조언자가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이그나티오스였다. 성상 파괴주의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이그나티오스는 총대주교에 취임하자마자 당시 시라쿠사 대주교였던 그레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를 해임하면서 자신의 뜻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레고리오스는 레온 5세의 아들로,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심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온건파의 지도자였다. 이그나티오스는 이후에도 그레고리오스에 대한 규탄을 이어가다가 853년 종교회의에서 파문에 처했다. 아마도 종교적 이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거세시킨 황제의 아들인 점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레고리오스는 로마의 교황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이 복직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교황청은 확고한 성상 옹호론자로서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이그나티오스를 적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다. 이에 온건파는 포티오스를 지도자로 세워서 총대주교에 대적하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다스는 자신의 며느리와 사랑에 빠져 조강치저를 버렸다. 이그나티오스는 이를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858년 예수공헌축일에 바르다스의 성사를 거부하고 파문에 처했다. 바르다스는 이에 분개하여 이그나티오스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몇달 후, 미하일 3세는 어머니 테오도라와 두 여동생을 블라케르나이 근처의 카리아노스 수녀원으로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오스는 삭발식을 맡아달라는 황제의 요구를 거부했다. 바르다스는 기회를 포착하고 황제에게 총대주교와 테오도라가 동맹을 맺었다고 모함했다. 여기에 게베온이라는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이 테오도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바르다스는 이 자의 배후에 총대주교가 있다고 모함했다.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의 설득에 넘어갔고, 858년 11월 23일 이그나티오스를 체포해 테레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유폐했다. 그 후 포티오스가 머리를 깎고 주교가 되었고, 그레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는 시라쿠사 대주교로 복직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오스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총대주교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포티오스는 교황에 서신을 보내 자신을 총대주교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포티오스의 취임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서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답신을 통해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열자고 제안하면서, 자신도 두 명의 위원을 보내 그들로부터 보고를 직접 듣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레온 3세가 732년에 로마의 관할권에서 빼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옮긴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주교구, 테살로니키 교구, 기타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다시 교황청에 반환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861년 4월, 아나니의 자카리아와 포르투의 로도알드가 교황의 사절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이후 사도 성당에서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렸고, 이그나티오스는 초라한 수도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를 반대하는 증인이 72명에 달했고, 교황의 두 사절은 포티오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데다 미하일 3세로부터 "그대들의 귀환은 전적으로 짐의 자비에 달려있다"라는 은근한 협박을 받은 터라 포티오스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결국 위원회는 이그나티오스가 교회법이 아니라 테오도라의 지시에 의해 총대주교에 임명되었으므로 무효라고 결의하고, 포티오스를 공식적으로 총대주교에 선임했다.

그는 위원회 직후 다시 체포되어 여러 차례 매질을 받았고, 2주일간 감금된 채 굶어야 했으며, 사도 성당의 납골당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석관 위에 묶이기도 했다. 그의 의식이 흐려지자, 포티오스 일당은 펜과 그를 해임한다는 문서 한장을 내밀었는데, 포티오스의 서명 바로 위에 그의 서명란이 있었다. 결국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거기에 서명하고 테에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니콜라오 1세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두 사절을 비난했다. 게다가 포티오스가 위원회의 결과를 통보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교황과 동격이라는 입장을 드러냈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테살로니키, 발칸 반도의 여러 관구를 로마의 관할에 속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황제께서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여기니 어쩔 수 없다고 하자 더욱 분노했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원의 총주교 대리를 맡던 테오그노스토스가 로마로 망명한 뒤 로마 교황을 존경하는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자, 교황은 포티오스를 인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교황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에게 서신을 돌려 이그나티오스가 부당하게 해임되고 그 자리를 비열한 자가 가로챘으니 이그나티오스를 원래의 지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를 알렸다. 또한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교마 교황의 권한이 가장 우월하며 교황의 승인이 없이는 총대주교가 임명되거나 해임될 수 없음을 재차 강조했다.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가 답신을 보내지 않자, 교황은 863년 4월 라테란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해 포티오스의 모든 성직을 박탈하고, 총대주교의 모든 권한을 즉각 포기하지 않을 경우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포티오스가 임명한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비슷한 선고가 내려졌고, 이그나티오스를 비롯하여 포티오스에게 해임된 모든 성직자들을 원직에 복귀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포티오스에게 회유되어 그릇된 처사를 한 아나니의 자카리아는 교구에서 해임되었다.[1] 이에 포티오스는 교회 회의를 열어 서방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고 니콜라오 1세 교황을 파문했다.

