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주(타자)/논란 및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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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
2. 재계약 잡음
3. 팀 내 선수들과의 마찰
4. 사생활에 대한 비판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김동주(타자)의 비판, 논란 및 사건 사고를 서술하는 문서.

선수로서의 평가와 인간으로서의 평가가 매우 상반되는 인물이다. 야구실력은 KBO 역대 최고 수준, 사생활은 인간 쓰레기로 표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품과 성적이 서로 상반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선수로는 그나마 진갑용 정도인데, 그 진갑용도 자기가 몸담았던 삼성에서도 삼팬들이 적어도 은퇴할 때는 예우를 해줬고 지금도 약물 등 몇몇이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팬들이 있는 편인데 김동주는 후술하듯 그런 시선이 있을지언정 프런트의 결정을 꺾을 순 없었다[1] 게다가 진갑용은 어디까지나 경기 중의 행동이 문제가 되었을 뿐 경기장 밖에서는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편이었지만 반대로 김동주는 경기장 내에서는 까일거리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불륜 등 사생활에서 구설수를 여러 차례 만들었다. 임태훈 같은 경우는 어디까지나 성인 사이의 일이었고[2] 김동주는 전처는 물론, 자신의 자식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만 남겼을 것이다. 물론 이 부문 KBO 1인자는 부동의 넘사벽 이호성이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저런 중범죄 사례를 빼면, 사생활 관련 구설수로 김동주를 뛰어넘는 인물은 손에 꼽는 편이다.

우타자 중에서도 거의 정상급으로 꼽히는 성적이지만, 김동주에 대한 평은 동급의 대스타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누적스탯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래에 기술하는 야구 외적인 이유에 따른 이미지 하락이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통산 타출장 3-4-5를 찍어주고 전성기에는 한 시즌에 20개 정도의 홈런을 거뜬히 때려내는 등 뛰어난 성적[3]을 남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공사 양면으로 잡음이 많았다. 때문에 야갤 등지에서는 간통주, 버비오빠, 합법갑[4], 사랑은 김동주[5]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두산 팬덤에서조 언론에 보도된 김동주와 두산의 결별 과정과 결별 이전 2군 시절 때 이야기로 인해 논란이 생길 정도였다. 물론 팬서비스면에서는 깔거리가 없는 선수였기에 김동주를 기억하는 베어스 팬덤 내에서 김동주의 사생활 언급을 피하고 선수로서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팬덤이 다수다.


2. 재계약 잡음[편집]


소속팀에 대한 애정이 없고[6] 돈을 밝힌다고 하여 김돈줘, 그 과정에서 연봉 9억을 달라고 해서 김구억이라는 별명이 있다.[7] 2007 시즌이 끝나고[8] FA 자격을 얻자마자 일본 진출을 타진했을 때 두산에 60억이 넘는 금액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9] 일본구단에는 2년 4억엔[10] 수준의 계약을 요구하면서 관심을 가지던 요코하마가 관심을 끊으면서 계약이 엎어졌고[11] 2008시즌 이후에 요구조건을 낮추면서 또다시 2번째로 일본진출을 시도하지만 이번에는 지바롯데 감독과 구단측간의 갈등으로 인해 딜이 엎어졌다. 물론 2번씩이나 일본 진출을 실패한데에는 선수 본인의 무리한 요구와 현지 구단의 문제도 있었지만 선수 본인의 사생활 문제라는 의견도 있긴하다.[12]

위에 언급되다시피 집요하게 일본 진출을 노리는 모습과 첫번째 일본 진출 당시 부른 돈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 진출을 하려는 이유가 이혼 소송중에 있는 전처에게 위자료를 주지 않기위해 일본에 진출한다는 썰이 크게 돌았는데... 당시 팬들의 반응은 '설마 그 정도로 XXX는 아니겠지' 였지만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통해 사실 인증을 해서 팬들을 멘붕시켰다.[13]

