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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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독일어)
Osztrák-Magyar Monarchia(헝가리어)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svg
오스트리아 제국[A]
헝가리 왕국[A]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장.svg
상선기[A]
국장
Indivisibiliter ac Inseparabiliter
갈라질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다.

상징
국가
Gott erhalte, Gott beschütze
(황제 찬가/민중의 노래)

Isten, áldd meg a magyart
(하느님, 헝가리인을 축복하소서)

지도
파일:1011px-Austro-Hungarian_Monarchy_(1914).svg.png
파일: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kaiserlich und königlich).png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ff0000, 글자색=#fff, 내용=시스라이타니아)] :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영토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008300, 글자색=#fff, 내용=트란스라이타니아)] : 헝가리 왕국 관할 영토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0000ff, 글자색=#fff, 내용=공동통치령)] : 양국 공동통치령(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1867년 5월 29일 ~ 1918년 10월 31일
대타협 이전
해체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헝가리 제1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역사
1867년 2월 8일 대타협
1878년 7월 13일 베를린 회의
1908년 10월 6일 보스니아 합병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1919년 9월 10일 생제르맹 조약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 조약
지리
위치
중동부유럽
수도
시스라이타니아
부다페스트성 이슈트반 왕관령
면적
676,615km² (본토 면적)
인문환경
인구
1914년 52,800,000명
공용어
시스라이타니아: 없음(사실상 독일어)
성 이슈트반 왕관령: 헝가리어
종교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유대교, 이슬람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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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동군연합체
국가원수
황제(오스트리아), (헝가리)
정부수반
총리[1]
역대 군주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를 1세
주요 총리
(시스라이타니아)

프리드리히 폰 보이스트[2]
알프레트 에르빈 추 빈디슈그래츠
하인리히 리터 폰 비테크
하인리히 람마시
주요 총리
(성 이슈트반 왕관령)

언드라시 줄러
티서 칼만[3]
티서 이슈트반
허디크 야노시
경제
통화
굴덴, 크로네

1. 개요
2. 국가 상징
2.1. 국호
2.2. 국기
2.3. 국가
3. 인구
5. 역사
5.1. 형성
5.2. 대외 정책
5.3. 해외 영토 및 식민지 확보
5.4. 사회
5.4.1. 시스라이타니아
5.4.2. 성 이슈트반 왕관령
5.5. 군대
5.6. 재편성 계획
5.7. 해체
6. 황제
7. 출신 및 주요 인물
8. 기타



1. 개요[편집]



기수가 흔들고 있는 군기합스부르크 가문의 깃발이다.
신성 로마 제국 문장(Coat of Arms)의 검은 쌍두독수리와 황금색 깃발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유럽제국.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인들의 대타협(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Kiegyezés)으로 만들어진 국가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a)[4]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하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5]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잡한 구조나 다양한 민족과 언어[6]를 가지고 있었다.

2. 국가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독일어
Österreich-Ungarn Monarchie
헝가리어
Osztrák-Magyar Monarchia
세르보크로아트어
Austro-Ugarska / Аустро-Угаpска
루마니아어
Austro-Ungar
우크라이나어
Австро-Угорщина
슬로바키아어
Rakúsko-Uhorsko
체코어
Rakousko-Uhersko
폴란드어
Austro-Węgry
슬로베니아어
Avstro-Ogrska
이탈리아어
Austria-Ungheria

위 명칭들은 축약된 국호이며 정식 국호가 따로 있었다.

독일어: 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 (디 임 라이히스라트 페어트레테넨 쾨니크라이헤 운트 렌더 운트 디 렌더 데어 하일리겐 웅가리셴 슈테판스크로네)
헝가리어: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 (어 비로덜미 터나치번 케프비셸트 키라이샤고크 에시 오르사고크 에시 어 머저르 센트 코로너 오르사거이)

정식 국호의 뜻은 '국가협의회(라이히스라트)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와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다. 국가협의회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는 빈 제국의회의 의원을 뽑는 국가들이며, 성 이슈트반(헝가리의 초대 왕)의 왕관은 헝가리의 왕이 대대로 써온 왕관으로 이 왕관의 영토는 헝가리 왕국을 뜻한다.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 국가협의회를 대표하는 왕국들과 영토와 별도로 언급된 것은 헝가리가 이제는 국가협의회의 일원이 아닌 독립적인 의회와 체제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이자 왕국이라는 의미의 Kaiserlich und Königlich(카이저리히 운트 쾨니그리히), K.u.K로 불리기도 했으며 여기서 차용한 카카니아(Kakania)[7]로 불리기도 했다.

2.2. 국기[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주권국가의 이중 군주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합스부르크 어기, 즉 오스트리아의 국기와 헝가리의 국기를 이어붙인 국기(파일:합스부르크 기-헝가리 기.png)를 쓸 때도 있었으며[8], 각자의 국기를 따로 쓰거나 하였다.

상선기의 용도로 오스트리아 국기와 헝가리 국기를 합친 바리에이션이 사용 되기도 했다. 이 상선기는 폴란드볼 이나 하츠 오브 아이언 , 월드 오브 워쉽 과 같은 각종 매체나 게임에서 널리 사용되어 유명하다.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svg
파일:성 이슈트반 왕관령기.svg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변형).png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상선기.png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상선기(변형).png
오스트리아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
트란스라이타니아
상선기
상선기(문장 단순화)
오스트리아 상선기
오스트리아 상선기(문장 단순화)

2.3. 국가[편집]


황제 찬가 항목 참조.

3. 인구[편집]


파일:오헝 언어 분포.png
[9]

전체[10]
총 51,390,223명 (1910년)

민족별 인구 구성 [ 펼치기 · 접기 ]

오스트리아
28,571,934명

민족별 인구 구성 [ 펼치기 · 접기 ]

헝가리
20,886,487명

보스니아
1,898,044명}}}
위 지도는 미국의 지리학자인 윌리엄 R. 셰퍼드 박사가 1911년에 작성한 지도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개략적인 인구분포를 표현하고 있다.[11]

이중제국의 마지막 인구통계인 1910년 자료에 따르면 이중제국 전체의 인구는 총 51,390,223명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시스라이타니아)에 28,571,934명이, 크로아티아와 헝가리(트란스라이타니아)에 20,886,48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공동통치령인 보스니아에는 1,898,044명[12]이 거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인구통계 조사에서 민족이 아닌 모어 또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조사했다. 즉 통계자료는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 분포가 아닌 언어 분포인 셈. 따라서 인구통계에는 어느정도 누락되는 정보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민족적 정체성이 아닌 언어 사용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기간인 1910년 인구통계의 종교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중제국 인구의 약 4.4% 가량인 22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유태인(유대교 신자)이었다.[13] 제국내 유대인 대부분은 이디시어가 모어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대개 도회지에 거주하여 도시에 거주하는 다른 독일인이나 헝가리인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또한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을 형성하고 있어 교육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때문에 유대인 중에는 당대 주류언어라 할 수 있는 독일어나 헝가리어 구사가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결론적으로 인구통계에서 '유대인'은 대부분 독일어나 헝가리어 화자로 집계되었다.

