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이씨(내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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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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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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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후궁
귀인 이씨 | 貴人 李氏


파일:서삼릉후궁묘역.jpg

서삼릉 빈·귀인 묘역 전경
출생
1847년
사망
1914년 2월 13일 (향년 67세)
조선 경기도 경성부 북부 수문동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
능묘
귀인이씨지묘(貴人李氏之墓)
재위기간
대한제국 궁인
미상 ~ 1900년 8월 3일
대한제국 소의
1900년 8월 3일 ~ 1906년 5월 27일
대한제국 귀인
1906년 5월 27일 ~ 1914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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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李)
배우자
고종 태황제
자녀
1녀 (조졸)
봉작
궁인(宮人) → 소의(昭儀) → 귀인(貴人)
당호
내안당(萊安堂)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고종후궁. 본래 궁녀 출신으로 본관과 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고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고종의 후궁 가운데 '귀인 이씨'가 세 명이라서 자주 혼동되지만, 《순종실록부록》에서 나오는 '덕수궁 이귀인(德壽宮 李貴人)'은 일찍이 승은을 입고 요절한 옹주를 두었다는 묘사가 고종의 행장 속 '귀인 이씨'와 일치한다.[1]

2. 생애[편집]


1900년(고종 37) 소의(昭儀)로 봉작되었고, 1906년(광무 10)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2]

덕수궁내(德壽宮內) 내안당 이귀인(萊安堂 李貴人)은 노병(老病)으로 신음(呻吟)하다가 거(去) 13일 오전(午前) 6시 30분에 북부 수문동 사저(北部 水門洞 私邸)에서 별세(別世)하였다는데

《매일신보》 1914년 2월 17일자 기사


1914년 북부 수문동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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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종실록부록 2권, 순종 4년 9월 1일 양력 2번째기사. # [2] 내안당 이씨가 정2품 소의로 봉작될 때, 순헌황귀비는 귀인에서 순빈(淳嬪)으로 지위가 높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