어쨌든 돈을 과하게 요구 하는 모습 때문인지 당시 돈을 크게 쓰는 스타일이 아니였던 두산 베어스과 충돌이 있었고 그영향인지 이혼하기 전인 2001년 시즌 종료후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될 뻔했다.[14] 당시 공중파 기사 당시 두산이 요구한 트레이드 조건은 20억+후보급 선수였는데 여기에 유동훈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트레이드 내용이 중간에 새는 바람[15]에 무산되었다.[16] 기아타이거즈 딜 전에도 삼성 라이온즈와도 트레이드 썰이 있었다. 트레이드 상대자는 김한수였지만, 두산 측이 현금을 끼워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삼성 측에서 그냥 김한수를 믿기로 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혼 송사에 휘말리던 2004년에도 몸과 마음이 지쳤다면서 시즌 종료후 급 은퇴선언을했는데[17] 트레이드 설이 엄청나게 돌았었다.

2011년에는 두산과 계약기간에서의 입장 차이로 인해 우선협상 기간에 타결을 보지 못하고 FA 시장에 뛰쳐나갔고, 11월 20일에는 롯데 자이언츠 이적설이 나왔다. 당시 감독이었던 양승호와 과거 팀 동료였던 홍성흔까지 나서서 적극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 문제도 있고 막대한 연봉으로 인한 보상금 문제 때문에 롯데도 발을 뺐고, 결국 FA시장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두산과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전구단 상대 협상기간이 되면서 바로 두산과의 계약이 타결되지 않을까 했으나 김동주 개인 사정으로 협상이 계속 연기되었다. 팬들은 당연히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만큼 두산에서 뛰다가 은퇴하기를 바랐지만, 김동주는 계속해서 돈좀 더 만져보겠다고 이러니 팬들 속이 타들어가던 상황이었다.

결국 2012년 초, 3년 32억에 두산에 잔류했다. 하지만 그 후 2군 붙박이 신세가 된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FA 때문에 두산 프런트 및 그룹 고위층들에게 밉보이고, 마침 부진하니까 비싼 김동주를 2군에 박아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2군에 박아두면 연봉 액수 부담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산 구단은 이런 김동주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김동주를 붙잡아왔다. [18] 실제로 두산 베어스는 어려운 모기업 사정에도 불구하고 김동주를 리그 연봉 1위에 올려 놓으며 리그 최고 타자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게다가 김동주가 일본 진출 드립에다가 이혼 소송 중에 은퇴해 버린다며 진상 중에 상 진상짓을 저지를 때도 두산 구단은 그를 버리지 않고 상징성을 감안하여 끝까지 붙잡았다. 때문에 김동주가 은퇴할 때 거의 내쳐지는 듯한 모양새가 된 건 김태룡 단장이 그 간에 쌓인 것에 대한 분풀이에 가깝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KBO 40주년 기념으로 열렸던 KBO 40인 레전드 시상식 당시에도 김태룡 단장은 나오지않고 전풍 대표이사가 나왔을정도


3. 팀 내 선수들과의 마찰[편집]


상술했듯 김동주는 동료 선수들과도 마찰을 빚는다고도 알려져서 여러 구단들이 영입을 꺼렸다. 그나마 kt wiz에 갈 수도 있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다만 양의지에게 니킥을 당하는 등 타 선수들과 웃으면서 잘 어울리던 여러 모습들을 보면, 팀 케미스트리를 망친다는 주장도 언론에서 만들어낸 부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2022년 현재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하면서 과거 본인이 몸 담았던 두산 베어스의 일부 선수들에게 타격 코칭을 도와주기도 했고 40주년 레전드 시상식 당시에도 두산 베어스 소속으로 행사를 한 것을 보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고참 선수가 구단 수뇌부의 눈밖에 나서 버림받는 일이야 더러 발생하지만, 김동주 정도의 화려한 성적을 냈던 스타 선수가 타 구단, 동료, 언론 그 누구의 옹호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언론에 비추어질 정도로 비참하게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가 얼마나 심하게 구단 수뇌부와 프런트에 찍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 동료 선수는 “시즌 때 방망이 스폰서에서 나오는 배트 티켓 여유분이 꽤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티켓을 좀 나눠줄 수 있는지 묻자 현금화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거절하더라. 잘 나갈 때 대인배적인 씀씀이를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싶다”라고 증언했지만, 김동주의 현역시절에 본인의 배트를 타 선수에게 주던 모습이 비춰진 적이 있어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19]