또다른 예시로 훗날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민족분쟁의 비극으로 널리 알려지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 역시 위 지도에서는 단일한 세르보크로아트어 사용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종교조사 통계자료로 당대 인구조성을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에 대한 인구조사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에 다소간 차이가 존재한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주로 달마티아 왕국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모두가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로 조사되었다. 반면 헝가리 왕국 및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인구조사에서는 남슬라브어 및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들을 상당히 세세하게 분류했다. 헝가리 내에서는 세르비아어 사용자와 크로아티아어 사용자를 구분했음은 물론, 왕국 내 거주하는 남슬라브의 군소 하위민족집단들도 별도로 집계되었다. 이런 민족집단들은 주로 당시 헝가리 왕국 남부지역, 오늘날의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등지에 주로 거주 중이었다. 헝가리 왕국이 조사한 기타 왕국내 남슬라브어 사용주민들로는 부녜브치인(Bunjevci)[14], 쇼크치인(Šokci)[15], 크라쇼바니인(Krashovani)[16], 바나트 불가리아인[17] 등이 있다.

4. 영토[편집]






파일:attachment/b0013361_4f6e8aa566da9.png

행정 구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과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이 구별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후기에 점령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둘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근교에서 도나우(Donau)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지천 라이타(Leitha)강을 기준으로 잡아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은 시스라이타니아,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은 트란스라이타니아로 부르기도 한다.

지도에서는 시스라이타니아(1~15번), 트란스라이타니아(16~17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8번) 순으로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은 각 지역의 로마자 알파벳순으로 매겨져 있다.

번호
국가
수도
현재 지역
1
보헤미아 왕국
독일어: 뵈멘 왕국(Königreich Böhmen)
프라하
독일어: 프라크(Prag)
체코 서부
2
부코비나 공국
독일어: 부코비나 공국(Herzogtum Bukowina)
체르니우치
독일어: 체르노비츠(Czernowitz)
우크라이나 서부[18]
3
케른텐 공국(Herzogtum Kärnten)
클라겐푸르트(Klagenfurt)
오스트리아[19]
4
크라인 공국(Herzogtum Krain)
류블랴나
독일어: 라이바흐(Laibach)
슬로베니아 중부
5
달마티아 왕국
독일어: 달마티엔 왕국(Königreich Dalmatien)
자다르
독일어:차라(Zara)
크로아티아 남부
6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독일어: 갈리치엔 운트 로도메리엔 왕국(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르비우
독일어: 렘베르크(Lemberg)
폴란드 남부, 우크라이나 서부
6-1
크라쿠프 대공국
독일어: 크라카우 대공국(Großherzogtum Krakau)
크라쿠프
독일어: 크라카우(Krakau)
폴란드 남부[20]
7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독일어: 외스터라이히 연해국(Österreichisches Küstenland)
트리에스테
독일어: 트리에스트(Triest)
이탈리아 동부,
슬로베니아 남서부, 크로아티아 북부
7-1
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
독일어: 트리에스트 제국직할 도시(Triest Reichsunmittelbare Stadt)
이탈리아 동부
7-2
고리치아-그라디스카 제후백국
독일어: 괴르츠 운트 그라디스카 제후백국(Gefürstete Grafschaft Görz und Gradisca)
고리치아
독일어: 괴르츠(Görz)
이탈리아 동부, 슬로베니아 서부
7-3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독일어: 이스트리엔 변경백국(Markgrafschaft Istrien)
포레치
독일어: 파렌츠(Parenz)
슬로베니아 남부, 크로아티아 북부
8
하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Niederösterreich)
(Wien)
오스트리아
9
모라비아 변경백국
독일어: 메렌 변경백국(Markgrafschaft Mähren)
브르노
독일어: 브륀(Brünn)
체코 동부
10
잘츠부르크 공국(Herzogtum Salzburg)
잘츠부르크(Salzburg)
오스트리아
11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독일어: 외스터라이히 슐레지엔 공국(Herzogtum Österreichisch Schlesien)
오파바
독일어: 트로파우(Troppau)
체코, 폴란드
12
슈타이어마르크 공국(Herzogtum Steiermark)[21]
그라츠(Graz)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동부
13
티롤 제후백국(Gefürstete Grafschaft Tirol)
인스브루크(Innsbruck)
오스트리아, 이탈리아[22]
14
상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Oberösterreich)
린츠(Linz)
오스트리아
15
포어아를베르크 주(Land Vorarlberg)
브레겐츠(Bregenz)
오스트리아
16
헝가리 왕국
독일어: 웅가른 왕국(Königsreich Ungarn)
부다페스트(Budapest)
[23]
17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독일어: 크로아티엔 운트 슬라보니엔 왕국(Königreich Kroatien und Slawonien)
자그레브
독일어: 아그람(Agram)
크로아티아 북부, 세르비아
18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독일어: 보스니엔 운트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Kondominium Bosnien und Herzegowina)
사라예보
(독일어: Sarajewo)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5. 역사[편집]



5.1. 형성[편집]


1848년 3월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8~1916.11, 재위 1848.12~1916.11)는 신 절대주의 (바흐 절대주의) 통치를 유지했지만 국내의 많은 불만을 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왕국-프랑스 제2제국 연합군과의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패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함과 동시에 북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고(1859.7) 독일에서는 북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을 무시하다가 발발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전해(1866.7), 프라하 조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고[24] 동시에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 편으로 가담한 사르데냐에 의해 베네치아까지 상실하며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완전히 배제당했다.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와 프로이센에게 연패를 당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자[25] 합스부르크 황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으며 신 절대주의 체제 아래에서 억눌려 있던 소수민족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제국이 공중분해될 것을 우려한 프란츠 요제프는 제국과 황실을 보전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종전의 신 절대주의 체제를 철회하고 이때까지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자 제국 안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헝가리인들과 대타협(Ausgleich)을 맺고 이중 제국 체제를 만들었다.

대타협은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위를 분리해서 헝가리 왕국과 의회를 독립시키되, 헝가리의 왕위만은 계속 합스부르크 황제가 차지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는 공동의 중앙 정부 조직이 있었으므로 단순히 칭호만 공유하는 인적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 아닌 물적 동군연합(real union)으로 간주된다.

이 타협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헝가리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제국의 중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는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사항은 두 국가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하였고 재정 분담금과 관세 등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불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군대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26]

하지만 헝가리 왕국 내에서조차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27],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 집단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이 소수 민족으로 있었으며, 양국 공통으로 유대인루신인이 있었다.

5.2. 대외 정책[편집]


이런 상황에도 제국은 발칸 지역으로의 팽창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주요 국가가 1884~1885년의 베를린 회담 뒤에 아프리카로 급속히 팽창했던 반면에 해군력이 뒤떨어졌던 오스트리아는 가까운 발칸 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런 발칸 식민화를 오스트리아의 동진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과 충돌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많은 국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지지했고, 프랑스를 패배시킬 정도로 강력한 독일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해줬기 때문에 정복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는 서쪽과 남쪽으로는 판로를 확장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 정부 입장에서는 동쪽의 발칸 반도로 확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난 발칸 국가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쉽게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또한 1890년대를 전후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주도해 온 독일계가 독일 민족 국가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에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리 세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방침도 변경되어서 원래는 제국 소속의 소수 민족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발칸 반도의 현상 유지 정책을 펼쳤지만, 이 시기부터는 제국을 이득으로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고 영토 확장을 계획했다. 이런 팽창 정책으로 발칸 반도를 노리던 다른 주요 국가였던 러시아와 협력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아졌을 때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하였으며, 이후에는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연달아 일어난 두 전쟁을 빠르게 승기를 잡아서 큰 손실을 얻지 않았고, 원래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받던 루마니아마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자 오스트리아의 지배력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 영토에 대한 영향권을 합의했으나, 러시아가 이러한 조약 변경을 다른 주요 국가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전에 1908년 오스만 제국이 '통일 진보 위원회(청년 튀르크당)'가 일으킨 혁명으로 혼란에 빠지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세르비아 왕국러시아 제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28] 이러한 조치는 남슬라브 민족들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러시아와도 적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제국을 도와준 국가는 오스만에 영향력을 얻으려는 독일뿐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동맹은 독일만 남게 되었다.

