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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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삼룡이주하.jpg
김삼룡 이주하 사건 기사. 사진 중 위가 김삼룡 아래가 이주하.

金三龍
1910년 ~ 1950년

1. 개요
2. 생애
3. 가족
4.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에는 경성 트로이카에 참여하고 경성 콤그룹을 조직한 독립운동가였고 광복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남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박헌영과 리승엽이 월북한 뒤 김삼룡이 남로당의 사실상 총책으로 이주하가 그의 고문격[1]으로 남한 지하공작을 지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김삼룡을 체포했을 때 색안경 일곱 개가 나와서 대한민국에서는 '일곱 개의 얼굴'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조직 활동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 하루에 야체이카 한 개씩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김삼룡에 대해서 나도는 정보 대부분이 틀린 정보다. 틀린 정보의 경향을 보면, 김삼룡에 대한 엄밀한 연구는 없이 그냥 막연히 무작정 엄청나게 높은 지위로만 안다.

김삼룡에 대한 틀린 정보와 진실
틀린 정보
진실
경성트로이카에서 김삼룡 이재유 이현상이 최상부 트로이카다?(X)
(틀린 정보의 출처는 안재성 소설 <경성트로이카> 설정)
김삼룡은 진짜 최상부 트로이카인 안병춘의 지도를 받던, 경성트로이카 입장에서 보면 인천 지역 중간 조직책. 전반적으로 경성트로이카에 구애받지 않는 상당히 독자적 운동을 함.(O)
경성콤그룹에서 김삼룡은 박헌영 다음으로 높은 지위?(X)
(틀린 정보의 출처는 박갑동)
이관술이 이재유 체포 뒤 이재유 그룹을 지도하며 경성콤그룹을 태동시킨 첫 지도자이며 박헌영을 지도자로 영입 뒤 박헌영 다음으로 높은 지위였다. 경성콤그룹 사건 피의자신문조서 이름은 아예 <이관술 외 15인 조서>. 피고인명단 첫번째 이름도 이관술. 경성콤그룹 사건 공식 이름은 '이관술 외 41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구체적으로 이관술이 김삼룡보다 훨씬 높은 지위임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몇 있는데, 이관술은 박헌영과의 첫만남 때 같이 간 김삼룡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박헌영과 단 둘이 경성콤그룹에 대해 논의하며, 재판 기록 보면 "김삼룡이 이관술에게 보고하는 것이 맞겠지만" 운운한다.(O)
이관술의 동생 이순금이 김삼룡의 부인?(X)
(틀린 정보의 출처는 박갑동)
김삼룡의 부인 이옥숙은 이순금과 다른 사람이다. 이순금의 가명이 이옥숙이니 어쩌니 소설쓰는 사람이 많은데 이관술 회고록에 이순금과 이옥숙이 다른 사람이라고 나온다. 이옥숙의 노년 사진과 말년 등은 구글링만 해도 나온다. 반면 이순금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O)


2. 생애[편집]


1910년 2월 9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이야기한 에피소드에 의하면 김삼룡은 눈이 오는 날이면 항상 아침 일찍 길거리의 눈을 쓸고, 일본인이 시비를 걸어와도 씩 웃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싸움이 나면 조선인끼리 왜 싸우냐고 차라리 자신을 때리라 했다고 한다. 또 권투가 취미였다고 한다.

26세가 되던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를 중심으로 이관술과 그의 동생인 이순금, 이현상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였다.[2]

김삼룡은 실제 역사에서는 상부 트로이카가 아니었는데 경성트로이카에 대한 가장 잘 팔린 책인 안재성(작가)의 소설 <경성트로이카>에서 김삼룡을 엄청나게 띄워줘서 현재 김삼룡은 거의 이재유 다음가는 경성트로이카 대표가 되었다. 실제로는 이관술이 가장 오랜 기간 이재유와 함께 최상부 지도부로 경성트로이카를 이끌고 이재유 검거 뒤에는 혼자 전국을 누비며 경성트로이카를 이끈다. 김삼룡은 중간 조직책이었다. 김경일 교수의 학술서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1기의 실제 최상부 트로이카: 이재유, 이현상, 안병춘, 변홍대, 최소복. 아마 안재성 책의 영향으로 경성트로이카가 언급되는 곳에는 김삼룡이 이관술보다도 먼저 이재유 바로 다음으로 언급되니, 김삼룡은 안재성에게 절해야 한다. 안재성은 알면서 이렇게 쓴 건데 다른 많은 출판서적 등은 모르고 안재성 소설을 그대로 받아적는다.

