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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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5대 총통
장제스[1]
蔣介石 | Chiang Kai-shek

출생
1887년 10월 31일
저장성 닝보부 펑화현 시커우진
(現 저장성 닝보시 펑화구 시커우진)
사망
1975년 4월 5일 (향년 87세)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스린구 스린 관저
묘역
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
재임기간
초대 총통
1948년 5월 20일 ~ 1954년 5월 20일
제2대 총통
1954년 5월 20일 ~ 1960년 5월 20일
제3대 총통
1960년 5월 20일 ~ 1966년 5월 20일
제4대 총통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제5대 총통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서명
파일:장제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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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석(介石)
본관
계구 장씨
부모
아버지 장조총, 어머니 왕차이위
형제자매
이복형 장제친
동생 장루이칭
배우자
마오푸메이(毛福梅, 1번째 부인, 기간: 1901-1921)
야오예청(姚冶誠, 첩, 기간: 1913-1921)
천제루(陳潔如, 2번째 부인, 기간: 1921-1927)
쑹메이링(宋美齡, 3번째 부인, 기간: 1927-1975)
자녀
아들 장징궈, 장웨이궈[1]
딸 장젠화, 장야오광
학력
봉록학당
금천공학
용진학당
일본육군사관학교 산하 진무학교 (중퇴)
종교
개신교 (감리회)
신체
169cm, 59kg, O형[2]
소속 정당

군사 경력
임관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1기)
복무
국민혁명군
1911년 ~ 1952년
최종 계급
특급 상장 (중화민국 육군)


1. 개요
2. 상세
5. 사상과 성격
5.2. 반공과 혁명 사이
5.3. 파시즘 논란
5.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5.3.2. 장제스 정권 분석
7. 이름 표기법
8. 여담
8.1. 종교
8.2. 중국사 유물 보존
8.4. 증손 장완안
8.5. 생전 육성
8.6. 야사
9. 갤러리
10. 기타
11. 한국과의 관계
11.1. 카이로 회담 및 지원 여부
11.2. 이승만과의 관계
11.3. 건국훈장 수여
11.4. 박정희 시기
11.5. 이후 행보
12. 매체에서
12.1. 역사서
13. 참고 문헌
14. 관련 문서
14.1. 인물
14.1.1. 국민당 계열
14.1.2. 공산당 계열
14.1.3. 군벌
14.1.4. 가족
14.1.5. 열강
14.1.5.1. 미국
14.1.5.2. 일본
14.1.5.3. 영국
14.1.5.4. 독일
14.1.5.5. 소련
14.2. 사건
14.3. 단체
14.4. 기타
1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중국독재자, 혁명가, 정치가, 군인.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의 제2·4대 국민정부주석이자, 헌정 실시 이후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을 역임하였다.

중국 근현대사 인물 중 본명보다 자로 더 잘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장중정(蔣中正), 자(字)가 개석(介石)인데 한국에서도 장개석으로 알려져있다. 마오쩌둥 역시 윤지(潤之)라는 자가 있지만 그냥 본명인 '모택동' 으로 더 유명하다. 대부분의 중국 근현대 인물이 본명으로 더 유명한데 비해 유독 장개석만 동서를 통틀어 언급될 때 자로만 불린다. 물론 왕징웨이같은 경우도 있다. 장개석의 본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생소한 편이다. 대만의 중정기념당, 중정국제공항을 통해 그나마 일반인들이 장제스의 본명을 알고 있는 정도. 중정국제공항은 영문으로는 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의 국민들이나 간간히 안다.