5.3. 해외 영토 및 식민지 확보[편집]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해운 및 해외 식민지의 운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엄연히 열강이면서도 다른 열강이나 식민제국들과는 달리 대규모 해외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인 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의 비중이 높은 다문화 제국의 특성상 본국과 식민지의 구분과 경계가 모호한 사례로 보기도 한다. 간혹 제국 내 타 영토들에 비해 이질적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식민지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사학자들에게 보스니아는 식민지로 간주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중제국이 대외 확장에 아예 무관심한 건 또 아니었다. 1858년[29]부터 니코바르 제도에 원정을 보내면서 식민지화의 가능성을 검토했다. 하지만 1886년 원정에서 영국의 점유를 확인 후 포기했다.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하며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어버린 스페인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매각하려고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해군력 증강의 명분이 될 해외 식민지 확보의 일환으로 여기에 관심을 보였으나 식민지 확보에 미온적인 헝가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의화단 운동 당시 다른 열강들과 함께 진압에 참여하여[30] 톈진 조계의 일부를 획득했다. 톈진 조계는 1차 대전으로 제국이 해체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5.4. 사회[편집]



5.4.1. 시스라이타니아[편집]


오스트리아는 법적으로는 자유주의 등의 사상을 강하게 억압했다. 하지만 오랜 다민족 국가의 역사와 소수민족 통치 경험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에 관대한 국가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심각한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런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통제와 느슨한 집행 방침을 당대인들은 '슐람페라이'적 관행이라고 불렀다.

검열은 형식적이었고, 수많은 글에서 여러 사상가와 (심지어는 아나키스트도) 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운동가인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했다. 특히 스탈린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민족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그 자신이 조지아 출신이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처럼 다민족 국가였다.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의 밑에서 일할 때부터 소비에트 정권에서 소련 내부의 민족문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07년 남성 보통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오스트리아 쪽 제국의회의 정당 구성을 보면 과격한 민족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까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온건하긴 하지만 사회주의파였던, 빅토르 아들러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오스트리아 원내 제1당이었다.[31] 제국 내 소수민족인 체코인이나 이탈리아인 등도 의정활동에 참가했다. 체코계 의원들은 보헤미아 왕국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분리하여 헝가리와 비슷한 지위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1911년 제국의회에서는 이탈리아계 정당 소속 의원이 이탈리아계 영토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었다.[32] 이런 자치권에 대한 의견관철과 논의는 당연하게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소수민족 의원들은 종종 보이콧으로 맞서곤 했다. 이렇다 보니 제국의회는 수시로 의정활동이 마비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 쪽에서는 의정활동보다는 황제가 직접 개입하여 칙령으로 통치와 행정이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개인에게는 업무부담이 과중되었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20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실의 비극적인 가정사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일 중독 성향에다 경직된 권위주의 가부장적 사고 및 행동이 큰 원인이지만 슐람페라이적 관행 역시 그 단초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 더 넓게 봤을 때, 당대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물론 이후의 중부유럽에서도 의회민주주의 정착이 지연된 것이기도 했다.[33] 또한 이런 상황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의회민주주의나 소수민족의 정치적 권리에 환멸을 느끼고 나치즘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느슨하고 관대한 통치에는 부작용이 뒤따랐지만 만약 소수민족에게 강압적인 통치를 한다면 대번에 문제가 생길 것이 명확했으니[34] 슐람페라이적 관행을 마냥 잘못된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슐람페라이적 관행은 이중제국 체제 및 그 현상유지의 태생적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 보장 제도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당대 유럽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노숙자 같은 사람에게도 사회 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고 몇년 간 직업이 없어도 노숙자용 무료 숙소에서 잠을 자고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밖에 공립 대학이나 고등 교육도 무료였는데, 재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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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가톨릭 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남녀 간의 교제 또한 상당히 자유로웠다. 19세기 말엽부터 여성들 사이에선 미혼, 기혼 상관 없이 젊은 군인과 짧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폴란드인이나 아일랜드인 같은 '억눌린 민족들(submerged nations)'이 독립을 위해 이미 투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서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민족주의는 응집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전적으로 '억눌린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지배적인 독일계 엘리트 계층이 있었지만 심지어 이 독일인들에게도 이제는 북쪽에 새로운 독일 제국이라는 인접한 조국이 생겼다. 1867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억눌린 민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마자르족에게 헝가리 왕국이라는 준 독립국 지위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이중 군주국'으로 재편했다. 헝가리 왕국은 독일인이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 '오스트리아인들'과 군주(1848년 이래로 줄곧 통치한 프란츠-요제프 황제), 군대, 재정, 외교만을 공유했다. 독일인처럼 (그리고 사실 부다페스트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할 때 웨스터민스터 국회의사당을 본뜰 만큼 크게 찬탄한 영국인처럼) 마자르족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이라고 여겼고 헝가리 왕국 내 슬라브 소수 민족들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이중 군주국 서쪽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북부(체코인), 북동부(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 남부(슬로베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슬라브족뿐만 아니라 신생 이탈리아 왕국이 탐내는 알프스 산맥 남사면의 이탈리아권(독일어권 남 티롤도 포함)을 다스렸다. 부다페스트의 거친 마자르족 소지주들과 달리 빈의 합리적 관료들은 피지배 소수 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했고 독일인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 결과 빈의 정부 기구는 마비되고 황제가 칙령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풍성한 문화 융합은 분명히 빈을 지적·예술적으로 활기 넘치는 독특한 도시로 만들었지만 그곳의 지식인들은 우려와 함께 때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봤다.

-Michael Howard, <제1차 세계대전> 中


수백 년간 제국을 통치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위는 제국 내 국민들은 물론 다른 유럽인들에게까지도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정통성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작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구조적으로 민족주의 세력에 호의적이지 않기 쉬웠고, 소독일주의에도 반대했다.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통일 독일이 세워진다면 수가 부족한 독일계로 소수민족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슈바르첸베르크 백작 등이 주창한 통일안은 '독일인들의 민족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토를 신생 독일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대오스트리아주의에 가까웠다.

