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콤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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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콤그룹
경성 공산주의자 그룹
경성 콤무니스트 그룹


파일:경성콤그룹피고인명단.jpg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피고인 명단.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순으로 핵심적 지위였음을 알 수 있다.
설립자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지도자
이관술(1939.1~1940.2)
박헌영(1940.2~1941)
이관술, 이현상, 김태준, 이주상 등(1944~1945.8.15)[1]
설립일
1939.1
해산일
1945.8.15[2]
목적
독립운동, 노동운동, 무장투쟁, 혁명
전신
경성 트로이카
후신
조선공산당
1. 개요
2. 경성 트로이카의 후신
3. 사다리식 조직 체계?
4. 좌담식 조직 형태?
5. 기관지 배포
6. 항일무장투쟁 준비
7. 1941년 '이관술 외 41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서대문서 사건)'
8. 홍인의 외 45인 사건
9. 대전에서의 경성콤그룹 재건 노력
10.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
11. 광복 후 조선공산당 재건
12. 오해와 진실
12.1. 김단야가 경성콤그룹에 참여했다?
12.2. 이주하가 경성콤그룹에 참여했다?
12.3. 인민전선부는 무엇을 하는 부서인가?
12.4. 경성트로이카의 후신인가? 화요파의 후신인가?
13. 주요 활동가
14. 관련 자료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말기의 항일 공산주의 비밀 결사. 1939년 1월 이재유 그룹의 활동가인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이 창설했다.

경성콤그룹은 1930년대 서울의 운동을 대표하던 이재유 그룹의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 등이 주축이었다.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 박헌영은 연락두절됐다고 권오직과 김태준이 증언.[2] 1941년 대규모 검거와 박헌영의 연락 두절에도 불구하고 조직원들은 조직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함. 출처: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의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적 탄압 속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투쟁을 벌인 국내 운동의 최후 조직이었다.



정식 명칭은 경성 콤무니스트 그룹으로, 콤무니스트를 줄여서 이라고 불렸다. 프랑스어식으로 읽어서 경성 그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경성 콤그룹은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제국 경찰의 가혹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전향하던 흑역사 시기에 결성되었다.[3] 즉, 일제 말기 건국동맹과 더불어 국내에 남은 얼마 안되는 지하 항일 독립 운동 단체인 것이다.

경성콤그룹은 1941년 대규모 검거를 겪게 될 때까지 국내 항일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선명하게 활동한 조직으로 남게 된다. 1941년 대규모 검거와 박헌영의 연락 두절에도 불구하고 조직원들은 조직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광복 순간까지 항거했다.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투옥된 주요 관련자들 중 일부가 탈출 혹은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에는 콤그룹의 활동이 어느 정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3] 대표적으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이후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이라는 사상 전향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많은 사람들이 전향을 해서 반강제로 가입할 수 밖에 없던 단체.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김태준, 연안행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파벌을 초월하여 이재유 그룹, 권영태와 김희성 그룹 등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계승한 일제 강점기 말기 국내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최후 집결체로 평가받고 있다.


2. 경성 트로이카의 후신[편집]



파일:이재유이관술악수로이별.jpg

1937.4.30 <매일신보> 이재유와 이관술…악수로 이별에 / 문제되는 이관술 행방
1936년 12월 25일 경성트로이카 지도자 이재유가 체포된 뒤 이관술이 전국을 누비며 경성트로이카 조직원을 재결합하여 각종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었지만 번번히 와해되던 중 1939년 비로소 한 조직을 전국적 조직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경성콤그룹이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이순금 남매가 주도해서 1939년 1월 김삼룡과 이옥숙 부부와 접촉하여 만들었다.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옥숙은 태창직물을 시작으로 인근 공장에 노동자 소그룹을 만들어 갔다. 감옥에서 나온 이현상이 결합했다. 화요회 계열로 수배 중이던 권오직도 연결됐다. 1939년 4월경 지도부를 형성했다. 1939년 5월이 되자 박진홍이 출소한 뒤 동참했고 뒤따라 정태식도 합류했다.#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화홍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상약(相約)을 하고 그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삼룡 동무의 부인인 옥숙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文町) 대창직물공장에 ‘콩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후략)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김삼룡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있어 조선공산당 재건을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노동자를 중심에 둔 조직 확장에 무게를 두는 것에 동의했다. 그 결과 실제로 주력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었다. 경성콤그룹은 노동운동을 근간으로 했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출처

이재유 그룹 출신인 이관술김삼룡이 조직 재건에 나서자 이름은 예전과 달랐지만 경성 트로이카에서 시작해 경성지역 조선공산당재건그룹을 거쳐 온 이재유 그룹 출신들부터 모였다. 그런데 경성콤그룹은 이재유그룹 뿐 아니라 프로핀테른과 연결고리를 내세웠던 권영태 그룹, 1차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했던 화요회 계열까지 넓게 결합하게 된다.출처

