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생활이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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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유주의 정당
민주당
(일부)

국민 생활이 제일

일본 미래당
신당 키즈나
(흡수 합당)


파일:국민 생활이 제일 로고.png
国民の生活が第一(こくみんのせいかつがだいいち | 국민 생활이 제일
약칭
생활[1]
영문 명칭
People's Life First: LF
한글 명칭
국민 생활이 제일[2]
창당일
2012년 7월 11일
해산일
2012년 12월 16일
전신
민주당 (일부)
후신
일본 미래당
통합한 정당
신당 키즈나
이념
사회자유주의
탈원전
소비세 증세 동결
지방분열
행정개혁
주소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정 2초메 12-8 나가타정SR빌딩 3층
대표
슈하마 료(主濱了) / 재선 (, 20~22대)
참의원
4석 / 121석 (4.4%)
중의원
0석 / 480석 (0%)
1. 개요
2. 역사
2.1. 창당
2.2. 신당 키즈나와의 합당
2.3. 해산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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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당. 민주당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회파 오자와 그룹이 창당하였으며 2012년 7월 11일부터 12월 16일까지 5달간 존속하였다.


2. 역사[편집]


국민 생활이 제일은 역사를 더 깊게 들여보면 민주당의 후신으로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오자와 그룹은 전부 민주당 소속이였으며, 국민 생활이 제일에 통합된 신당 키즈나는 오자와파에 가까운 민주당 소속 의원 9명이 탈당하여 창당된 정당이였다.

그렇기에 국민 생활의 제일은 사실상 민주당의 후신이자, 오자와 그룹의 뿌리로 오자와 이치로의 개인정당이라 봐도 무방했다.

2.1. 창당[편집]


2012년 6월 26일 중의원에서 체결된 '사회 보장·세금 일체 개혁 관련법 방안'에 반대하여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에서 제명당한 37명의 중의원 의원과 12명의 참의원 의원, 총 49명의 의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한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7월 11일에 결성했다. 7월 4일에 교섭단체 및 회파로 공식 결성되었다. 창당 당시 중의원민주당, 자민당에 이어 제3당#이었으며, 참의원은 민주당, 자민당, 공명당에 이어 제4당#이었다. 다음 날 7월 12일 중의원 회파 "국민 생활이 제일·시즈나"를 결성했다.#

당시 민주당에 실망했던 몇몇 지지자들과 당원, 지방 의원, 오자와계 의원들이 이 정당으로 몰려들었거나 민주당을 탈당하였으며, 심지어 이와테현지사 닷소 다쿠야까지도 국민 생활이 제일이 창당되자 민주당을 탈당했다.

결성 후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의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요미우리 신문은 1%, 마이니치 신문은 2%#, 아사히 신문은 1%#로 조사되며 중, 참의원에서 각각 제3·4당인 것치고는 상당히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했다.[3]

2.2. 신당 키즈나와의 합당[편집]


같은 해 8월 당시 민주당 대표이자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노다 요시히코가 신당 키즈나와의 합병을 준비하자, 신당 키즈나 소속의 와타나베 요시히코, 미와 노부아키 2명이 신당 키즈나를 탈당하고, 국민 생활이 제일에 입당했다. 이후 신당 키즈나가 해산하기 하루 앞둔 11월 15일, 국민 생활이 제일과 합당하며 흡수되었다.# 이후 신당 키즈나 대표 우치야마 아키라가 합류했다.


2.3. 해산[편집]


신당 키즈나와의 합당 이후 11월 27일 시가현지사를 맡고 있던 가다 유키코일본 미래당을 결성했다.# 일본 미래당은 탈원전소비세 증세 동결을 정책으로 내고 있었기에 같은 정책을 내고 있던 국민 생활이 제일의 대표 오자와 이치로는 자신의 몇몇 오자와계 의원들을 이끌고 일본 미래당에 입당했다.#

이후 오자와와 그의 친인사들이 없어진 당 내에서는 12월 10일 공석이었던 당대표에 슈하마 료가 선출되었으며# 당에 남아있던 한 명의 의원마저 차기 총선인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아 12월 16일 정당 자격을 상실하게 되며 사실상 당이 망해버린다.# 이후 12월 18일 정치 자금에 관한 회의를 열어 총무성에 정당 해산서를 제출하며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해산 후 당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참의원 의원 4명이 일본 미래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일본 미래당에서는 오자와파와 가다 유키코 대표가 갈등을 빚어 가다 유키코가 당을 탈당하고, 당시 국민 생활이 제일에 소속되어 있었던 모리 유코가 입당하여 생활당을 창당하며, 이후에는 당시 무소속의 참의원 의원이었던 배우 출신의 야마모토 타로가 입당하여 생활당과 야마모토 타로와 친구들로, 2016년에는 자유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며 사실상 오자와의 개인정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자유당은 2019년 민주당의 후신 민진당의 후신인 국민민주당과 합당하여 오자와의 개인정당은 사실상 해산되었다. 여기서 야마모토 타로는 해산 직전 레이와 신센구미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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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약칭은 훗날 일본 미래당의 후신인 생활당에서 당명으로 사용된다.[2] 한글식으로 번역하면 국민의 생활이 제일이나, 명사를 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3] 이 것은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민생당과 비교할 수 있는데, 민생당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 의석 수가 20석으로 당시 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에 이어 제3당이었으나, 여러 분당과 합당을 거치면서 지지율이 점점 낮아져 결국 총선 당시 0석을 얻는 대참패를 이루었다. 이는 국민 생활이 제일도 마찬가지인데, 국민 생활이 제일의 사실상 후신인 일본 미래당이 창당된 이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자와계를 비롯한 여러 의원들이 대거 낙선하면서 의석 수가 9석(...)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선거에서도 여러번 대참패를 겪는 등 사실상 오자와계가 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오자와의 정치 생명도 거의 끝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