시스라이타니아의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긍정하는 쪽에 가까웠다. 일례로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제국의 몰락이 눈에 보이기 전에는 완전한 분리가 아니라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35] 나중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국부로 대접받는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조차도 이 노선을 고수했다. 체코의 또 다른 분리 운동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도 체코인들이 제국이라는 틀에서 나오게 된다면 독일과 러시아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라 보고 제국 내에서의 자립을 추구했다. 그리고 이 걱정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는 사실상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체코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36]

1917년 1월 말까지도, 체스키 스바즈(Českého svazu)의 최고 회의에서는 두 번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917년 1월 24일의 회의에서는 '우리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계 대전 이후에도 체코 민족에게 속하는 모든 권리는 제국의 틀 내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 군주국 내에서 성취될 것이다.' 라고 했으며, 1917년 1월 31일 회의에서는 '체코 민족은 합스부르크의 군주국 이외에는 아무런 미래도 없으며, 발전의 조건도 찾을 수 없다.' 라고 선언했다. 또한 1917년 5월 30일 제국의회에 참여한 체코 의원들도 황제와 제국을 지지하면서 민족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37]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문화적 자기 이해>, 김신규


언어적으로도, 시스라이타니아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공용어가 없었고 1867년 기본법에서는 모든 민족과 언어의 평등을 공식 인정했다. 물론 독일계 위주로 국가가 굴러갔던건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라이타니아의 다문화적 관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가 빈의 의회인데, 의도적으로 소수민족 언어를 사용하여 필리버스터를 유도하는게 가능했으며, 특히 체코인 의원들이 자주 이 방법을 써먹었다.[38]

5.4.2. 성 이슈트반 왕관령[편집]


오스트리아 제국과 달리 헝가리 왕국에서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헝가리 의회는 크게 대타협 지지파인 자유당과 대타협 반대파인 독립당 두 세력으로 나뉘었는데 총선에서 헝가리인들은 독립당을 주로 선호했으며, 소수민족들은 주로 자유당을 지지했다.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 성향 정당들 역시 존재했지만, 이들은 1~2석 정도로 큰 힘이 없었다. 헝가리에서는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아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매우 적었는데, 상당수의 헝가리 대의원들은 3자리 수, 또는 4자리 수에 불과한 득표로 당선되었으며, 1910년 마지막 총선 기준 전체 헝가리 인구 1800만 명 중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110만 명 정도에 불과했고 이는 전체 인구의 6.4%에 불과했다.[39] 이는 보통 선거가 도입될 경우 헝가리인들의 몰표로 총선에서 패배가 선실시 되는 자유당의 반대 때문이었는데 보통 선거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으나 자유당의 필사적인 저지로 끝내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타협 지지파인 자유당은 왕국이 존재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기를 집권 여당으로 존재했다. 독립당은 190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며 집권했지만, 이들 역시 대타협을 파기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독립당 정부는 1909년 헝가리 국립 은행 설립 문제로 분열해 무너졌고, 총선 참패 후 자진해산했던 자유당 세력이 국민노동당을 창당하여 1910년 총선에서 압도적 과반을 먹는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을 다시 되찾았다.

또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민족 억압책을 폈기에, 오스트리아 같은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 헝가리의 강압적인 마자르화 정책으로 헝가리 내의 소수민족들은 민족 정체성의 붕괴를 걱정해야 했으며, 그 중 슬로바키아인은 체코인과 연대해 헝가리에서 독립하려고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국가가 191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다.[40]

5.5. 군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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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통적으로 정부, 황실, 군대에 대한 인기가 높아 타 유럽 국가에서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먼저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8년부터 수백 년 동안 지배 체제를 유지하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서 일어난 개신교의 전파와 오스만 제국으로 대표되는 무슬림의 침공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고, 합스부르크의 지배자들은 자국을 정통 기독교 신앙의 보루로 여겼으며,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는 대외 전쟁보다는 경찰과 같은 치안 사무를 주로 맡고 있었고, 군사 훈련이 힘들지 않았으며[41] 규율이 엄격하지도 않았다. 상관의 명령을 받지 않은 행동이라도 결과가 좋으면 주는 훈장[42]도 있었다. 또한 육군의 제복이 민족별로 색깔이 다르고 연대별로 칼라장이 다른 등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고,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는 많은 나라의 군대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였다. 그리고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각종 행사를 많이 벌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들 중에서도 트란실바니아갈리치아 같은 지방은 특히 미개발된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치안을 위해 육군 병력이 주둔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황제의 힘을 과시하는 중요한 선전 효과를 주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 등 서로 다른 민족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모여 국가를 지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한 문필가는 제국이 없어진 이후 사람들이 더이상 '깃털 달린 모자를 쓴 군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매우 불평한다고 쓰기도 했다. 프랑스 못지 않은 패션과 문화의 강국이라 그런지 군복 디자인도 실용성은 둘째 치고 일단 보기에는 멋있는 청회색 군복에[43] 철모가 아닌 훗날 나치 독일 국방군 M43 야전모의 전신이 되는 챙달린 모자를 쓰니 당대에도 오스트리아군은 전투력은 좀 허접해도 보기에는 멋진 군대로 통했다.

특히 슈타이어 만리허라는 총기 제조 회사가[44] 오스트리아에 있었는데 페르디난트 만리허라는 무기 기술자가 제작한 만리허 소총을 생산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열강들의 볼트액션 소총에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편승하는데 일조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평화시 병력 확보는 엄청난 문제였다.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총 인구는 5,000만 명 이상이었지만, 징집이 가능한 인원은 12만 5,000명에 불과했다. 평화시 오스트리아군 병력은 50만 명 이하였으며, 총동원령이 떨어지면 35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향토예비군, 동원예비군, 대체예비군과 같은 예비군 병력과 헝가리의 예비 병력인 혼베드 등과 같은 다양한 2선급 부대들이 포함된 숫자였다. 이론적으로 19세 이상의 신체 건장한 남성은 징병 대상이 되어 2년을 현역으로 복무하고 예비군에 편입되도록 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최소한 군사적 전통 면에서는 매우 강력한 군대였다. 오스트리아군 연대 대다수는 17세기 오스만 제국과 싸웠던 연대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꾸준히 확장을 거듭하면서 오스트리아군 내부에서도 점점 비게르만계 출신 병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민족 출신 부대의 수가 독일어를 구사하는 부대의 수를 넘어서자, 충성심 및 의사소통과 관련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1914년 당시, 전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들 가운데 30퍼센트만이 독일계였다. 대부분의 독일계, 헝가리계 병사들은 슬라브족 병사들에 비해 교육도 더 잘 받았고, 주로 포병, 공병, 기병 등의 특수병과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소위 일반 보병이라고 불리는 보병 연대들은 배치되는 병력의 거의 70퍼센트가 슬라브계였다. 독일계, 헝가리계처럼 잘 교육받은 슬라브계 병사들은 체코계뿐이었으며 당연히 체코계 병사들도 특수병과에 배치되었다. 헝가리인은 슬라브인을 혐오했기 때문에 헝가리인과 슬라브인을 한 부대에 함께 배치할 때는 많은 주의가 필요했다.