2. 상세[편집]


장제스는 청나라의 붕괴와 위안스카이의 매국으로 붕괴된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며, 역사상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다. 하나의 중국 논리대로라면 대만도 중국의 영토이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통일을 달성시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원래 중화민국의 영토인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점거한 것일 뿐이다. 장개석은 스승인 쑨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국으로 귀환해 장제스의 북벌을 감행하여 마지막 군벌인 봉천군벌의 항복을 받고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분열된 근대 중국을 통일하고 그 후에 쳐들어오는 일본 제국을 방어, 2차대전의 승전국 연합국으로부터 여러 지위를 받아 중국의 입지를 올렸다는 점에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2차 세계대전 개전 전까지 열강 취급도 받지 못했던 중화민국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육군 전력의 대부분을 대륙에 묶어두고 일본에게 엄청난 인적, 물적 출혈을 입혔으며, 어마어마한 인구에서 나오는 잠재력과 종전까지 패망하지 않고 굳건히 버텼다는 공로를 인정 받았고, 이후 유엔의 설립과 동시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함께 향후 국제 세계를 이끌어갈 5대 강대국으로 인정 받으며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다. 이 상임이사국 지위는 국부천대로 인해 대륙 본토를 잃고 타이완섬으로 나앉았을 때도 20여년간 유지됐으나 70년대를 기점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항의의 의미로 유엔에서 탈퇴함과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다.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쫒겨났을 당시에도 포기하지 않고 대만의 경제력, 사회 시설을 발전시켜 현대 대만의 기반을 만들었기에 본토에서의 행적뿐만 아닌 대만에서의 행적 또한 중요시되는 인물이다. 단적으로 대약진운동으로 피폐해진 동시기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다르게 그가 통치하던 대만은 빈부 격차의 완화, 교육열 증가, 컬러 TV의 방영, 선진국의 반열에 드는 등 미국보다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다.

그러나 그가 이룬 통일은 전대의 대표적 통일 군주들인 시황제, 유방, 조광윤, 주원장에 미치지 못한, 군벌들이 세를 유지한 채로 중화민국의 일원이 되는 외형적 통일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의 갈등조차 제어하지 못해 반장전쟁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내전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지속된 외형상 통일의 한계는 곯아 터져 시안 사건으로 드러나고 만다. 중화민국 몰락의 원인은 군벌과 장제스의 갈등 외에도, 낙후된 사회 시설, 그리고 공산당 토벌과 항일 운동 중 의견 차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안 사건을 일으킨 장쉐량은 순수하게 항일로서의 목적이 아닌,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빼앗겨 영향력이 소실되가자 궁지에 몰려 장제스를 감금한 것에 가깝다.

이후 일본 제국본토를 공격했고, 난징 대학살같은 비극을 견뎌내며 강력한 리더쉽을 바탕으로 8년간의 항쟁 끝에 중국사를 지켜냈으나 시안 사건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공산당을 비롯한 마오쩌둥에게 중국 대륙을 빼앗기고 작은 대만섬만 통치하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최악의 상황에도 장제스는 본토 수복을 목표로 삼고 중국을 구하고자 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지만 대만에서 대민정책에 실패하여 대만인이 대대적으로 시위에 나서자 장제스는 결국 일본과 똑같은 짓을 답습해 군대를 동원하여 무고한 대만인들을 죽음으로 유린했다.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가 젊었을 시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지지만, 군벌의 난립으로 중국이 난세에 빠진다. 장제스는 쑨원 사후 국민당의 지도자로 등극한뒤, 국민당의 북벌반장전쟁으로 외형적으론 군벌들을 굴복시켜, 외형상 중국 통일을 완성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후 국부천대대만으로 건너간다.

유년기엔 일본으로 유학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1912년 본토에서 제정을 폐지시키는 신해혁명에 가담했으나 손문을 속이고 황제를 선포한 위안스카이의 축출엔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그곳에서 전전하다 중국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자신만의 기반을 만든다.