경성콤그룹 활동 당시는 전시였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소련과 일본의 전투를 예상하고 소련과 협력을 강화해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계획했다.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은 파벌적 오류, 권영태 그룹은 전술적 섹트적 오류가 있다고 분석하고 새로운 실천방향을 고민했다. 경성콤그룹의 노선은 경성트로이카에 비하면 뚜렷한 국제주의였다. 사실 이재유는 이러한 파벌을 초월한 사회주의자의 최후집결체를 결국 만들지 못했지만 이관술은 금방 만들었는데 그 이유를 당시 국제선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운동을 하면 파벌이라고 비판받았는데 이재유는 국내주의를 포기하지 않아 권영태와 김희성 그룹과 계속 갈등했고 이관술은 노선보다는 조직 확장을 중시해 국제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에 갈등이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4] 구성원별로 보면 김태준은 독소불가침조약의 체결,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의 동유럽 및 발트해 연안국 병합 과정에 혼란스러워하며 소련 지지에 회의를 가졌지만 박헌영은 소련을 의심하면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초기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이관술은 새롭게 결성된 조직의 지도자로 나서면서 가장 먼저 노동자 모임 교재와 노동자 조직에 사용할 지침서를 만들었다.『노동자 리플렛』을 집필하고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에 맞춰 ‘메이데이 투쟁지침서’를 낸 뒤 ‘8.1 캄파니아 투쟁방침서’를 제작해 배포했다. 이런 지침서는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공장세포’와 ‘가두세포(조직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조직)’를 묶어내는 도구 역할을 했다. 이관술은 '변장의 달인'으로 유명한데, 변장하며 전국을 누비며 조직원들을 만나고 늘렸다.출처 이 때 조직은 중앙부서를 미리 정해놓는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으로 만들었다. 경성 트로이카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책임자를 미리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하부 조직원을 많이 모은 뒤 책임자를 정한 것이다.[5]

대구지역 책임자는 정채철(1907~?)이었고, 마산지역 책임자는 반제동맹 활동을 했던 권우성(1915~?)이었다. 부산지역에는 조선소 노동자였던 이기호(1913~?)와 옥견직물에 취직한 조복례(1918~?)가 있었다. 금속 부분에서 이주상, 여운철(1917~?) 등을 조직했다. 경인지역의 홍인의, 김재병(?~1942), 최병희(1916~?), 이병희(1916~?) 등이 연결된다. 섬유노조는 제주도 출신 김응빈(1914~?)이 책임자였고 태창직물에서 일했던 이정남(1920~?) 등이 결합했다. 출판노조 쪽은 조선인쇄주식회사 각 신문사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했던 이인동(1909~?)이 맡았다.출처

기관지 출판은 이순근, 권오직이 맡았다. 학생부분은 정태식이 맡았고 여권현, 이종갑 등이 기관지와 유인물 배포를 맡았다. 학생부분에는 김하경, 이현우, 김순원(안창호의 조카)이 활동했다. 일본유학생부에는 김덕연, 인민전선부[6]는 이현상, 정태식, 김태준이 활동했다.[7]

1939년 5월에 이관술은 강경자라는 이명으로 알려져 있던 여성운동가 강귀남, 김수남이라 불리던 김섬을 함흥에 파견해 함경남도의 거점을 마련한다. 함흥에 도착한 강경자와 김섬은 함남지역 책임자인 장순명과 함께 활동한다.[8]


파일:일제강점기엽서청진항.jpg

일제강점기 엽서에 담긴 청진항 모습. 경성콤그룹 이관술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다.


파일:장순명강귀남김형관.jpg

장순명 | 강귀남 | 김형관

이렇게 조심스럽지만 광범위한 조직 확대 과정은 박헌영까지 닿게 된다. 박헌영은 1939년 9월 출소해 있었다. 경성콤그룹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과 일면식도 없었는데 김삼룡과 이현상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현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에게 ‘역사도 오래되고 운동 코스도 올바른 공산주의자가 지하에 잠복’하고 있다며 박헌영에 대한 접촉을 제안한다.출처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간 경위는 일제의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나온다.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이현상을 보내 출옥한 박헌영이 변절하지 않았는지, 항일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있는지 수차례에 걸쳐 시험했다고 한다.

박헌영 동무와 만난 것은 1939년 12월 12일인데 (중략) 영등포 초입 ‘까-드’ 위에서 암호표식에 의하여 박헌영 동무를 만났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4] 이관술도 삼엄한 감시망이 깔린 국내에서만 활동하며 고생했고 회고록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고 유언으로 "조선 민족 만세"를 남기려 한 만큼 신념이 국제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조직 확장을 더 중시한 것이다.[5] 이에 대한 설명은 아래 목차의 사다리식 조직체계와 첨부한 독립기념관 최규진 논문 참고.[6] 표현인물에 대해 조사하는 부서.[7] 출처: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8] 출처: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이관술 회고록에 따르면 1939년 12월 12일에 이관술은 박헌영을 직접 만나보고 영입을 결정한다. 두 사람은 이 때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9]

박헌영은 이관술이 지도하는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과 연계를 맺었다. 이 시기 헌병경찰 체제는 한층 강화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은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관술이 지도했던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의 말에 의하면 “공산주의 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던 유일한 그룹이었다.”
박헌영은 이 그룹에 가담하여 이 그룹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그룹은 서울, 인천, 청진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주로 자신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헌영은 이 그룹에 의해 발간되는 잡지≪코뮤니스트≫를 지도하였고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박헌영은 비합법적인 상황으로 전환하였다.
1941년 1월 이 조직에 대한 검거가 실시되었다.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체포되었다. 박헌영은 남조선의 대구로 도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추적 때문에 그는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수시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 그는 대부분 광주에서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박헌영의 도피에도 불구하고 경성콤그룹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45년까지 이 그룹은 4차례나 검거를 당해야 했다.