866년 봄, 그의 후원자였던 바르다스가 시칠리아 원정을 논의하던 중 미하일 3세의 친구 바실리오스에게 살해당했다. 미하일 3세는 즉시 포티오스에게 서한을 보내 바르다스가 반역죄로 즉결 처분되었다는 소식을 통보했다. 포티오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폐하의 덕과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그 서한이 날조되었다거나 바르다스가 다른 이유로 죽었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원로원과 백성의 이름으로 황제에게 곧장 수도로 돌아오라고 탄원했고, 황제와 바실리오스는 그 말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 후 미하일 3세는 바실리오스를 동료 황제로 선임하였고, 포티오스는 바실리오스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제관을 씌워줬다. 그러나 867년 미하일 3세를 암살하고 새 황제로 등극한 바실리오스 1세는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에서 해임하고 이그나티오스를 총대주교로 복직시켰다. 이는 바실리오스가 서방 교회와 화해하길 원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다. 그는 869~870년에 열린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비난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되어 스키피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러다 874년 또는 875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이그나티오스와 화해했다.

877년 10월 23일 이그나티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총대주교가 된 포티오스는 자신의 옛 숙적이었던 이그나티오스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는 불가리아 백성들이 정교회를 믿게 하고자 노력했고, 발칸 반도 각지에 선교사들을 꾸준히 보내 기독교를 전파했다. 또한 레온 3세가 편찬한 <에클로가(Ecloga)> 법전의 효력이 다했다고 보고, 마흔 개의 주요 표제로 분류한 작은 법전 <프로케이론(Procheiron)>을 편찬했다. 뒤이어 간행된 법전 입문서인 <에파나고가(Epanagoga)>는 프로케이론을 재편칩하고, 부록으로 황제와 총대주교를 비롯하여 교회와 국가의 고위층 인물들의 권리와 책무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이 법전에서 설명한 정치이론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은 황제와 총대주교가 공동으로 이끄는 단일 국가이며, 두 사람은 백성의 물질적, 정신적 행복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일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서방 교회와 갈등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879년 1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교황 요한 8세의 특사단은 니케아 신경필리오케를 추가한다면 그를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포티오스는 필리오케 삽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불가리아를 로마 교황에게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1세에겐 그럴 마음이 없었기에 유명무실한 약속일 뿐이었다. 그는 성령성부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현된다는 필리오케의 논리는 니케아 신경에 의해 확고하게 구축된 삼위일체론을 변질시키는 이단적 행위로 여겼기에, 서방의 요구를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말년의 바실리오스 1세가 아들 레온 6세와 심각한 갈등을 빛었을 때, 그는 레온이 새 황제로 등극하지 않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늙은 황제에게 음모나 반역을 은근히 시사하며 레온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고, 황제는 이에 넘어가 레온을 체포해 실명형에 처하려 했지만 여론의 반발을 의식해 풀어줬다. 그러던 886년 바실리오스 1세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레온 6세가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입지를 잃어버린 그는 총대주교에서 퇴임하였고, 887년 제자 테오도로스 산타바리노스와 함께 4년 전에 있었던 국가 전복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고발을 받았다. 테오도로스는 유죄 판결을 받아 실명과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영향력이 아직 상당했던 그는 아르메니아 테마의 외딴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는 말년에 여러 작품을 집필했는데, 특히 여러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발췌하거나 요약하여 정리한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은 크테시아스, 헤라클레아의 멤논, 코논,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등 현대에 잊혀진 역사가들의 수많은 저서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했으며, 아리아노스의 실전된 저서들에서 발췌한 내용도 있다. 신학과 교회사 관련 저서들도 많이 반영되었지만, 아쉽게도 고대의 시와 철학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또한 키지쿠스의 대주교 암필로키오스와 주고받은 서신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서신들에는 성경에 대한 약 300개의 질문과 답변이 있었는데, 신학 연구가들은 이 서신을 통해 9세기경 동로마 제국 성직자들의 신학 이론을 탐구할 수 있었다. 아울러 마니교사도 바울로에 대한 책을 집필했으며,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1세에게 신학적 조언이 담긴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893년경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1847년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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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도알드는 이때 처벌받지 않았지만, 864년 11월에 열린 종교 회의에서 해임 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