소설의 영향에서 벗어나 제대로 공부해보면 김삼룡은 이재유와 만나서 잠깐 영향받은 것 외에는 상당히 독자적인 운동을 한다. 인천적노 활동 시 안병춘에게 지도받았을 뿐, 검거되었다 풀려난 뒤엔 이관술이 경성콤그룹을 만들면서 김삼룡을 부르기 전까진 경성트로이카와 연결되지 않은 독자적 운동을 한다.

꼭 안재성 소설 때문만은 아니라 김삼룡이 1940년대 후반에 남로당 총책이 되니 십여 년 전 1930년대 중반부터 높은 지위였을 것이라고 많은 출판서적들이 상상하는 것 같은데, 김삼룡은 실제 역사에서는 한 번도 이관술보다 높은 지위였던 적이 없다. 대다수 대중서가 경성콤그룹에서 이관술보다 김삼룡이 높은 지위라는 식으로 쓰는데 실제로는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첫 최고지도자로서 김삼룡에게 명령하는 지위였다. 박헌영과 처음 만날 때도 이관술은 같이 있던 김삼룡을 다른 곳으로 보낸 뒤 박헌영과 단 둘이 이야기한다. 이관술이 가장 높은 지위라서 고문도 김삼룡보다 몇 배 심하게 당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이관술이 불쌍하다. 경성콤그룹 사건 피의자신문조서 이름은 아예 <이관술 외 15인 조서>다. 피고인명단 첫번째 이름도 이관술. 경성콤그룹 사건 공식 이름은 '이관술 외 41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그 후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가 1937년 이재유가 체포되자 고향인 충주로 피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그를 임명하자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경성전기, 대창직물, 경성방직, 용산철도공작소, 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는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드러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3]

계속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한다.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박헌영, 2.김일성, 3.이주하, 4.박창빈, 5.리승엽, 6.강진, 7.최용건, 8.홍남표, 9.김삼룡, 10.이현상, 11.이주상, 12.이순금, 13.무정, 14.서중석, 15.이인동, 16.조복례, 17.권오직, 18.박광희, 19.김점권, 20.허성택, 21.김용범, 22.홍덕유, 23.주자복, 24.문갑송, 25.강문석, 26.최창익, 27.김근, 28.오기섭
중앙검열위원
1.이관술, 2.서완석, 3.김형선, 4.최원택

본래 김삼룡보다 서열이 높았던 이관술이 조직부장이라는 직책에 추천되었으나 이관술이 사양하여 김삼룡이 이현상, 김형선과 함께 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 조직국 자리가 권력을 쥘 수 있는 실세 자리라고 한다. 출처는 신주백의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각주.

김삼룡이 조직책임자로서 반대파를 약화시키려고 한 행동들 때문에 영등포 지구당이 난장판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영등포 지구의 참담한 분열도 주저하지 않는 동지 김삼룡"이라고 불렸다.

김삼룡은 패권주의적 행보를 보여 반박헌영파가 엄청나게 싫어했던 인물이다. 증언자들의 김삼룡에 대한 평은 다 나쁘다. 다른 박헌영파도 비판받지만 김삼룡이 가장 심하게 욕먹는 편이다. 그 외 공산당 연석회의 기록을 보면 박헌영파 중에서도 김삼룡이 독보적으로 욕먹는다. 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 1946.2.19 직접 보기 반박헌영파는 박헌영과 이관술에게 김삼룡을 제명시키라고 요구했다.

다만 비판자(반박헌영파) 중 ML파 이정윤은 내내 비꼬면서 말하는데 인품이 의심되며 계속 '정치국에 자리 얻지 못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라고 하는데 이런 말이 오히려 자리 얻고 싶어하는 심리를 드러낸다. 장안파도 그렇고 오히려 비판자 입장인 반박헌영파가 인품이 의심될 때도 많다.

정적이 아닌 사람들의 김삼룡 평은 좋다. 다음은 안재성이 쓴 실화 기반 소설 속 박갑동의 말인데, 소설 형식이지만 박갑동 말은 대체로 녹음 뒤 그대로 쓴 것 같다.