소련군정 문서#
[9] 신주백은 1991년 역사비평에 발표한 <박헌영과 경성콩그룹>이란 논문에서 김단야가 초기 경성꼼그룹 결성에 관여했다고 언급했다. 이관술의 경찰 진술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후 러시아에서 자료가 들어오고 김단야의 죽음이 알려지며 잘못된 언급임이 확인되었다. 신주백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선인, 2015)에서 오류를 공식 정정한 논문을 재수록했다(56쪽 각주93, 122쪽 각주 4).


1939년 내가 대전에서 나왔을 때 '경성콤그룹'이 있음을 알고 그 속에 들어가 일했다.

출옥 후 이관술이 지도하는 서울의 지하 공산당조직과 관계를 맺었다. (중략) 공산주의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사업을 지속한 유일한 단체는 바로 이관술과 김삼룡이 지도하는 그룹이었다.

박헌영#


이재유가 국제선 사람들과 불화를 빚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33년에 재상해 '콤무니스트' 그룹의 국내 전권위원인 김형선과 미묘한 알력 관계를 보였다. 1934년에는 프로핀테른에서 파견된 권영태와 불화를 빚었다. 1935년에는 김승훈(金承塤), 1936년에는 김희성(金熙星) 등과 같은 국제선 사회주의자들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 (중략) 박헌영은 출옥 후 경성콤그룹에 기꺼이 가담했다. 이재유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이 지도부에 포진해 있는 단체인데도 말이다. 이재유 그룹은 비록 국제선은 아니지만 비타협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온 공로가 있으며,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에 그러했다는 게 박헌영의 생각이었다.

박헌영은 국제선의 전통 위에서 경성콤그룹을 지도하고자 노력했다. 기관지 명칭을 변경한 것은 그 좋은 보기이다. 경성콤그룹의 초창기 지도자 이관술은 일찍부터 등사판 기관지 발간을 준비한 결과, 1939년 9월에 '공산주의자'라는 제하의 기관지 창간호를 간행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머지않아 이 명칭은 변경되었다. 박헌영이 이 단체에 합류한 이후에 '콤무니스트'라고 개칭되었던 것이다. 1940년 5월호부터는 새 이름이 적용되었다. 기관지의 제호를 바꾼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1931-1932년에 간행한 잡지 '콤무니스트'의 정치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데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절된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재개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박헌영 영입 후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

박헌영은 1940년 2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기관지 집필을 맡는다. 조직부는 김삼룡과 장규경(1901~?)이 맡았다. 기관지 출판은 이관술이 책임자고 김순룡(1916~?)이 부원이었다. 김순룡은 김삼룡의 6촌 동생으로 이관술의 모교 중동고보의 교사였다. 인민전선부는 김태준을 담당자로 삼았고 정태식(1910~?), 이현상이 참여했다. 노동부는 김삼룡, 가두부는 이남래(1913~?), 김한성, 이종갑(1916~?)이, 학생부는 조재옥(1914~?), 김순원(1917~1941), 김원로가 맡았다.출처[10]

또다른 주요 책임자는 일본유학생부는 김덕연, 고우도. 금속노조는 김재병, 김동철. 섬유노조는 김응빈, 이위상. 전기노조는 조중심. 출판노조는 이복기, 이인동. 함경남도는 김진. 함경북도는 장순명. 마산은 권우성, 대구는 정재철, 부산은 이기호 등이었다.[11]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은 이재유 그룹 출신이고 박헌영, 권오직 등은 화요계, 서중석 등은 상해파였다. 경성콤그룹은 계파를 불문하고 모든 운동가를 결합한 조직이었다.

박헌영을 영입한 이관술은 박헌영을 일단 청주의 비밀아지트로 보냈다. 이순금과 정태식이 이 일을 맡았다. 이관술은 다시 인천에 아지트를 마련해 박헌영을 보낸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의 동료교사인 신명균과 교류하며 조선어학회와의 연대도 모색했다.

3. 사다리식 조직 체계?[편집]


이관술이 피의자신문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는 평소 친분관계가 있는 인간적 동지를 획득했으며, 한 사람이 체포되면 모든 조직이 무너졌다. 적당한 인물을 찾아내면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제3자가 내사한다.

경성서대문경찰서, <이관술 외 15명 신문조서>, 1941#
[10] 전체적인 조직체계는 신주백, <최후의 재건운동 조직, 경성꼼그룹>,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15, 156쪽 참조.[11] 출처: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중앙부 예하에 각종 책임부서를 정해서 각부에 책임자를 두지 말아야 한다. 현재와 같은 과도기에 그런 조직체를 결성할 필요가 없다. 예전의 운동방법을 고쳐서 이른바 사다리식이라고 부르는 조직구성을 해야 한다. 사다리식이란 양쪽의 봉을 비합법선으로 구성하고 합법과 횡적 중간을 띄어놓아 비합법자는 횡선을 맡고 합법자 1인 또는 몇 사람을 획득하여 지도 교양한다. 합법선이 검거되어도 비합법선이 살아있고, 하나의 비합법선이 검거되어도 다른 비합법선이 살아있게 하는 조직체계이다.