또 다른 기사에서는 김동주가 그라운드 안팎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석 안팎에서 행실이 달라졌다거나, 선수생활 말미에는 강한 투수가 나오자 출장을 피하고 약한 투수가 나오자 출장하려 했다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밝히기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진욱 감독이 김동주를 배제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지만, 김동주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존감으로 타팀의 레전드 투수들을 차례차례 두들겨왔던 선수였다. 그래서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김동주가 성토를 받게 된 이유는 국그릇 인터뷰이다. 이 기사는 김동주 측의 요청이 있었는지 삭제되었지만 이미 퍼질 대로 퍼진 뒤였다.

기자 : 베테랑은 남이 하기 싫은 말을 앞서서 해야 한다.

김동주 : 지금은 군에 입대한 유망주 후배가 있다. 함께 2군에서 점심을 먹는데 늘 자기 식사만 챙기더라. 15일을 지켜봤다. 내 연차에 할 말인지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국그릇을 엎었다. '너는 선배 없냐. 동료 없냐. 부모님 없냐'라고 야단쳤다. 나중에 입대할 때 문자를 보내왔더라. '선배님. 저 제대하면 꼭 큰 사람 될게요'라고. 고마웠다. 후배들을 1~2년 가까이에서 보니까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더라. 후배들이 술 먹고 사고 치지 않게,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야구를 하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 문제의 국그릇 부분 전문[20]


이 말이 공개되자마자, 네티즌은 분개하여 온갖 욕을 퍼붓는 중. 막내가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하는 선후배 문화야 김동주만의 문제는 아니니 그렇다쳐도, 부모님 없냐는 등의 패드립을 친 건 쉴드가 어렵다. 정작 부모가 없고 가정교육 못받은 티 낸건 본인이 전처와 자녀들에게 한 행패를 두고 하는 셀프디스의 의미라 카더라.애초에 김동주를 좋아하지않던 두산 구단 내부에는 영구결번은 언감생심이고 은퇴식조차 회의적임을 언론에 흘릴 정도로 김동주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미 그의 배번이었던 18번은 성영훈에게 돌아간 상황.[21] 한때 두산 구단 홈페이지에는 성영훈의 번호가 27번으로 표시되었던 적이 있었기에 정수근의 SNS와 엮여서 김동주가 복귀하는 것 아니냐는 설레발이 잠시 돌았지만, 홈페이지가 미처 정비가 되지 않아서 생긴 일일 뿐이었다.

결국 두산에서는 김동주의 은퇴식을 반대하는 선수들이 있다며 언론플레이를 하였고 결국 구단차원의 김동주를 위한 공식 은퇴행사는 없었다. 이 상황을 안타까워한 팬들이 조촐하게 호프집에서 그의 은퇴를 기념하는 자리를 가진 것이 고작이었다.

레전드급 타자임에도 이래저래 참 씁쓸한 말년이다. 김동주가 은퇴를 선언한 이후, 박동희는 단 한마디의 직접적인 비판도 없이, 간접적이지만 신랄하게 김동주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FA로 들어온 홍성흔마저 1군 벤치를 떠난 2016년부터의 두산은 딱히 이렇다 할 최고참 없이 비슷한 나이대의 오재원, 김재호, 김재환 등이 활달하고 개방적인 덕아웃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KS 7년연속 진출을 이룬 현재의 두산의 모습은 김동주의 난 자리가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타석에 섰을 때 팬들에게 김동주만큼의 기대감을 주는 타자는 아직은 없다.[22]

그래도 2022년에 레전드에 뽑히며 준 은퇴식을 치루고 두산 팬들과 선수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눴으니 지금은 여한은 없을 듯 하다.


4. 사생활에 대한 비판[편집]



4.1. 간통 혐의[편집]


불륜 및 전처와 전처소생 자녀를 대상으로 한 언론플레이 관련 문제는 두산 베어스/사건 사고합법드립을 참조.

