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옌다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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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주임
본명
등생달(鄧生登)
정체
鄧演達
간체
邓演达
한국식 독음
등연달
영문
Deng Yanda

택생(擇生)
출생
1895년 3월 1일 청나라 광동성 혜주
사망
1931년 11월 29일 중화민국 난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바오딩 군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국민혁명
2.3. 반장활동
2.4. 죽음
2.5. 매체에서
3.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초기 장제스의 측근으로 국민혁명에 참여하였으며 국공합작의 지지자였으나 국공결렬 후 3당 운동을 벌이면서 장제스에 대항하다가 처형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5년 광동성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보정 군관학교 졸업 후 1923년 황포군관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7명의 주비위원 중 한 사람에 임명되었으며 교련부 부주임에 임명되었다. 허나 교련부 주임 리지선이 교련부 업무보다 자신의 휘하인 광동군의 일에 바빴기 때문에 실질적인 교련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황포군관학교 교육장을 지내면서 교장인 장제스의 측근이 되었다. 1925년 독일로 유학하여 독일어를 학습하였으며 정치, 경제, 사회 등을 두루 공부하였는데 이때 독일에 체류 중이던 공산당원 주더 등과 교류하였다.
1926년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서산회의파, 제국주의와 군벌을 비판하였다.

2.2. 국민혁명


1926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자 교장인 장제스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았다는 함장 이지룡의 주장과 달리 덩옌다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는 3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공합작에 찬동하고 있던 덩옌다와 장제스와의 관계가 깨진 것으로 설명되지만 이 시기까지는 연대가 붕괴된 것이 아니라 중산함 사건 이후 국민당 좌파의 핵심조직을 형성하여 우파와 공산당을 견제하자는 장제스의 주장에 탄옌카이, 주페이더, 천궁보 등 11인과 관심을 보이는 등 연대를 끊지는 않았다. 6월, 전시 정치사업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이때 저우언라이, 윈다이잉, 리푸춘 등 공산당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었다. 총정치부 주임으로 재임하면서 병사들에 대한 선전교육을 진행하고 각 부대에 당대표, 정치부 주임을 파견하여 이들이 당에게 충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26년 10월, 북벌군이 우페이푸를 몰아내고 우창을 점령하자 장제스는 덩옌다를 우창 위수사령 대리에 임명하는 등 그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나 덩옌다는 국민혁명 기간 동안 미하일 보로딘과 함께 장제스에 대해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장제스는 우한 전투 이후 바실리 블류헤르와 함께 덩옌다와 회담을 가지고 정치적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덩옌다는 거절하고 장제스의 절강, 상하이 공격 계획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9월에 이르러 덩옌다는 비정규부대를 조직하여 별동대로 투입하고 장제스의 동의도 얻지 않고 군장을 임명하는 등 명백히 장제스에게 거스르게 된다. 12월에 있었던 회담과 1927년 1월의 난창 군무선후회의에서 덩옌다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장제스는 덩옌다의 총정치부가 자신을 군사독재자로 비방하는 선전물을 작성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격노하여 덩옌다와 완전히 단절하게 된다.
이후 1927년 우한에서 개최된 국민당 2기 3중전회에서 쑹쯔원, 왕법근, 쑹칭링, 천여우런 등 8인과 함께 국민당 정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3월, 농민문제결의안 통과에 참여했다. 이때 덩옌다는 토지문제가 농민의 절박한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토지위원회 설치를 제안하였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4월에 마오쩌둥, 담평산, 구멍위 등과 함께 쉬첸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앙토지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어 토지몰수문제를 심의하였다. 이때 농민들에게 혁명에 참가하고 혁명을 옹호하면 반드시 토지를 준다고 약속하여 혁명에 대한 참가 여부를 토지 분배의 기준으로 삼자고 주장하며 공산당이 주장한 경제적 기준을 무작정 토지 분배 기준으로 삼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또한 1928년 3월 30일, 호남, 호북, 강서, 하남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중화전국농민협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2.3. 반장활동