경성서대문경찰서, <이관술 외 15명 신문조서>, 1941#


일제 경찰에 따르면 이는 '신전술'이었다. 최규진에 따르면 사다리식 조직체계는 이재유 그룹의 경성트로이카 방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출처: 최규진

반면 임경석은 이관술 성균관대 학술회의 <이관술과 그의 시대>에서 이관술은 워낙 진술투쟁(조직 정보 보호)를 잘 하기 때문에 사다리식 조직체계 부분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4. 좌담식 조직 형태?[편집]


김경일 교수는 이관술의 법정 진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만약 이관술이 총책임자이고 김삼룡이 선전 책임이라면 김삼룡은 일일이 이관술에게 운동 상황을 의무적으로 보고하고 이관술이 그에 비판을 가해서 검토한 후 결정을 내리면 김삼룡은 그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것이 맞겠지만, 실제로는 이관술이 김삼룡의 일에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삼룡도 의무로서 일일이 이관술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고 단지 같이 하고 있을 뿐이었으며 그것도 전부 보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헌영의 경우에도 이관술이 박헌영에게 함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것도 의무라기보다는 말하자면 좌담식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김경일이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에서 요약한 이관술의 법정 진술


이것이 조직의 정보를 보호하려는 거짓 진술인지 아니면 진실인지에 대해, 이재유 연구자인 김경일은 이것이 이재유의 방식의 편린이며, 경성콤그룹은 실제로 보고 의무가 없었고 서로의 영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좌담식 조직 형태를 유지하였다고 본다.[12]

그런데 저렇게 주장하면 고문당할 때 다른 책임자가 맡은 일은 진짜 모른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조직의 정보를 보호하려는 거짓 진술일수도 있다. 실제로 예심 기간에도 끊임없이 고문이 가해졌다.

이관술은 예심공판에서는 '이재유가 체포된 것이 서울을 떠나지 않아서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기 싫어서' 함북으로 갔다고 했는데, 해방 이후 회고록에서 '함북서 사람이 와서' 함북으로 갔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관술의 진술은 명백하게 거짓 진술로 밝혀진 부분도 많다. 이관술은 노덕술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지켜내 동지들에게 "눈부신 존재"가 되었다고 하니, 어디까지가 정보를 보호하려는 거짓 진술이고 어디가 거짓 진술 속 진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관술은 또한 같은 법정에서 경성콤그룹이라는 비밀결사는 없다고 진술했으며, 다른 피고인은 모두 경성콤그룹이라는 비밀결사가 있다고 진술했다는 예심판사의 말에 "의식정도가 낮고 또 동지를 획득하는 데 무엇이나 비밀 비밀 하면서 어느 정도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고 본다"고 답변했다.[13] 진실이라면 조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이재유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재유의 방식의 편린이다. 경성트로이카 문서 참고. 거짓이라면 정보를 보호하려는 진술투쟁이다.

5. 기관지 배포[편집]


이관술은 1939년 9월에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월간으로 창간해서 20부를 발간했다. 기관지는 1940년 3월호까지 이관술이 편집했다. 이관술이 쓴 기사로는「경성형무소의 반항사건을 보라」(1939. 11), 「남해제사의 동요사건」, 「염전인부 40명의 단결」, 「조선제강 양성직공의 단결」(1939. 12), 「예방구금령에 대하여」(1940. 1) 등이 있다.

1940년 4월호부터 박헌영이 주관했다. 박헌영은 기관지 이름을 『꼼뮤니스트』로 바꾸었다.

기관지는 전국에 배포되어 읽힌다. 이관술이 직접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아래의 월간 출판물이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를 말한다.

오빠는 이 월간 출판물의 책임자로서 이 비밀 출판물을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이 당시 오빠는 기술문제와 여비문제로 고물장수로 가장하여 고물 속에 출판물을 넣어가지고 자전거로 각지에 배부한 일이 많았었다. 한번 지방을 다녀오면 의복은 말 못할 만큼 누추하고 심히 궁하였다. 참말로 오빠는 열과 성의 화신이라고 나는 항상 감동하였다.

이순금
[12]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3]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제8부 주석 36



6. 항일무장투쟁 준비[편집]


주요 활동가들이 이재유 그룹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동맹휴학과 파업으로 일제에 맞서 왔으나 경성콤그룹 활동 시기는 전시체제라 도저히 동맹휴학과 파업이 불가능하여 대신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게릴라전에 대비해 전기배선도를 확보해 놓기도 했다.

이관술은 국내에서 산중 토굴을 파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항일무장투쟁 준비 중 '서대문사건'이라는 대규모 검거사태로 조직이 와해된다.