[1] 진갑용과의 차이점은 아마 프런트와의 충돌횟수로 보인다. 약물논란과 꼰대논란으로 인성논란이 붙었을지언정 은퇴이후 연수까지 보낼정도로 선수시절 프런트와 별 충돌이 없었던 진갑용과 달리 연봉협상 때 충돌과 하단에 언급될 은퇴사태까지 있는 김동주 두 선수에 대해 프런트가 보여주는 차이점은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다.특히 은퇴사태때 고생한 김태룡이 단장이었던 점에서...[2]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임태훈이 비슷한 사건을 일으켜 물의를 빚은 점을 생각해보면 그냥 본인의 처신 문제다.[3] 신인 데뷔 시즌부터 121안타 24홈런을 기록했다는 점이 김동주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거기다 통상적으로 타자의 홈런 개수를 줄이는 크기의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 것을 감안하면 20개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4] 헌법재판소에 간통죄가 위헌이냐 아니냐를 심의해 달라는 소청이 올라왔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아래에 서술. 합법갑에서 파생된 별명으로 법을 풀어쓴 단어인 버비오빠가 있다. 더 나아가서 버비오빠를 뒤집어 뚜오뜨또라고 하기도 했을정도였다.[5]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 사랑은 김동주[6] 하지만 이건 좀 이해가 갈 수도 있는 게, 두산 베어스는 프랜차이즈에게까지 냉담하기로 유명한 구단 중 하나다. 그래도 구단 재정 문제로 인해 정수근, 박명환, 이종욱, 김현수, 양의지, 민병헌 등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FA 시장에서 죄다 놓치고 타팀으로 보냈던 두산 구단도 김동주만큼 어떻게든 거액을 제시해서 잡으려고 했었던 걸 보면 김동주가 팀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실제로 김동주는 몇년간 꾸준히 리그 연봉킹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7] 원래 일본 진출을 꾀했으나 계약이 불발되어 향후 해외진출을 다시 원할 경우 풀어주는 조건을 추가해 두산 구단과 연봉 7억+옵션 2억으로 단년 계약했다. 일본 구단측에선 김동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그냥 몸값 부풀리기 라고 봤으나 김동주 본인이 병크를 터트렸다.[8] 원래는 2006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을 예정이었으나, 2006년 3월 대만과의 WBC 예선전에서 어깨 부상을 당한 덕분에 그해 시즌을 거의 날려버려 1군 등록일수를 채우지 못해 FA 자격이 1년 미뤄진 것이다.[9] 지금 보면 선수의 입장에서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저 당시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 희대의 돈지랄을 하던 삼성이 당대 최고 우타 거포이던 심정수에게 지른 미친 금액이 고작 옵션이 잔뜩 포함된 4년 최대 60억이었다. 당시 60억이 넘는 돈은 현재로서는 150억 이상을 받는 것과 같은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당시 김동주급 선수가 지금 시장에 나와도 최소 100억 이상은 거뜬히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10] 1엔당 950원 에 형성되던 2008년 5월을 기준으로 약 38억이다.[11] 2006 시즌 후 주니치에 진출했던 이병규의 경우 공식적인 발표는 없지만 계열사였던 주니치스포츠에서 2년 2억 5,000만엔이라는 이야기를 했기에 이쪽이 정설처럼 내려오고있어서 저걸 기준점으로 잡는다해도 2년 4억엔은 무리한 요구라는것이 정설이었다.[12] 특히 김동주는 97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전 3홈런 시드니 올림픽 쐐기 1타점 적시타등 오랜기간 일본킬러로 활약했었고, 그 영향인지 일본은 그런 선수들에 대해 오히려 과할 정도의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여러가지 루머와 전성기를 지난 나이와 부상 이력 등에 대한 염려로 인하여 겉으로는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라는 의견도 있다. 