이후 스승인 쑨원이 사망하자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내에서 힘이 강했던 왕정위를 몰아낸 다음 국민당 1인자가 되어 북벌을 감행해 위안스카이 이후 중국의 마지막 난세인 근대 군벌시대를 종식시켜갔고, 최종적으론 만주 일대를 장악한 봉천군벌의 장학량이 일본의 압박으로 국민당에 투항하자 중국을 다시 통일했으며 법 제정의 통과를 두고 그것에 반대한 염석산, 풍옥상의 반란을 진압해 1인자의 입지를 다졌으나 곧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학량의 만주를 빼앗고 그곳에 전(前) 청나라의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만주국을 선포, 중국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소멸 직전의 공산당을 치기 위해 서안까지 이동하여 국민당군을 지휘하려 했으나 빼앗긴 만주 수복이 아닌 공산당 축출만을 앞장서는 장개석에 반감을 품은 장학량이 그를 감금하여 강제로 항일을 목적으로 하는 국공 합작을 체결시킨다. 곧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고, 일제가 이를 빌미 삼아 중국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 문서 참조. 낙후된 인프라, 미발달된 농업 국가, 보급의 한계에 부딪혀 화북, 수도인 난징까지 빼앗겨 난징대학살이란 피해까지 겪었으나 약 8년간의 긴 항쟁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여 중국 보존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전 중일전쟁의 후유증과 여러 개혁 정책의 실패,부정부패에 대한 관리 실패로 인한 민심 하락은 국민당을 약화시키게 했고 공산당에게 처참하게 밀리는 모습을 본 미국마저 지원을 중단하기까지 이른다. 서서히 대륙을 상실하자 마지막엔 대만 타이페이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본토 수복을 꾀한다. 하지만 수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대만으로 이동한 후 자신에게 반발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해 자신의 독재를 강화했다.

비록 커다란 대륙을 잃고 국가적 위신마저 실추당하기까지 했으나 명(命)을 보존한 국민당의 발전을 위해 경제 성장, 문맹 퇴치, 부정부패 척결을 실시, 성공했고 대만을 용(龍)의 반열에 올리기까지 하는 대업을 이루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대만을 통치하던 장제스는 1975년 89세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한 항일 영웅 또는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 심각한 부정부패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대륙을 중국 공산당에 뺏긴 무능한 지도자,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학살자라는 다양한 평가가 공존한다.


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사상과 성격[편집]



5.1. 권위주의 성향[편집]


장제스의 권위주의 사상은 1912년경 스스로 발행인을 맡은 군사학 잡지 군성잡지(軍聲雜誌)에서 최초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장제스는 "우리 당이 중국을 강대한 공화국으로 건설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10년 안에, 단지 미국과 프랑스 공화정의 껍데기만을 치리(治理)하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개명 전제의 정신을 이용하여 계획을 세워야 한다." 라고 언급했다. 개명 전제론은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공화 혁명론에 대항하여 내놓은 입지로 "중국이 급하게 공화제를 도입할 경우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으니 개명한 군주가 우선 민도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통치자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쑨원의 삼서론에 입각하여 국민당의 총재인 본인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장제스가 기본적으로 추구한 것은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가정'이었다. 장제스는 일본 유학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초국가주의와 유년 시절에 받았던 전통 교육, 국민당원으로서의 쑨원의 사상 등의 영향을 모두 받았는데 이 사상들의 공통점들은 바로 강력한 권위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었다. 장제스는 쑨원의 발언을 언급하여 "중국인은 자유를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량치차오의 신민설에서도 언급) 지금 필요한 것은 빈곤의 격퇴(와 이를 위한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장제스는 인민의 자유가 사회의 발전에 비례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의회 민주주의가 언젠가 중국에 도입돼야 함은 인정했지만 당대 중국의 상황에는 언감생심이라면서 도입을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을 추구한 쑨커나 다른 지식인과 충돌하기도 했다. 당시 중국은 군벌+일제+공산당의 3단 콤보 개트롤짓 때문에 제대로 의회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거부하긴 했지만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이미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1937년 12월 입법원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훈정 시기 국민당은 언론과 교육을 국민당이 총괄하고 쑨원의 이론과 삼민주의 사상을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제스를 위한 첩보 / 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납치하여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고 CC단도 한몫했다. 중국의 강제 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 데 끌려와서 코로 마라탕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지식인의 반발을 불러오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5.2. 반공과 혁명 사이[편집]