1939년 5월에 청진에 도착하여 장순명 김형관 등 동지들과 함께 광산 조직에 착수하고 일방 흥남공장의 조직화에 손을 대이면서 나는 산중 토굴을 파고 <붉은 길>이란 출판물을 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곳 산중에 숨어있는 동무들과 더불어 무장 ‘빨치산’대(隊) 조직준비를 계획하였으나 그 일은 여러 가지 관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예의 서대문서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의 수습을 위하여 김태준 동무의 집에 갔다가 숨어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7. 1941년 '이관술 외 41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서대문서 사건)'[편집]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규모 검거는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했다고 해서 ‘서대문서 사건’으로 불린다. 1940년 11월에 일본유학생부 책임자였던 김덕연(1915~1943)이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검거망이 조여 왔다. 이현상과 김삼룡이 12월에 체포됐다. 권오직, 서중석(1904~?) 등 핵심 간부가 잇따라 체포된다. 이관술은 핵심지도부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검거된 지도부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부를 모색하던 활동을 하던 중 김태준과 함께 1941년 1월 7일에 체포된다.출처

대구 책임자 정재철, 제주 책임자 김응빈, 마산 책임자 권우성도 1941년에 검거됐다. 함남 책임자 김섬은 산으로 들어갔고, 기관지 출판원 김순룡은 1941년 말에 검거됐다. 그리고 적색노동조합 경성지역 최병희, 이주상(1915~?), 부산 조복례, 청진 김형관 등과, 적색농민조합 창원의 이안호(1911~?)도 체포됐다.출처

1942년까지 계속된 검거로 체포된 숫자는 150명을 넘어섰다. 체포당한 조직원들은 모두 살인적인 고문 수사를 겪었다. 경성콤그룹 조직원 중 김순원, 김재병, 김덕연 등이 고문치사했다. 경성콤그룹 조직원을 고문한 대표적인 고문기술자노덕술이 있다. 물론 경성콤그룹 조직원을 고문한 것은 노덕술만이 아니고 수많은 고문 경찰이 투입되었다.


파일:노덕술김덕연.jpg

악랄한 고문 수사를 벌인 노덕술(왼쪽)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경성콤그룹 조직원 김덕연(오른쪽)


파일:일제고문도구.jpg

일제가 사용한 고문 도구들출처

노덕술은 일제 고문 기술의 70%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못상자 고문 등을 사용했다.# 노덕술은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여서 다른 조직원들이 모르는 정보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관술에게 그가 갖고 있는 고문기술을 총동원했다.

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 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 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이관술은)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이관술은 ‘서대문서 사건’의 주역이었다. 서대문경찰서장 명의로 작성된 ‘검찰 송치서’에 따르면, 이관술은 관련 범죄자 42명 가운데 첫자리에 놓인 수괴였다. 범죄의 비중에 따라 나열된 피의자 명단의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1. 이관술 2. 김삼룡 3. 이현상 등의 순서로 작성됐다.

경찰 취조도 이관술에게 집중됐다. 취조 결과를 담은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작성된 것만도 도합 27회에 이른다. 다른 피의자들보다 두세 배 더 많았다. 이 신문조서는 체포된 뒤 이관술이 1941년 1월7일부터 7월20일까지 6개월 남짓 기간에 경찰에게 어떻게 취조받았는지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자료가 된다.

7년이나 추적한 거물 수배자를 체포한 경찰에도 이관술 취조는 여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어야 지하운동의 비밀을 파악할 터였다. 고문을 해서라도 비밀을 캐내야 했다. 따라서 취조 현장은 경찰의 추궁과 체포된 혁명가의 진술 전략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현장이었다.

그 취조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조서 분량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제4~27회의 조서 분량은 70~120쪽에 걸쳐 있다. 평균 100쪽 안팎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1회는 186쪽, 제2회는 164쪽, 제3회분은 194쪽에 이른다. 초기 3회에 걸쳐 가장 강도 높은 취조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이관술은 내심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첫째,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안은 철저히 은폐한다는 전략이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지의 소재에 관한 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조직 내 비밀에는 그렇게 대응했다.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뒷날 이관술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그의 투쟁사를 빛나게 하는 영웅적 행위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을 허용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이관술의 모습은 처참했다.

단지 버티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연성 있는 허위 진술을 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를 마치 있는 양 허위로 진술하는 방안을 택했다. 바로 김단야[14]였다. 일본 경찰은 이 허위 진술을 날름 수용했다. 그리하여 사건 최종 보고서에 김단야가 마치 이관술의 상급자인 양 묘사했다. 경찰만이 아니었다. 경성콤그룹에 관한 초창기 연구[15] 성과도 이 허위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인식은 일본 고등경찰이 품은 그림일 뿐이지 실제 사실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이관술의 진술 투쟁이 승리를 거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4] 김단야는 경성콤그룹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죽었다.[15] 신주백의 논문 <박헌영과 경성콩그룹>을 말함


이관술의 조서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동지', '기관지 배포선(조직 연락망)은 모른다', '신뢰하지 못해서 동지로 만들지 않았다' 등 정보를 숨기려는 내용이다. 경찰이 조직의 수모자가 동지 이름도 모르고 기관지 배포선도 모른다는 말을 순순히 믿지는 않았지만 이관술이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치서 등을 보면 결국 이관술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핵심 지도부 중 이순금과 박헌영은 검거를 피했다.