제국군 내에서 또 다른 문제는 언어 문제였다. 제국 정부가 군대 내에서의 공영어를 독일어 단독으로 지정했음에도 장병들 사이에 쓰이는 언어가 달라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슬라브인 출신 병사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80개 정도의 명령어만 정리한 '군대 슬라브어(Armee-Slawisch)'라는 체코어 기반의 일종의 피진이 나오기도 했지만 장병들끼리 말이 안 통하는 상황 때문에 독일인과 헝가리인 출신 장교들과 슬라브인 출신 병사들 사이에서는 아예 대화가 나오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슬라브인들을 징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앞서 서술했듯 당시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슬라브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을 제외했다가는 제국을 지키는 군인들의 숫자가 매우 부족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뽑을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의 장비가 부실하고 장교들의 기강이 해이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적은 군비 탓이기도 했다. 적국의 첩보 기관에 매수되는 장교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1913년 일어난 알프레트 레들(Alfred Redl) 대령 사건[45]은 오스트리아 군부 최악의 사건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징집 인원은 연평균 15만 9,500명으로, 전체 인구대비 비율로 따졌을 때 독일 제국보다 20퍼센트 이상 적었지만, 러시아 제국에 비해서는 오히려 약 50퍼센트나 높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부대 가운데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부대[46]는 제국의 핵심인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본토에서 징집한 독일인과 헝가리인 부대들뿐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제국민의 거의 3분의 2가 주변 국가들과 민족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서부에 이탈리아 왕국과 인접한 티롤 제후백국,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에는 이탈리아계가 다수 거주했고, 동부에는 보헤미아 왕국모라비아 변경백국에 거주하는 체코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는 루신계와 루테니아(우크라이나)계, 폴란드계, 루마니아 왕국과 인접한 지역인 부코비나 공국과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했으며 헝가리 왕국 내에 슬로바키아계가 있었다. 남부의 크라인 공국에는 슬로베니아계가, 세르비아 왕국과 인접한 달마티아 왕국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세르비아계가 살고 있었다. 특정 민족으로 구성된 부대들을 해당 민족의 본거지로부터 먼 곳에 배치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슬라브계 병사들 없이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나 헝가리인 부대들만으로는 동부전선을 모두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슬라브계 부대들도 전선에 투입했지만, 1916년 중반 이후 슬라브계 부대들이 대러시아전에 투입하기에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4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 예산 지출의 절대명제는 '무조건 절약'이었다. 1911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 예산은 독일 제국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고, 러시아 제국 국방 예산의 4분의 1을 겨우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병력 규모도 1911년 말, 전시 군사력을 9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증가한다는 계획이 채택되면서 늘어나기는 했지만, 주변 열강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적은 수준이었다. 그 결과 개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무장 상태는 자국이 자랑하는 만리허 소총이라는 우수한 무기를[48] 제식 소총으로 택했음에도 러시아 제국군과 비교해서 그다지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육군 원수는 1914년 6월에 오스트리아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력을 과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력은 독일 제국의 도움 없이는 세르비아 왕국조차 제대로 제압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 제국은 일단 전쟁이 터질 경우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작전 협조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1896년~1909년에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는 거의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콘라트의 주장에 따라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가 재개되기는 했지만, 1914년 당시 양국 간에는 대러시아전을 염두에 둔 어떠한 합동 작전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향후 전쟁의 전망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개전 당시 총 80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던 독일 제국은 프랑스 공화국을 처리하는 데 36일~40일이 걸리는 동안, 동부전선에서는 나머지 10개 사단으로 방어에 전념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독일 제국의 속셈은 일단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80개 사단을 모두 동부전선에 투입해서 러시아 제국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애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령 폴란드(바르샤바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맹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은 콘라트의 지휘 아래 동부전선이탈리아 전선을 맡았지만, 러시아 제국군이나 이탈리아 왕국군을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해 러시아 제국군의 브루실로프 공세에 무너졌고 이탈리아 왕국군에겐 이손초 전투, 카포레토 전투같이 매우 치열한 접전 끝에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했다. 심지어는 1차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세르비아 왕국에게도 크게 고전하여 1914년의 세르비아 침공에서는 일시적으로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지만, 세르비아 왕국군의 역습에 말려들어 오히려 자국 국경으로 쫓겨나는 추태를 보였다. 이는 원래 세르비아 침공에 예비로 배정된 육군 제2야전군을 러시아 육군이 예상을 뛰어넘어 빠르게 갈리치아로 진격해 오자 이곳으로 돌려야 했고,[49] 당초 계획과 달리 공자와 방자의 전력비가 거의 1대1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충분한 예비대가 연속적으로 투입되었다면, 세르비아 왕국군이 실제 역사처럼 선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 하지만 병력수가 비슷하다 해도 당시 가난한 신생 독립국의 군대인 세르비아 왕국군은 중화기는 물론 기본적인 소화기조차 턱 없이 부족하였다. 프랑스, 러시아 등이 세르비아에 긴급히 무기를 지원했지만, 전쟁이 워낙 뜻밖에 터진지라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엄연히 열강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을 물리친 것은 전적으로 국왕 페타르 1세의 리더쉽 아래에 세르비아 군민이 단결하여 감투정신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르비아 왕국 정도는 오스트리아가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독일 제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듬해인 1915년 마켄젠 육군 원수의 지휘하에 독일 제국 육군불가리아 왕국 육군이 개입함으로써 간신히 세르비아를 제압할 수 있었다. 타넨베르크 전투라는 독일 제국군의 실적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것이었다.

해군은 육군에 비해 국제 공통에 가까운 제복을 입어 대민 인지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하지만 해군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원으로 전쟁 발발 당시 잘 현대화된 전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왕국 해군을 상태로 승전보를 올리고 1차 대전 당시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나 U보트 에이스 게오르크 폰 트랍 소령과 같은 인물을 내는 등 크게 선전했다. 패전으로 인해 내륙국으로 전락하기 전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이탈리아 해군과 패권 다툼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 무시 못할 해양 강국이었다. 다만 수병들에 대한 처우는 타국 대비 좀 열악한 편이었는지, 전함 내에 가혹한 환경의 영창과 교수대 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국이 해체된 후 해군 함선들은 협상국들에게 배상함으로 넘겨졌고, 몇 년 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대부분 해체되거나 표적함으로 처분되었다.

5.6. 재편성 계획[편집]



5.6.1.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대오스트리아_합중국_지도.jpg
기본적으로 이중제국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안되는 독일계와 헝가리계가 국가운영을 주도했다. 주로 슬라브계인 다른 민족들 역시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반독립국가와도 같은 지위나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지위를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약 반세기에 이르는 이중제국의 존속 기간 내내 체제 모순 극복을 위한 여러 재편성안이 제기되었다. 이런 재편성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이다.

합중국 계획은 기존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구성된 제국을 민족별로 동등한 주권을 부여받은 주로 구성된 연방 체제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제안하고 루마니아계 정치가 아우렐 포포비치(Aurel Popovici)가 1906년 세부 안건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뒤이어 벌어진 1차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면서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은 착수조차 하지 못했다.

5.6.2. 삼중제국[편집]


위의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과 별개로 1880년대에 태동하여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황제 카를 1세의 지지도 받았던 재편성 계획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삼중제국 재편성 안이 있다.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안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개인의 이상이었던 것에 반해 1880년대부터 존재하여 오스트로-슬라비즘 세력들의 지지와 추후에는 황제의 지지까지 받았던 안이었지만 제국 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지배하던 헝가리 왕국의 반대로 번번히 무산되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망이 다다른 1918년, 크로아티아인들이 지지 의사를 철회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었다. 어떻게 보면 위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안의 선배이자 실현에 더 가까웠던 안이지만 비슷하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산된 개편안이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만약에 승전을 했더라면 삼중제국은 실현됐을 것이다.

5.7. 해체[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여했다가 패전한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은 한데 묶여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새로 독립한 폴란드에 영토를 할양하고 소국으로 전락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1918년 11월 12일 제위에서 밀려나 제국은 해체되었다.