"일본인들은 피부병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다."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노(亡國奴, 외국에 주권을 잃은 상실된 국가의 국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장제스의 정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반공 성향이다. 국민당은 1차 국공합작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에 꽤 우호적이었지만, 장제스 본인은 소련 방문을 기점으로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어 여러 번 쑨원에게 국공 합작을 끝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소, 용공 성향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의 고문이었던 미하일 보로딘은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장제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중산함 사건도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쿠데타를 선동하여 역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 장제스의 사상은 반공적이었으나 그의 정책은 자본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 당시 군벌들이 다 그러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적들과 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던 사람이다. 장쉐량을 비롯한 만주 군벌들도 북벌 시절엔 적이었고 펑위샹, 옌시산과는 천하를 놓고 한 번씩 다투어봤으며 리쭝런, 바이충시는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룽윈, 천지탕 등의 지방 군벌들과도 이합집산과 반목을 반복했다. 그 장제스가 국공 합작을 깨기 전까지 일관되게 적대했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편하게 헤쳐모여가 가능한 군벌들과 공산당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군벌들에 우세한 점이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 사상인데 공산당은 국민당보다도 혁신적이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를 알기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목을 매달았다. 더불어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중앙군을 지방에 박아 군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쓰촨, 윈난, 화북의 군벌들은 장제스하면 치를 떨게 되고 아예 공산당과 내통하여 태업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쉐량의 시안 사건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합작을 아주 거부한 것은 아니어서 대장정 이후 공산당에 홍군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다시 받아주겠다고 제안한 바도 있고 시안 사건으로 강요된 합작도 번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일 감정이 너무 고조되어 합작을 거부했다간 국민당의 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컸다. 그래도 공산당은 결국 없애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었고 중일 전쟁 이후 무리한 공세를 취하다가 망했다.

대중에서 장제스는 반공 지도자로 유명하고, 결과만 보면 그렇게 됐지만 그렇다고 '반공'만으로 장제스의 정치적 성향과 사상을 정리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일단 최고 권력자로서 정치적 행보는 둘째치고 국민당의 역사 전체에서 사상 자체만 두고 보면 장제스보다 훨씬 더 일관적이고 원칙주의적으로 반공 우익을 표방해온 세력은 꽤 있다. 국민당에서 진짜 강경 우파 성향은 후한민, 그리고 서산회의파의 중추인 셰츠, 쉬충즈같이 국민혁명 초기부터 국공결렬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들이었고,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히려 보로딘, 왕징웨이 같은 좌파와 가까운 인물로 평가받던 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무슨 권력 한줌 없는 샌님들이 아니라 당장 펑위샹, 리쭝런, 옌시산 같이 국민당 우파 정치인들이 군사력을 필요로 했던만큼 그들의 정치적 명분과 대의도 필요했던 다른 대군벌들과 종종 손잡으며 실제로 장제스의 권력에 심각한 위협을 끼칠 수도 있는 쟁쟁한 정치세력이었다.