권오직은 혁명가라 고문에 익숙해서 고문의 종류와 고문을 덜 고통스럽게 받는 요령을 같은 감방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다고 한다. 일제 경찰은 고문을 견디는 사람들에게는 고문강자라는 별명을 붙여 줬는데 고문강자들 중 최고의 영예는 가장 잔혹하게 고문당했으면서 끝까지 버틴 이관술이 안았다고 한다.


8. 홍인의 외 45인 사건[편집]


3차 경성콤그룹 검거 사건.

이 사건으로 조직 수괴인 이관술은 이번엔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1942년 2월 10일부터 5월 13일까지 고문을 당했다. 피의자신문조서 7회가 더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관술 피의자신문조서는 서대문서 27회 + 종로서 7회. 이관술은 거기다 예심에서도 피고인신문조서가 15회 만들어졌다.

9. 대전에서의 경성콤그룹 재건 노력[편집]


주요 지도자인 이관술이현상은 고문 후유증 및 단식으로 병보석을 받았다. 이관술은 조직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였기에 3년의 투옥 기간 내내 다른 조직원이 검거될 때마다 끌려나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3년동안 이런 짓을 당해서 만신창이가 되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피를 대량으로 토하는 지경이 되자 병보석을 받았다고 한다. 이현상도 고문 후유증과 단식으로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고 한다. 이 둘은 신기하게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탈주에 성공한다. 이관술은 솥땜장이 등으로 변장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이현상은 덕유산으로 올라가 경상도 쪽에서 도피 활동을 했다.

광복 후 이현상은 빨치산 증언에 딱히 고문 후유증으로 괴로워했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니 몸이 거의 완치된 것 같은데 이관술은 대전형무소 증언을 보면 결국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며 지내다 학살당했다고 한다.

탈출에 성공한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은 박헌영을 찾으려 했지만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박헌영에게 호의적인 연구자들은 박헌영이 이순금을 시켜 전남 조직원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강조하는 반면 박헌영에게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이 시기 박헌영이 조직 재건 운동과 같은 확실한 항일운동을 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한다.

'박헌영이 지방 동지들과 연계를 구축했고 당 재건 준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고 일부에서 쓰고는 있지만, 이 시기에 뚜렷한 활동을 했다는 자료는 어디에서도 안 나온다. 몇몇 동지들하고 연락하는 정도의 활동이었다.



무엇보다 경성콤그룹 간부인 김태준, 권오직이 박헌영과 연락이 안 되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김태준, 연안행


탈출한 조직원들은 박헌영과 연락이 안 되어서 박헌영이 해외로 탈출하지 않았나 추측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박헌영 동지가 해외로부터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권오직(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


위 권오직의 발언은 각 지방에서 활동하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이 모인 광복 후에도 박헌영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이관술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전을 중심으로 엿장수나 고물장수로 변장해 가며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대전을 중심으로 솥때움질을 하면서 전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전운동을 지도하다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경찰이 대전의 이층집을 습격하자 활동가들이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이념서적이 한가득 발견된 사건이 있었는데 안재성은 이것이 경성콤그룹 조직원의 거처라고 추측한다. 대규모 검거 이후에도 경성콤그룹 세력의 조직원 숫자가 상당했음을 의미한다.[16]

대전에서 활동한 이들 조직원들은 광복의 순간까지 조직 재건을 계속했다.[17] 이관술이 구두닦이로 위장해 대전 경찰서 앞을 돌아다녔고, 대전 경찰서 앞에서 신기료장수로 변장해 경찰의 동태를 살피다가 해방을 맞이했다는 증언이 있다.[18]

10.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편집]


박헌영이 당시 상황을 설명한 글을 보면 “(경성콤그룹이) 1941년부터 시작된 4~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검거 결과 조직은 와해되었지만,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계열의 3개 조직과 ‘TOC’(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의 3개 조직이 전쟁 기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계열은 이관술, 이현상, 이주상 등의 대전 활동가들 외에 서울의 김태준, 박진홍, 서중석 등의 공산주의자협의회와 함경도의 리승엽, 정재달 등의 자유와 독립 그룹이 있었다.[19]

조선건국동맹, 공산주의자협의회, 자유와독립그룹, 대전의 경성콤그룹 재건 세력 등은 연락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1944년 말부터 무장봉기계획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소련과 연안으로 조직원을 파견하였다. 조선건국동맹과 공산주의자협의회는 만주에서 조선독립군을 편성하였다.[20]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군사문제기구를 조직 내에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소련으로 조직원 김일수를 파견하였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1944년 겨울 조선의용군의 국내 진입을 상의하기 위해 김태준과 박진홍을 옌안으로 파견하기도 했다.[21]

이처럼 이들은 다 연락하고 지냈는데 박헌영과만 연락이 안 됐다 하니 진짜로 박헌영은 1941년 이후에는 조직 재건 노력은 안 하고 숨어만 있었다.

공산주의자협의회는 박헌영과 연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현상과는 연락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16]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17]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18] 출처: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19] 출처: 안재성, 박헌영 평전, 2020/ 정병준,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20] 출처: 정병준,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아래 관련 자료에 있음)[21] 출처: 정병준,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11. 광복 후 조선공산당 재건[편집]


공산주의자들은 경성콤그룹 잔존세력 이외에도 스탈린단, 자유와 독립 그룹, 임충석 그룹, 윤일 그룹, 조동호 그룹, 화요파 공산주의 그룹, 공산주의자 협의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소규모 조직으로 움직였다.

