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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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김준철
金遵哲 | Kim Jun-Cheol

이름
김준철
출생
1924년 10월 27일
경상남도 부산부 (現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사망
2006년 8월 2일 (향년 82세)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4cm / 체중 74kg / A형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경성축구단 (1946~1950)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1953~1960)
국가대표
47경기 53골 (대한민국 / 1948~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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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동래중학교 (졸업)
번호
국가대표팀 - 9번
경성축구단 - 7번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 9번
종교
개신교
가족
아버지 김심식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포로 생활
2.3. 선수 경력
2.4. 말년
3. 플레이 스타일
4. 잊힌 영웅
5. 수상 기록
6. 언사
7.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선수경성축구단과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서 9번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선수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시절[편집]


경성축구단 소속이었던 김심식[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공차기를 좋아하여 집 근처 해운대구 해수욕장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고 한다.

본래 17살 쯤 상경해 경성축구단에 입단하고 경성에서 유학할 계획이었으나 1938년 아버지 김심식이 경기 중 무릎이 나가는 부상을 입고 선수에서 은퇴해 병석에 눕자 가세가 기울어 이는 취소되었다고 한다.[A]

그럼에도 아버지를 이어 경성축구단에 입단해 축구선수가 되고자 자투리 시간에 계속 돈을 벌며 경성 유학을 준비했지만, 1942년 일본이 구기종목을 금지하며 경성축구단이 사실상 해산되자 축구의 길을 포기했었다.

이후 중학교[2]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포목점을 운영하던 중 1944년 일본에 의해 징병되어 버마 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2.2. 포로 생활[편집]


임팔 전투에 투입된 김준철은 다른 일본군들과 달리 운좋게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는 이 포로 생활 중 영국군으로 버마에 와있던 웨스트햄의 필 레이트, 미들즈브러의 해리 필립스, 아스날의 존 켈트[3]를 만나 그들에게 축구를 배우며 그들과 비슷한 수준까지 성장하였다.[4][A]

이런 포로 생활은 2년 동안 지속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풀려나 귀국했다.

2.3. 선수 경력[편집]



2.3.1. 경성축구단[편집]


1945년 전쟁이 끝나 귀국한 후 경성축구단이 재창설되자 축구선수를 다시 꿈꾸며 합류하여 1946년 마지막 경평전에 출전해 1골을 넣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그는 팀을 떠나 다시 전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2.3.2.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편집]


군에 입대한 김준철은 계속 어떻게든 공을 구해 축구를 했다.

이런 그를 눈여겨본 육군 특무부대장에 의해 1953년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 입단했다.

1954년 월드컵 이후 레알 마드리드에서 온 오퍼[5] 를 김준철이 받으며 작별을 고하려 했으나 운이 나쁘게도 비자가 나오지 않아[6]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불발된 후 김준철은 1960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이 특무부대 축구단에서 축구를 했다.[A]


2.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1948년, 1949년, 1950년에 꾸준히 대표팀에 발탁되며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다시 대표팀에 발탁되어 월드컵 예선과 아시안게임에 참여했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월드컵 예선에서 1,2차전을 합쳐 4골을 넣으며 한국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끌었고 아시안게임에서도 4경기 7골을 넣으며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다.

이후 이어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1차전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하프 라인에서 출발해 현란한 드리블로 모두를 제치고 골을 넣으며 대한민국 축구사에 큰 획을 그었다.

2차전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측면을 뚫는 드리블을 선보인 후 최정민에게 패스를 주어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비록 두 경기 다 패했으나 그가 보여준 파괴력은 실로 강력했고 그 덕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기회가 왔으나 상술했듯이 아쉽게 비자 문제로 불발되었다.

월드컵 이후에도 두 차례의 아시안컵에서 모두 득점왕[7]을 하며 대한민국의 2연속 우승의 1등공신이었으며 1960년 아시안컵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했다.[8]


2.4. 말년[편집]


은퇴 후 그는 축구와 관련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부산에서 작게 스포츠 용품점[9]을 운영하며 살다 2006년 8월 2일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화려한 드리블과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를 펼치는 테크니션이다. 대부분의 영상물과 기록들이 대부분 사라져 그의 플레이를 실제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월드컵과 아시안컵, 그리고 차마르틴 경기장에 테스트를 한 번 보러 갔을 당시 촬영된 영상 등 아주 소수의 비디오 자료들을 보면 단 몇 초만으로 그의 실력을 느껴볼 수 있다.[10]

이런 소수 영상자료와 당시 언론, 동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면 브라질의 축구황제 펠레에 근접한 축구를 했다고 한다.[11]

현대 축구선수들과 비교하자면 개인기는 네이마르, 속도는 음바페, 슈팅은 홀란, 드리블은 메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4. 잊힌 영웅[편집]


사실 이렇게 한국 축구사에 큰 획을 그은 그이지만, 아직 김준철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가 잊힌 이유에는 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이 크게 작용한다.