그 사람은 도무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당의 최고지도자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오. 해방직후 남한에 난립한 수십 개 정당 중 최고는 단연 조선공산당이었소. 일제말기까지 투쟁한 것은 거의 공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가 상당히 높았지요. 김삼룡은 조선공산당은 물론 남로당 최고 실권자의 한 사람이었소. 그런데도 거만하거나 권위의식이라곤 느낄 수 없었어요. 참말로 서민적이었지요. 체격은 권투선수처럼 단단한 데다 십 년 가까이 감옥살이 할 때 권투를 많이 해 코가 뭉그러져 뭉툭했지요. 얼굴은 크고 넓적한데다 입술은 두텁고 눈은 자그마했어요. 웃을 때 보면 정말 시골 농부나 부잣집 하인 같았지요. 처음 보는 사람이나 하급당원에게도 시원시원하게 인사를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참 어린 초보당원인 내게도 만날 때마다 먼저 아는 체를 하고 수고한다고 악수를 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요. 참 사람 좋았어요.

안재성의 실화 기반 소설 속 박갑동의 김삼룡 평#


1946년 2월 15일 좌익단체의 통일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였다.

미군정이 좌익탄압을 본격화하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켜 이관술을 체포하고 1946년 9월 박헌영·리강국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였다.[4]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당하여 창당된 남조선로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조직부장을 맡게 되었다.

3당합당을 둘러싸고 공산당 내에서 박헌영·이주하와 김삼룡 사이에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다. 김삼룡은 북한 회의에서 박헌영 비판에 가담해서 북로당계의 신임을 얻었다.### 연합회의에서 "공산당 지도부 내의 섹트주의적이고 편협한 행동으로 인해 합당을 원만히 이끌 수 없었다"고 박헌영을 비판했다. 김삼룡은 진작부터 신탁통치 문제나 전향자 기용 문제에서 박헌영과 의견충돌이 있었다.

남한에 남아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로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1949년 5월,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된 후 49년 7월 전원회의에서 박헌영, 허헌, 리승엽, 리기석과 함께 남로당 출신으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이주하와 함께 지하조직을 결성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5]

김삼룡보다 서열이 더 높았던 이주하를 제치고 김삼룡이 남로당 총책이 된 이유를 이주하는 북로당과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김삼룡은 북로당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주하, 이현상은 김일성을 싫어했는데 김삼룡은 김일성과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김일성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이고 김씨왕조 독재 체제 확립 전이라 꼭 이주하, 이현상이 잘했고 김삼룡이 잘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확실히 고문강자였던 것인지 김삼룡은 남로당 조직정보를 말하지 않았고 이주하는 다 말해버렸다고 한다. 물론 고문이 가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문이 없었다면 이주하가 말했을까 싶긴 하다. 혹은 이주하가 정보를 말한 건 고문 때문이 아니라 위장전항을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주하는 김일성과 너무 사이가 나빴던 나머지 공산주의가 진짜로 싫어졌을 수도 있다.

김삼룡 이주하 사건 재판 최후진술에서 김삼룡은 이주하와, 또 비슷한 시기 체포된 정태식에게 위장전향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 뒤 남침을 준비하면서 평화공세를 벌이던 북한에서 제의한 조만식과의 교환협상이 오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6일, 총살되었다.

북한 애국렬사릉에 남조선혁명가 직함으로 가묘가 조성되었으며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1993년 7월 15일에 공화국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부인 이옥숙도 북한에서 천수를 누렸다.


3. 가족[편집]


아내 이옥숙이 있다. 이옥숙은 이관술 동생 이순금과 다른 사람이다. 동일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많은 사람이 퍼뜨리고 있는데 아래 이관술 수기를 잘 읽어보자. 이 문제에 대해 이관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당대 혁명가의 위장부부 관습을 오해한 것이다.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화홍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상약(相約)을 하고 그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삼룡 동무의 부인인 옥숙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文町) 대창직물공장에 ‘콩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후략)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그 외 각종 회의에 이순금과 이옥숙이 나란히 참석한 기록이 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경성 트로이카

1934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34
정당 해산

[[경성 콤그룹|
경성콤그룹
]]

1939 - 1941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41 - 1945
정당 해산


1945 - 1946
창당

[[남조선로동당|
]]

1946 - 1949
합당[6]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949 - 1950
합당[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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