2기 3중전회 이후 허샹닝, 쑹칭링 등과 힘을 합쳐 당권의 공고화, 군사독재의 방지, 반혁명 세력 타도를 천명하고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용공분자로 분류되어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난징 국민정부로부터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덩옌다는 4월 15일 우한에서 개최된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즉각적인 난징 토벌을 비롯한 강경론을 주장했으나 구멍위 등의 반대로 장제스에 대한 출당으로 조치를 마무리하고 펑위샹과 제휴하기 위해 북벌을 재개하게 된다. 6월에 열린 정저우 회담에서 펑위샹과 회담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펑위샹은 오히려 쉬저우 회담에서 장제스와의 동맹을 선언하고 우한 국민정부 측에 청당을 실시할 것을 압박하였다. 1927년 6월 말, 우한 국민정부의 불리한 정세를 의식하여 국민당 내부의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으며 담평산과 함께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3당의 입장으로 혁명을 수행하였다. 국공결렬 이후 이에 반대하여 7월 13일, 성명을 발표하여 왕징웨이를 크게 비판하였고 쑹칭링, 천여우런과 함께 "전 총리의 유언에 따라 삼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진정한 혁명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고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11월 1일, 모스크바 선언이라 불리는 <중국과 세계 혁명 민중에 대한 선언>을 발표, 중국 국민당 임시 행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장제스를 신군벌로 비난하며 반장운동을 이어나갔다. 난창 폭동이 일어났을 때는 홍군으로부터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주석단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혁명행동>을 발행하고 제3차 인터내셔널에 참석하였으며 독자적인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이때 코민테른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중국의 혁명은 중국인들의 일이므로 절대로 코민테른의 목적을 위해 봉사할 수 없는 것이다."라면서 공산주의가 중국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 연설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분노를 사게 되어 모스크바를 떠나 캅카스를 경유, 베를린으로 망명지를 이동하였다. 이후 스탈린의 압박과 천여우런과의 염문설,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던 쑹칭링이 베를린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다시 그녀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베를린에 머물면서 혁명이론 연구 활동을 광범위하게 벌였으며 국민당 좌파 망명인사들을 규합하여 학회를 조직하고 쑹칭링과 함께 중국의 토지와 농민문제에 대해 같이 연구하였다.
1930년 5월, 유럽과 아시아를 두루 방문한 후 상하이를 통해 영구귀국하여 혁명의 연구와 반장활동을 이어나갔다. 1930년 8월 9일, 덩옌다는 상하이 공공 조계지에서 비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제1차 전국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으로 개칭하고 중앙기구를 정식으로 설립하여 <혁명행동>, <혁명행동일보>를 기관지로 발행하였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하였으나 제국주의와 난징 국민정부 역시 매섭게 비판하였다. 장제스는 3당의 활동에 대해 매우 불쾌해했고 이들이 죽지 않으면 국가가 평화롭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공산당 역시 덩옌다를 비판하며 덩옌다에 대한 비판 투쟁을 진행하였다.

2.4. 죽음


결국 1931년 8월 17일, 상하이 공공 조계지에서 열린 비밀회의에 참석한 덩옌다는 조계지 경찰에 체포되었고 조계지는 덩옌다를 중국 경찰에게 인도하였다. 쑹칭링은 당시 장제스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하고 그에게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한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친했던 덩옌다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덩엔다 구명운동을 벌이며 장제스에게 덩옌다를 살려달라고 간청했으나 장제스는 이것을 무시하고 이에 쑹칭링은 국민당과 완전히 연을 끊게 된다.
한편 장제스는 황포군관학교 교육장,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주임을 역임했던 덩옌다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난징 국민정부 측으로 전향할 것을 제안했지만 덩옌다가 거부하자 11월 29일, 난징에서 비밀리에 그를 총살시켰다. 이것은 장제스에게 정치적인 약점이 되어 그에 대해서 글을 쓴 레이 황은 "장제스의 인격에 그늘을 남겼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2.5. 매체에서


<장강에 흐르는 피> 업데이트 이후 카이저라이히의 국민당 좌파 팩션에서 육군 3성 장군으로 등장한다.

3.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송경령 연구, 이양자, 일조각.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공산당 역사 제1권 상,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 Chiang Kai-Shek, His life and times, Furuya Kenji, St.John's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