성진국이라는 별명에서 느껴지듯 한국에서의 일본야구 이미지는 선수의 사생활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느낌을 주나 실제 일본야구는 선수의 사생활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13] 김동주 본인이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버는 수입의 50%는 위자료로 나가야 할 상황이었는데 이게 너무 아까웠다고 한다.물론 이후 전처로부터 양육권을 빼앗겠다고 협박하거나 전처를 정신병자로 모는 언론플레이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결국 소송 과정 중에 지친 전처가 스스로 위자료를 포기하게 만들어 위자료를 아끼긴 했다.[14] 연봉 인상건으로 충돌했는데 김동주가 당시 요구한 연봉은 1억 8000만원이었고 두산이 제시한 연봉은 1억 6500만원이었다. 김동주가 자신의 제시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트레이드들 해달라고 대놓고 요구할 정도[15] 김동주는 당시 두산 진필중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는 와중에 타자 핵심인 김동주 마저 떠난다면 큰 공백이 생길거라 생각했고 저렇게 기사가 새자 결국 무산되었다고 한다.그리고 진필중도 메이저리그 포스팅에서 무응찰이 뜨면서 둘다 팀에 잔류했다.[16] 이 시절 정재공 KIA 단장은 팀에 필요했던 우타 거포 영입을 원하여 김동주와 박재홍을 트레이드로 영입하기로 마음먹었고, 김동주는 실패했지만 결국 내야 유망주였던 정성훈을 현대에 내주고 박재홍을 데려오는데 성공한다[17] 여담이지만 1달만에 복귀선언을 하긴했다.[18] 두산 베어스는 역사적으로 프랜차이즈 선수 조차 냉정하게 가치 평가를 했기 때문에 돈에 인색한 구단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는 대체 가능한 전력이 있는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고, 김동주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 전력이라면 마냥 손놓고 구경하지는 않았다. 물론 양의지박건우 라는 사례도 있었지만 양의지의 경우에는 모기업 두산그룹이 위기에 빠진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라 NC 다이노스와 머니게임이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임을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두산그룹의 상태가 나아지자 2차 FA에서 다시 거액을 줘가면서까지 리턴시킨 케이스다. 박건우의 경우에는 두산 베어스가 FA 방침을 4년 넘게 주지않는다로 설정했기에 6년이상을 요구한 박건우를 잡을수있는 방법은 아예 없었다. 저런 사례를 제외한 덕아웃 리더라는 이유로 데려온 홍성흔 2차 FA영입, 내야진의 핵심 허경민, 뛰어난 외야수비를 가졌으며 포스트시즌마다 활약을 하던 정수빈,30홈런+을 3번이상 기록한 토종 거포 김재환 두산이 돈을 쓴 경우는 팀에서 빠지면 안되는 자리가 대부분이었다.계약의 성공,실패는 묻지말자[19] 다만 이 부분은 김동주가 직접 더그아웃 매거진에서의 인터뷰에서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게다가 김동주는 경기 시합때 배트가 부러진 김현수에게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배트를 주었으며(2008년 포스트시즌) 절친인 조인성 등에게도 배트를 자주 주는 등 배트에 대해 인색한 사람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말하길 내 배트는 무거워서(아무래도 타격 스타일상 무거운 배트였을 수밖에) 잘 안 쓰이는 배트라며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일 배트를 달라고 했으면 잘 줬을 거라고. 김현수야 뭐 원래 무거운 배트 쓰기도 하고.[20] 홍상삼이라는 말이 있는데 유망주라고 하기엔 당시에 보여준게 적지 않았다.[21] 18번은 2016년 김강률, 2017년 조승수로 주인이 바뀌었다가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박종기(현 박소준)가 달았고 2022년부터 김민혁이 달고 있다.[22] 빈말이 아닌것이, 두산 역사상 김동주만큼 꾸준한 성적을 내준 타자가 없었다. 김현수는 08~10년과 15년을 제외하면 OPS 9할을 넘겨보지 못했고, 김재환은 16~18년의 3년간 리그를 폭격했으나 이후에는 그만큼의 성적은 내지못하고 있으며, 2015년부터 타격이 완전히 만개한 양의지는 2018년에 정점을 찍고 NC로 이적해버렸다. 은퇴선수로 범위를 넓혀봐도 타이론 우즈나 심정수와 같은 출중한 타자들은 대부분 팀에서 5년 이상을 활약하지 못하고 팀을 옮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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