해방을 맞이하자 경성 콤그룹의 주요 임원들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12. 오해와 진실[편집]



12.1. 김단야가 경성콤그룹에 참여했다?[편집]


A. 우선 김단야 사망연도를 보자. 경성콤그룹 활동 시기 김단야는 이미 죽었다. 위에 인용했듯 김단야 참여설은 이관술이 고문 취조 당할 때 일제를 속이려고 허위 정보를 흘린 것이다.



12.2. 이주하가 경성콤그룹에 참여했다?[편집]


A. 이주하가 경성콤그룹과 어느 정도로 연결되었는지에 대해 신주백은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각주(본문은 초창기 연구이고 각주에 초창기 연구 중 틀린 것으로 밝혀진 부분을 적어놨다)에서 이관술이 일경을 혼란시키려고 이미 죽은 김단야를 상급자라고 허위 진술한 것처럼 이주하와 경성콤그룹의 관계도 일경을 혼란시키려는 허위 진술일 수 있다고 본다. 김태준의 <연안행>에서도 이관술 등의 경성콤그룹과 이주하 그룹을 다른 그룹으로 언급한다. 해방 후 반박헌영파는 이주하가 경성콤그룹이라고 봤지만 이는 조직원이 아닌 외부인 말이라 별로 중요한 증거는 못 된다. 경성콤그룹이 조직 운영을 얼마나 비밀스럽게 했는지 자기가 가입한 조직이 경성콤그룹이라는 것을 해방 뒤에야 알게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경성콤그룹은 이렇게 비밀스러운 조직이라 외부인이 경성콤그룹에 대해 하는 말은 그리 결정적 증거가 못 된다. 신주백의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중 각주를, 비밀스러운 운영 부분은 최규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볼 것.



12.3. 인민전선부는 무엇을 하는 부서인가?[편집]


A. 이현상, 김태준 등 유명인이 인민전선부 소속이라 인민전선부가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 궁금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표현인물에 대해 조사하는 부서(최규진 논문 표현)
반일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모색(임경석 에세이 표현)#


12.4. 경성트로이카의 후신인가? 화요파의 후신인가?[편집]


A. 우선 경성콤그룹은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이재유 그룹 활동시기에 동시에 존재했던 '국제선'은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은 김단야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의 후신으로 상해에서 <코뮤니스트> 잡지 발간하던 사람들로, 박헌영이 대표적이다. 이 국제선을 화요파로 볼지, 화요파를 넘어선 코민테른의 지도로 볼지도 의견이 갈린다. 1920년대 서울파의 대표적 연구자인 전명혁 교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2]의 조선공산당 문서에 경성콤그룹을 화요파처럼 썼는데 경성콤그룹이 화요파라면 그 근거는 국제선이기에 당연히 국제선을 화요파라고 본다는 입장이 된다. 전명혁의 영향을 받은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이 계보도를 전자로 그렸다. 최규진, 임경석은 후자로 본다. 전자가 기존 학설, 후자가 최신 연구이다.

최규진은 우동수의 착안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구 코민테른문서보관소 소장자료를 섭렵한 바탕 위에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1929-1930년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와 1931-1933년의 콤무니스트 관련자들을 한데 묶어 ‘콤무니스트 그룹’이라고 명명했다. 이 그룹은 지난날의 ‘화요파’ 운동을 계승한 게 아니라 그와 단절했다고 한다. 화요파 전통을 묵수하는 재만주 불살 그룹을 배척한 것은 그 보기이다. 최규진에 따르면, 잡지 콤무니스트의 발행 주체는 과거의 분파적 전통과 절연하고 코민테른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 한 국제노선의 지지자들이다. (최규진, 「‘꼼뮤니스트 그룹’과 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의 노동운동 방침」, 역사연구5, 역사학연구소, 1997; 최규진, 「‘꼼뮤니스트 그룹’의 당재건운동」,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성대경 엮음, 역사비평사, 2000.)

임경석#
[22] 참고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문서도 없으면서 조선공산당 문서에서도 1930년대 중후반 이후 내용이 매우 빈약하여 저자의 1920년대 운동에 대한 사랑이 강력히 느껴진다. 후술하는 1930년대 신진 활동가에 대한 감정이입은 없이 썼을 것이다.


한편 경성콤그룹 조직원은 1920년대 화요파가 아니라 1930년대의 이재유 그룹과 권영태 그룹 사람들이다. 그 중 지도부에 포진한 것은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 등 이재유 그룹이다. 이들은 신진 공산주의자로서 1920년대 파벌에 구애받지 않던 사람들이다. 이재유는 굳이 나누자면 화요파가 아니라 ML파였다. 이 신진 공산주의자들은 화요파가 아닐 뿐만 아니라 원래 국제선도 아니었는데 노선 변경한 것이다.