처음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시킬 생각은 없었다. 1917년까지만 해도 전황이 별로 좋지 않았던데다 지금은 같은 편으로 싸우고 있지만 언제 다시 적대관계로 돌변할 지 모르는 러시아 제국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를 견제할 국가로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그 후에 들어선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보다 세력이 예전보다 훨씬 위축된 나라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살려둬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해체된 제국 내의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수립,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제국 내 모든 독일어권 지역들을 영토로 선포했으나 이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과 협상국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영토만을 가지게 된다.

6. 황제[편집]





대수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1대
프란츠 요제프 1세 / 페렌츠 요제프 1세
1848.12.2
1916.11.21
2대
카를 1세 / 카로이 4세
1916.11.21
1918.11.12

7. 출신 및 주요 인물[편집]


황실 인물은 합스부르크 가문 문서로.

  •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 독일계 정치인[50]
  • 카를 레너 - 독일계 정치인[51]
  • 엥겔베르트 돌푸스 - 독일계 정치인[52]
  • 쿠르트 슈슈니크 - 독일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53]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독일계, 체코계 정치인[54]
  • 아돌프 히틀러 - 독일계 정치인[55]
  • 알치데 데 가스페리 - 이탈리아계 정치인[56]
  • 에드바르트 베네시 - 체코계 정치인[57]
  • 에밀 하하 - 체코계 정치인[58]
  • 밀란 호자 - 슬로바키아계 정치인[59]
  • 요제프 티소 - 슬로바키아계 사제, 정치인[60]
  • 살러시 페렌츠 - 헝가리, 아르메니아, 독일, 루신, 슬로바키아계 정치인[61]
  • 너지 임레 - 헝가리계 정치인[62]
  •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 폴란드계 정치인[63]
  •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폴란드계 정치인[64]
  • 스테판 반데라 - 우크라이나계 정치인[65]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계 정치인[66]
  • 안테 파벨리치 - 크로아티아계 정치인[67]
  • 프란체스카 도너(이부란) - 유대계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 시몬 비젠탈 - 유대계 나치 사냥꾼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독일계 군인[68]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크로아티아계[69] 군인[70]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독일계 군인[71]
  •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셰사 - 독일, 헝가리계 군인[72]
  •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 (불명)[73] 군인[74]
  • 프란츠 로어 폰 덴타 - (불명)[75] 군인[76]
  • 호르티 미클로시 - 헝가리계 군인, 정치인[77]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 독일계 군인[78]
  • 에르하르트 라우스 - 독일계 군인[79]
  • 로타르 렌둘릭 - 크로아티아계 군인[80]
  • 프란츠 뵈메 - 독일계 군인[81]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82]
  • 오딜로 글로보츠닉 - 독일, 체코, 슬로베니아계 나치 친위대원, 경찰[83]
  • 아돌프 아이히만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84][85]
  • 오토 슈코르체니 - 폴란드계 나치 친위대원, 군인[86]
  • 아몬 괴트 - 독일계 나치 친위대원[87]
  • 바소 추브릴로비치 - 세르비아계 암살[88]자, 교수, 정치인
  • 프란츠 카프카 - 유대 및 체코계 작가
  • 카렐 차펙 - 체코계 작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독일계 작가
  • 로베르트 무질 - 독일계 작가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 독일 및 우크라이나계 작가
  • 슈테판 츠바이크 - 유대계 작가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유대계 작가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유대 및 독일계 심리학자
  • 알프레트 아들러 - 독일계 심리학자
  • 빅토르 프랑클 - 유대계 심리학자
  • 알렉시우스 마이농 - 이탈리아계 심리학자, 철학자
  • 에른스트 마흐 - 독일계 철학자
  • 오토 바이닝거 - 유대계 철학자
  • 에드문트 후설 - 유대계 철학자
  • 칼 포퍼 - 유대계 철학자
  • 카를 카우츠키 - 체코계 철학자
  • 테오도르 헤르츨 - 유대계 언론인, 시오니즘 운동가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유대 및 독일계 철학자
  • 쿠르트 괴델 - 독일계 수학자, 철학자
  • 에르되시 팔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존 폰 노이만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 조지프 슘페터 - 독일 및 체코계[89] 경제학자, 철학자
  • 오토 노이라트 - 독일계 경제학자
  • 칼 폴라니 - 헝가리, 유대계 경제학자
  • 루트비히 볼츠만 - 독일계 물리학자
  •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 - 유대 및 독일계 물리학자
  • 에르빈 슈뢰딩거 - 독일 및 영국계 물리학자
  • 그레고어 멘델 - 독일계 사제, 유전학자
  • 카를 란트슈타이너 - 유대계 병리학자
  • 페르디난트 만리허 - 독일계 및 체코계 발명가
  • 헤디 라마르 - 유대계[90] 배우, 발명가
  • 니콜라 테슬라 - 세르비아계 발명가
  • 오스카 쉰들러 - 독일계 사업가
  • 구스타프 클림트 - 독일계 화가
  • 에곤 실레 - 독일계 화가
  • 구스타프 말러 - 유대계 음악가
  • 안톤 브루크너 - 독일계 음악가
  • 프란츠 폰 주페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로트 - 독일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독일계 음악가
  • 슈트라우스 가문 - 독일계
  • 칼 미하엘 치러 - 독일계 음악가
  • 안톤 베베른 - 독일계 음악가
  • 알반 베르크 - 독일계 음악가
  • 아르놀트 쇤베르크 - 유대계 음악가
  • 한스 아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91]
  • 프리츠 크라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
  • 에리히 클라이버 - 독일계 음악가
  • 카를 뵘 - 독일계 음악가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그리스, 슬로베니아계 음악가
  • 한스 리히터 - 헝가리계 음악가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유대계 음악가
  • 프란츠 리스트 - 헝가리계 음악가
  • 코다이 졸탄 - 헝가리계 음악가
  • 벨라 바르톡 - 헝가리계 음악가
  • 도라 페야체비치 - 크로아티아 및 헝가리계 음악가
  • 에르뇌 도흐나니 - 헝가리계 음악가
  •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 체코계 음악가
  • 안토닌 드보르자크 - 체코계 음악가
  • 레오시 야나체크 - 체코계 음악가
  • 요제프 호프만 - 폴란드계 음악가, 발명가
  • 프리츠 랑 - 유대계 영화감독
  • 벨라 루고시 - 헝가리 및 세르비아계 배우
  • 리 스트라스버그 - 유대계 배우
  • 마티아스 신델라 - 체코계, 유대계 축구선수, 감독
  • 후고 마이슬 - 유대계 축구선수, 감독
  • 빌모스 좀보리 - 헝가리계 축구선수
  • 티서 이슈트반 - 헝가리계 정치인
  • 알로이스 히틀러 - 독일계 공무원[92]
  • 알프레트 얀자 - 독일계 군인
  • 유제프 할레르 폰 할렌부르크 - 폴란드계 군인, 정치인