6.25전쟁을 통해 그의 전쟁 전 자료들이 불에 탔으며 이후 간신히 다시 모인 자료들도 1960년 4.19 혁명 당시 다시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도 겨우 남아있던 그의 자료들도 자료를 보관하고 있던 문화체육관광부 제1 창고에 1980년 9월 9일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라졌었다.

그러나 2022년 12월 3일 김준철의 유족과 그 동료들이 기록들을 복원하며 자료들이 모여 이 문서가 작성되었다.


5. 수상 기록[편집]




6. 언사[편집]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공격수이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2]


그가 레알 마드리드로 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소중한 것을 빼앗긴 아이처럼 울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3]


나는 그와 함께 이 많은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직도 슬프다.

프란시스코 헨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플레이가 담긴 영상을 계속 돌려보며 언젠가 그처럼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아직 많이 남은 듯하다.

로베르토 바조[14]


그는 나의 우상이다.

차범근


나는 그[15]

를 김준철같은 선수로 키우고 싶다. 많이 성장하고 이제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아직 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알렉스 퍼거슨[16]


Szent őrült![17]

페렌츠 푸스카스[18]


7. 여담[편집]


  •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이 불발된 이후 포로 생활 시절 안면을 튼 존 켈트의 권유로 아스날에서 오퍼가 왔으나 비자 발급 실패로 이적이 불발된 후 해외 이적을 사실상 포기했기에 오퍼를 거부했다고 한다.

  • 은퇴 후 양지축구단의 감독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후 그의 동료이자 한국 축구의 레전드 최정민이 제안을 받아 수락해 감독직을 수행했다.

  • 현재 그의 고향 부산광역시 해운대로 가면 그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은 신기하게 모래 사장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래 사장에서 공을 차던 그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 1960년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극장골을 넣은 직후 보여준 세레머니는 아직도 회자되는데, 평화대한이라고 쓰인 태극기를 들고 운동장을 질주했다. 당시 혼란스럽던 조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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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성축구단 소속의 축구 선수였으며 전조선축구대회, 천황배, 메이지신궁 경기대회 등에서 우승했다.[A] A B C 1980년 동아일보 4월 15일자 '김준철-나의 선수생활에 대한 회고' 중 언급[2] 여기서 중학교란 구제중학교를 말한다.[3] 풋볼리그 34/35 시즌 득점왕[4] 포로 생활 중 일과가 끝나면 간수들 몰래 밤새 4명이서 풋살을 했다고 한다.[5]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적인 스카우터 루카스 시르비아가 그를 스카웃했다[6] 대한민국 정부와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서 큰 전력유출을 염려해 막았다는 설도 있다.[7] 매 경기당 평균 1.3골의 득점[8] 그의 은퇴는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되며 국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김기정 문화부 장관은 그의 집 앞까지 찾아가 무릎을 꿇으며 은퇴 번복을 부탁했었다.[9] 부산 부산진구 부전로 48 현재는 다른 사람이 가게를 인수하며 업종이 바뀌었다.[10] 이 모든 자료들은 매우 중요시되는 자료기에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으며 차마르틴 경기장에서의 테스트 영상은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방문해 박물관으로 가 따로 열람신청을 하면 볼 수 있다.[11] 아시안 게임당시 드리블 성공률 95% , 월드컵에선 마르세유 턴, 룰렛등의 기술로 강팀들의 수비수들을 농락했다.[12] 레알마드리드의 레전드이다.[13] 레알마드리드의 레전드로 감독과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레알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14] 발롱도르 수상 직후 인터뷰에서[15] 크리스티아누 호날두[16] 호날두의 첫 발롱도르 수상 후 인터뷰에서[17] 헝가리어로, '이런 미친!'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18] 54년 월드컵 대한민국과 헝가리의 경기에서 김준철의 드리블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