즉 인적 구성을 보면 이재유 그룹에서 이어지는 게 되고, 노선을 보면 국제선에서 이어지는 게 되는데, 이 국제선을 화요파로 볼지가 또 의견이 갈리는데 이를 화요파로 본 후 인적 구성을 무시하고 노선만을 고려해야 화요파에서 이어지는 게 되는 것이다. 국제선이 화요파인지 부분에서 한 번 걸리고 인적 구성이 이재유 그룹이라는 부분에서 한 번 걸려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조선공산당 평전》에서처럼 확실히 화요파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그리기는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럼 경성트로이카의 후신인가? 인적 구성을 보면 무언가의 후신이라고 보려면 경성트로이카 후신이라고 보는 게 가장 맞다. 그리고 각 구성원의 인생 스토리에 감정이입하면 이재유 그룹에서 울고 웃고 산전수전을 겪다가 경성콤그룹을 만든 게 보여 이게 더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후 역사에서는 경성콤그룹이 대표적 파벌 취급받지만, 본래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과 권영태 그룹이라는 1930년대 양대 파벌을 통합한 사회주의자의 최후집결체로서 탄생한 그룹이었다. 파벌 통합 측면에서 경성콤그룹은 이전까지의 공산주의 비밀결사보다 진보한 그룹이었다. 즉 해방 후 경성콤그룹 출신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로서의 경성콤그룹은 파벌을 초월한 사회주의자의 최후집결체라고 평하는 것이 전시체제 국내라는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독립운동한 이들을 가장 존중하는 평일 것이다.


13. 주요 활동가[편집]


  • 이관술 - 창건자. 1939년 1월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 1945년 8월 15일 광복 순간까지 조직을 재건하며 경성콤그룹 활동을 했다. 이관술이 경성콤그룹의 핵심이었다.
  • 이순금 - 창건자. 이순금이 오빠 이관술과 새 조직 만들기를 주도하지 않았으면 경성콤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이순금이 만든 조직에 나중에 박헌영이 들어온 것인데 정반대로 박헌영이 만든 조직에 이순금이 들어왔다는 잘못된 정보가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동거는 당대 혁명가들의 하우스키퍼 관습으로 일제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부부로 위장하는 것일 뿐이며 진짜 연애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순금은 이재유를 좋아했다는 사료는 있는데 박헌영을 좋아했다는 사료는 없다. 참고로 이순금이 김삼룡 부인 이옥숙과 동일인이라는 것도 틀린 정보로 무려 이순금 오빠 이관술 수기에서 이미 이를 부정하는 서술이 나온다. 이순금 오빠 이관술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각종 회의에 이순금과 이옥숙이 동시에 참석한 기록이 있다
  • 김삼룡 - 창건자. 해방일까지 투옥.
  • 이옥숙 - 이순금과 동일인이라는 틀린 정보가 도는데 문서 위의 이관술 수기를 잘 읽어보자.
  • 이현상 - 일찍 들어와 광복 순간까지 재건활동을 했다.
  • 권오직 - 권오설 동생.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월북했는데 북한에서도 숙청당한 사람.
  • 박진홍 -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 중 최장기간 투옥되었던 인물이다(10년). 서훈은 못 받았지만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그녀의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고 있다.
  • 박헌영 - 1939년 12월 12일에 이관술과 처음 만나서 1940년 2월에 활동을 시작했다. 서대문 사건 이후 소련이나 전남 지역 소수 활동가와는 연락했지만 사실상 경성콤그룹 활동은 그만뒀다. 경성콤그룹이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하며 무장봉기 준비할 때 박헌영과만 연락이 안 되었다.
  • 김태준 - 국문학자. 박진홍 남편.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하여 판 돈은 경성콤그룹에 썼다고 한다.
  • 김응빈
  • 이재유 - 감옥에 있어서 경성콤그룹 활동한 적 없다. 이재유 그룹, 권영태 그룹은 그냥 그룹 이름이다. 이걸 몰라서 이재유 그룹이라는 말을 듣고 이재유가 경성콤그룹에 참여한 줄 아는 사람이 많다.

14. 관련 자료[편집]


  • 김태준, 연안행, 1947
  •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2001
이관술이 광복의 순간 신기료장수로 변장해서 경찰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다는 증언의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연구반, 일제 하 사회주의 운동사, 1991
  •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재판기록을 통해서 본 경성콩그룹의 조직과 활동, 1991
  • 김경일, 경성콩그룹과 지방 조직, 한국사회사학회 42, 1994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김경일, 한국근대노동사와 노동운동
  • 이애숙,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2004
  • 이정 박헌영 전집, 2004
새 재판기록 사료에서 이관술의 활약이 발견되어 임경석이 이때부터 이관술을 경성콤그룹의 초창기 지도자, 당시 지도자라고 호명한다.
  • 신주백, 1930년대 국내 민족 운동사, 2005
신주백의 1991년 논문이 본문에 있고, 각주에 틀린 것으로 밝혀진 부분에 대한 수정과 새로 밝혀진 사실이 달려있다. 이관술이 일경을 속인 이야기가 여기 처음 실렸다.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2007
《이재유 연구》의 개정판으로, 이관술이 활약한 사실이 담긴 새 재판기록 사료를 반영. 새로 밝혀진 이관술의 활약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책이 아닐까 싶다. 임경석은 이관술을 지도자로 호명하고 신주백은 각주를 달았고 김경일은 본문을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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