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꽃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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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ster1918.jpg
모자에 과꽃을 단 헝가리인 병사들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제1차 세계 대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 1918년 10월 28일에서 1918년 10월 31일까지 진행되었다. 결국 헝가리 제1공화국이 세워졌다. 이 혁명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1918년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빌라주스티 휴전협정을 체결한다.[1]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초부터 탈영하기 시작하여 전쟁 후반 거대한 세력이 된 녹색 군단의 반란이 이혁명을 계기로 더 격화되었다.


2. 상세[편집]


원본:Aster Revolution[2]

제1차 세계 대전의 거의 막바지인 1918년 후반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황은 확실하게 동맹국에 불리하게 바뀌었고 독일춘계 공세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공세와 함께 실패하였다. 9월 중순 협상국마케도니아 전선을 돌파했고 진격을 막을 수 없었던 불가리아는 9월 29일 항복했고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제국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10월 16일 카를 1세는 국민 선언문을 발표하여 제국의 오스트리아 부분을 연방화하고 국가 의회의 구성을 합법화했지만[3] 이는 붕괴를 가속화할 뿐이었다. 헝가리에서는 10월 17일 집권한 베케를레 제3정부가 1867년 타협안을 폐지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만 유지하였다. 같은 날 전 총리 이스트반 티자[4]는 의회 앞에서 전쟁이 "패배했다"고 선언했다.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던 베케를레는 10월 23일 사임했다. 부다페스트 거리에서는 국민 의회를 지지하는 시위가 일어나 카로이를 총리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 1918년 10월 28일 군중들은 부다 성으로 행진하려고 했으나 체인교를 건너던 중 경찰에 의해 저지되어 총격을 당했다. 이 "체인교 전투"에서 3명이 사망하고 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군중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리고 게자 루카치치는 부다페스트의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받았는데 국민 의회에 확고히 반대했지만 그의 군대는 빠르게 그의 휘하에서 탈영했고 그로 인해 혁명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과꽃 혁명의 유래는 10월 30일 황제가 기득권 정치인인 허디크 야노시를 총리로 지명했을 때였다. 기젤라 광장에 모인 군인들은 국민 의회에 맹세하였고 그들은 모자에 달린 장미를 떼어내고 과꽃으로 대체했는데 이는 곧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국민 의회는 도시의 전략 거점을 장악하고 정치범을 석방했다. 1918년 10월 31일 오전 3시에 허디크 야노시는 황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사임을 알렸다. 그는 헝가리 역사상 가장 짧은 17시간 동안 총리로 지냈다. 황제는 카로이를 총리로 지명했으며 국민 의회 정당들과 함께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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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제국내에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국,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바나트가 독립하였는데 마지막 헝가리 제1공화국의 독립으로 버틸 힘조차 사라졌다[2] 오역이 있을 수 있음[3] 헝가리에게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제안 했으나 실패[4] 혁명 이후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