8. 기타[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3국을 모두 통합시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선포가 가능하고, 이후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를 무찌르고 본래의 영토까지 획득해내고 나면 그 지역까지 핵심 주로 편입시켜 완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활이 가능하다. 특히 헝가리는 아예 오스트리아-헝가리 부활을 목표로 하는 루트가 따로 있다.[93]
유명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오헝이 승전국이라 제국 자체는 존속해 있지만 카를 1세가 소수민족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약속한 대가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속국 헝가리, 보헤미아, 일리리아, 갈리치아-로도메리아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로 시작한다. 이후 7차 대타협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군대로 소수민족들을 억압하는 독재국가가 될 수도 있으며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설립하여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도나우 연방을 실현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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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C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기로 알려진 상선기는 사실 제국의 공식 국기가 아닌 상선기이자 해외의 영사관에서 쓰이던 기이다. 공사관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2개 국기를 동시에 게양했으며(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svg), 대사관에서는 공사관에 게양한 2개 국기에 황실기까지 추가로 게양했다. 국기 부자 당장 독일 제국에서 제작한 동맹국 선전 포스터만 봐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국기는 2개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깃발이 너무 유명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국기 두 개를 복붙해서 걸어놓으면 멋이 안 나서 그런지 상선기를 국기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페르디난트 그라프 폰 체펠린 문서의 포스터를 보면 알겠지만, 어느 정도 국기처럼 사용된 경우도 없잖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1]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각각 총리가 한명씩 있었다.[2]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총리이자 시스라이타니아의 초대 총리.[3] 티서 이슈트반의 아버지.[4] 이는 영어 명칭이며, 독일어로는 치스라이타니엔(Cisleithanien)이다.[5] 흔히 트란스라이타니아로 알려져 있으며, 독일어로는 트란스라이타니엔(Transleithanien)이라고 한다.[6]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참전을 명령하는 징집 선전문이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이탈리아어, 슬로베니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루신어, 이디시어 등의 12개 언어로 작성되기도 했다.[7]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장편 소설 <특성없는 남자>(Der Mann ohne Eigenschaften) 제8장의 제목이 카카니엔(Kakanien, kaiserlich und königlich에서 첫 알파벳 독일어 발음인 Ka und Ka에서 따온 말)이고 영어로 Kakania로 번역되었다.[8] 영사관에서는 헝가리 왕국 국기와 오스트리아 제국 두 국기를 모두 게양하였으며, 대사관에서는 황실기까지 더해 세 국기를 모두 게양하였다.[9] 갈리치아에서 루테니아어가 루테시아어로 오타가 나있다.[10] Charles W. Ingrao, The Germans and The East, (Purdue University Press, 2008); pp174[11] 실제 제국 내 언어사용자 분포는 위 지도보다 더 복잡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 남부 보이보디나와 바나트 지역의 경우, 마을 단위로 서로 다른 민족이 뒤섞여 있었다.[12] 보스니아 인구의 96%는 세르보크로아트어 화자였다.[13] 참고로 이웃한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은 인구의 1.2% 정도 되었다. [14] 대부분이 오늘날 세르비아 공화국 보이보디나 자치주 북부지역, 수보티카 시와 그 인근에 분포하고 일부는 헝가리에도 거주 중이다. 오스만의 침공을 피해 헤르체고비나와 달마티아 지역에서부터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헝가리 왕국의 조사에서 이들은 '가톨릭 세르비아인', '달마티아인', '일리리아인' 등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녜브치보다는 크로아티아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15] 오늘날 크로아티아 동부 및 헝가리 남부 버러녀주, 보이보디나 일대에 거주. 부녜브치인과 마찬가지로 원래 보스니아에 거주했다가 오스만의 침공을 피해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과 그 일대에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16] 오늘날 루마니아 서부 바나트 지역에 거주.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접경지대에서 사용하는 토를라키(Torlak)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고 주로 가톨릭 신도들이다. 오늘날 대부분은 역시 대부분은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간주하고 크라쇼바니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루마니아 크로아티아계 연합이라는 정당을 통해 루마니아 내 다른 소수민족 정치집단들과 연대하여 루마니아 국회에 참여하고 있다.[17] 오늘날 루마니아 서부 바나트 지역에 거주.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언어는 불가리아어 하위분파인 바나트 불가리어를 사용한다. 독특하게도 대부분이 불가리아정교회가 아닌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18] 원래는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소련이 베사라비아(현재의 몰도바, 오데사 주 일부, 체르니우치 주 북부 일부)와 함께 부코비나 북부 지역을 가져갔다. 현재는 체르니우치 주에 속해 있다.[19] 남쪽 10% 정도의 아주 작은 영토는 현재 슬로베니아에 속한다.[20] 원래 크라쿠프 자유시오스트리아 제국이 관리하는 독립 국가였으나, 1830년 러시아 내 폴란드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이에 대응해 곧바로 진압, 대공국 지위로 합병되었다.[21] 영어로는 스티리아(Styria)로 불린다. 부르크뮐러의 에튀드 Op. 100 중 하나인 '스티리아의 여인'의 그 스타리아.[22] 쥐트티롤 지역인 남부 티롤은 이탈리아인이 많은 지역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포함되어 현재의 볼차노 자치구가 되었다. 나머지 티롤 지역은 오스트리아에 잔류.[23]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 헝가리 전체, 슬로바키아 전체, 우크라이나 남서부 지역인 갈리치아, 루마니아 서부 지역인 트란실바니아, 세르비아 지역인 보이보디나가 합쳐져 있다. 두 지역을 구별하는 지도도 있고, 같이 묶어놓는 지도도 있다.[24]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모두 있어야 진정한 독일 국가를 이룬다"고 말했을 정도로 웬만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을 원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주권 국가로서의 평등한 협상을 거부하자 끝내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쫓아냈다.[25] 게다가 자신들을 패배시킨 그 사르데냐와 프로이센이 마침내 자신들의 영향권이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을 통일하고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자 더욱 속이 쓰렸다.[26]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치세 후반기에 헝가리 의회가 군대 내의 독일어 사용에 대해 불만을 품고 헝가리어를 동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자, 황제는 헝가리 국민의 투표권을 개정해 빈민과 농민이 대거 참정권을 가지도록 해서 언어 운동을 주도한 헝가리 귀족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자 언어 운동 지지자들은 재빨리 황제에게 지지를 보내며 꼬리를 내렸다. 내가 잘나지는 것보단 나보다 못난 게 나만큼 잘나지는 걸 막으려는 모양새였다.[27] 단, 크로아티아인들의 영토 중 달마티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소속이었다.[28] 이때 세르비아는 군대를 동원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원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29] 대타협 이전이긴 하나[30] 이 때 오헝제국은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 못지않은 잔인한 보복전을 벌였다.[31] 이웃한 독일 제국에서도 빌헬름 2세가 합법화시킨 이후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으로 등극하고 1912년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유럽 전반에서 사회주의가 유력하기는 했다.[32]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인이 많이 사는 곳은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트리에스트 인근, 달마티엔 지역, 쥐트티롤의 트렌티노 일대였다.[33]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 지연이었다.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은 2차대전과 냉전 등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다른 동구권 국가들 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서구로 편입되었다. 이들 국가들에서는 시민사회의 조직화와 정치참여의 전통이 이미 자리잡고 있어 즉각적으로 재활성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의 경우는 민주주의가 확고히 자리잡은 게 맞느냐는 견해가 많긴 하다만 옛 유고연방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구 소련권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성공적으로 서구사회에 편입되었다.[34] 실제로 오헝제국을 해체시키고 건국된 다민족 국가 유고슬라비아는 왕국 시절부터 세르비아인들이 우월 의식을 드러내며 타 민족을 차별하였고 이에 타 민족들은 불만을 품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아예 추축국의 편을 들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에 일조했을 정도였다. 이후 재건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가 민족주의를 억압하며 유고 내 모든 민족들을 동등하게 만들려 했지만 국가 요직은 여전히 세르비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열흘 전쟁(슬로베니아 독립전쟁)부터 시작해 코소보 전쟁으로 끝나는 피비린내나는 전쟁 끝에 해체되었다.[35] 물론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처음부터 완전한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코에서 분리독립 여론이 대세가 된 건 1차대전 말 시점.[36] Bartoš, J. et als. (1995) 267.[37] Bakke, Elisabeth (1999) 185.[38]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인이 보기에도 이런 방식의 필리버스터는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리는데, 민족주의가 판치던 20세기 초의 시선으론 어땠겠는가.(...) 이런 분위기에 반발심을 가진 사람 중 한명이 아돌프 히틀러였다.[39]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27%가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40] 다만 상술했듯 체코인은 완전 독립에 미온적이었다.[41] 대학생은 1년만 복무하면 되었다.[42] 테레지아 훈장. 병사가 상관의 명령을 받지 않은(직접적인 명령 불복종은 제외) 자발적인 행동으로 공을 세웠을 경우 포상한다.[43] 이 색을 독일어론 hechtgrau라 하는데, 동시대 프랑스군의 빨간 바지나 독일군의 피켈하우베 마냥 막상 사람 목숨이 백만 단위로 갈려들어가는 총력전 상황에 빠지니 실용성 문제가 심각해져서 결국 1915년 이후로 독일과 같은 feldgrau색 군복으로 바뀐다.[44] 뒷날 AUG 돌격소총을 만들게 되는 그 곳 맞다. 제국이 해체되고 생제르맹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의 군비가 제한되자 한때 파산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서 지금도 당시 이름 그대로 성업 중이다.[4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첩보 장교 알프레트 레들 대령의 사치스러움과 동성애 성향을 파악한 러시아 제국 정보부가 1902-1903년에 걸쳐 그를 포섭하여 이후 무려 10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작전계획을 넘겨받은 사건. 하필 그가 방첩 담당이었기 때문에 오헝제국의 내부 방첩망은 완전히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이게 드러난 것은 1차 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이었다. 레들 대령은 추문을 덮으려는 군부의 압박을 받고 자살했고, 1년 뒤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미 방어계획을 소상히 알고 있던 러시아 제국군에게 추풍낙엽처럼 밀려버렸다. 1985년 오스트리아에서는 레들의 인생을 주제로 한 '레들 대령'(Redl Ezredes, Colonel Redl)이란 영화를 제작했다. 레들 역에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등에 출연한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Klaus Maria Brandauer)가 배역을 맡았다.[46] 위정자들 입장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소수민족들은 사실 대전 말까지 군주국에 충성했지만, 권력자들은 이들이 언제 이탈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했다.[47] 물론 개전 초기에는 슬라브계 병사들도 어쨌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자기들의 나라인 만큼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은 기대 이하의 전쟁 실적을 거뒀고, 제국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가는 와중에 러시아 제국은 체코계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정찰 부대를 통해 체코계 병사들의 투항이나 탈영을 적극 유도했다. 러시아 제국은 체코계 오헝 탈영병들로 부대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러시아 제국 병사들도 무기가 부족한 판에 체코 투항병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니콜라이 2세가 별로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그런 시도가 다시 있었지만, 이 역시 체코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러시아 제국에 실망한 체코계 병사들이 전투에 참가하려 하지 않자 수포로 돌아갔다.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공화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결성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지만, 얼마 안 가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고 볼셰비키가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자,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려 한다. 그러나 볼셰비키와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자, 이들은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 백군을 지원하며 내전의 일익을 담당한다. 군단은 1차 대전이 끝나고 체코가 독립하며 백군이 열세에 처한 이후 러시아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지자 조국으로 돌아갔고, 그 와중에 김좌진북로군정서여운형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작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48] 특유의 스트레이트 풀 방식 덕분에 1차대전기 제식 볼트액션 소총 가운데 최고 수준의 연사력을 자랑했다. 다만 극한 환경에서의 신뢰성이 다소 부족했고, 엔블록식 클립 사용으로 인해 이물질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49] 흔히 1913년에야 확인된 알프레트 레들 대령의 간첩 행각이 이유라고 보는 편이다. 왜냐하면 레들 대령이 10여 년간 러시아 측에 빼돌린 정보 중에 하필 갈리치아 방어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레들 대령의 간첩 행각이 갈리치아 방어선 붕괴의 결정적 계기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50] 외무부 장관[51] 오스트리아 공화국 초대 총리[52] 오스트리아 연방국 초대 총리[53] 오스트리아 연방국 2대 총리[54] 오스트리아 연방국 3대 총리, 나치 독일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국가판무관[55] 나치 독일 총통[56] 이탈리아 공화국 초대 총리[57] 체코슬로바키아 2대 대통령[58] 체코슬로바키아 3대 대통령[59] 체코슬로바키아 2대 총리[60] 슬로바키아 제 1공화국 초대 대통령[61] 헝가리 왕국 국민단결정부 수장[62] 헝가리 인민 공화국 3대 수상[63] 폴란드 망명 정부 총리[64] 폴란드 인민 공화국 3대 서기장[65]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수장[66]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초대 대통령[67]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수장[68]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원수[69] 실제로는 세르비아계라는 말도 있으나 본인은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겼다.[70]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원수[71]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원수, 나치 독일 명예원수[72]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원수[73] 출생지는 체코의 올로모츠.[74]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원수[75] 출생지는 루마니아의 아라드.[76]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원수[77]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중장, 헝가리 왕국 섭정[78]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대령[79] 나치 독일 육군 상급대장. 오스트리아 제국군 복무 후에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이어 나치 독일군까지 복무하며 상급대장까지 진급.[80] 나치 독일 육군 상급대장. 오스트리아 제국군 복무 후에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이어 나치 독일군까지 복무하며 상급대장까지 진급.[81] 나치 독일 육군 산악대장. 오스트리아 제국군 복무 후에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이어 나치 독일군까지 복무하며 대장까지 진급.[82] 나치당 친위대 대장, 3대 국가본안본부장[83] 나치당 친위대 중장, 루블린 SS및 경찰 지휘관[84] 나치당 친위대 대령[85] 출생은 독일이나,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이주하여 병합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지냈다.[86] 나치당 무장친위대 대령[87] 나치당 친위대 소령[88] 사라예보 사건 당시 암살 가담자[89] 슘페터의 두 할머니 모두 체코계다. 그러나 슘페터 본인은 스스로를 독일계로 여겼다.[90] 우크라이나계 유대인과 헝가리계 유대인의 혼혈[91] 태어난 곳은 독일 제국의 라이프치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인이고, 아이슬러 본인도 1차 대전 당시 오헝제국군으로 복무했다.[92] 아돌프 히틀러의 부친이다.[93] 은근히 사람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활 플레이를 많이 한다. 사실 이 게임 자체가 특성상 역사 그중에서도 서양사에 관심 및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하기 마련인데 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러가지 요소로 볼때 매우 매력적인 국가이다. 명망높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는 입헌군주국이고, 현대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존립되었다면 막 나가는 러시아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줄수 있던 영토와 영향력을 가졌던 국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