당장 서안 사건 때만 하더라도 좀 많이 현실적인 계산도 끼어있지만 허잉친, 리쭝런 같이 총통의 일신이 위험하더라도 초공의 기치가 더 중요하다며 시안도 폭격으로 밀어버리고 초공작전을 지속하자던 강경 인사들도 충분히 있었다. 즉, 피상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국민정부 시기 장제스의 정치적 대립은 자기가 정점인 국민당 vs 한주먹도 안되는 공산당의 1대1 구도가 아니라 실제로 국민당 내에서도 수많은 다른 계파, 경쟁 군벌들과도 동시에 싸우면서 공산당하고도 싸우고, 나중엔 추가로 이들보다 훨씬 강한 일본하고도 싸워야 했던 게 1930년대 장제스의 처지였다. 그리고 장제스가 그 와중엔 본인보다도 더 강경 반공 우익인 다른 국민당 우파 정치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정적들과 싸우며 정신없던 사이 공산당은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일삼으면서도 어쨌든 굉장한 생존력을 발휘하고 타격을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세력을 키운 끝에 2차 대전이 끝나고 2차 국공내전이 터졌을 땐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위세로 성장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중국의 통일자였던 장제스가 왜 '한줌도 안되는' 공산당에게 결국은 패배하고, 특히 장제스 권력의 정점이었던 1930년대에 토벌을 마무리짓지 못했나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쉬워진다. 장제스가 당장 북벌 완수, 동북역치, 이에 따른 다른 군벌들의 반발로 인한 반장전쟁, 중원대전, 여기서 숨돌릴 사이도 없이 만주 사변과 일본의 침략이란 사방의 수많은 다른 적들과 차례로 맞서 싸우는 동안 공산당은 이리저리 쫒기면서도 적어도 세력 확대와 몸집 키우기라는 하나의 전략적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해서 보면 장제스는 국민혁명의 중진들 중에선 오히려 중산함 사건, 상하이 쿠데타 같이 확실하게 반공으로 기울어진 1920년대 후반 이전까지 포함하면 이념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유연했던 편에 속한다.

혁명적 중국 만세!
1927년에 제작된 소련의 포스터. 쑨원을 중심으로 다른 국민당의 중진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1930년대엔 둘째 아들이자 친자 논란이 있는 장웨이궈를 독일 유학 보냈지만 그 이전 1920년대엔 장남 장징궈를 소련 유학 보냈다는 사실이 상당히 상징적이다. 국민혁명에서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재 시도와 결렬 사이 1930년대 장제스가 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파시스트 정치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반공에 치중하면서 가장 친해졌던 외부세력이 독일이었다면, 그보다 더 긴 국민당 전체의 역사로 보면 국민당과 가장 우호적이었던 외부세력은 당연히 소련이었다. 국민당의 젊은 혁명가이자 군사 엘리트였던 경력 초기만 하더라도 장제스는 보로딘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고, 상하이 쿠데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련 측은 소위 '아직 즙을 덜짠 레몬'으로 평가했다. 즉, 공산당 소속은 아니더라도 이용 가치가 있는 동조세력. 때문에 소련은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호의적인 입장이었고, 심지어 상하이 쿠데타 이후로도 국민정부 치하에서 중소관계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막상 중국공산당, 특히 마오쩌둥에 대한 소련의 시선은 1920년대 후반 마오가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주장하며 소련이 직접 키워낸 리리싼을 비롯한 소위 '28인의 볼셰비키'들과 대립각을 세울 때부터 표면적으로는 세계 공산당의 연대 운운하면서도 오히려 상당히 냉랭한 편이었다. 2차 대전 전후 긴 국공내전 시기 내내 소련은 2차 대전 말기 만주 작전 과정에서 생긴 잉여 군수품이나 일본 노획물자를 처리할 겸 대량으로 중공에게 군수지원을 해주기 전까진 이리저리 지령 내리는 거 말곤 사실 딱히 해준 게 없고, 차라리 국민정부 치하 중국을 더 안정적인 현지 파트너로 보고 더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미 끝난 전쟁 막타치는거니 이 시기 소련군을 상대한 일본 관동군은 거의 스스로 자체분해됐다 할만큼 빠르게 대규모로 무너졌는데 관동군 특성상 이때 소련군이 대규모로 얻은 노획 군수물자는 대부분 치하 전차 같은 육군장비였고, 그나마 소련이 후발주자라서 관심 가질만한 군함, 해상 비행 관련 기술도 아니고 독소전을 겪으며 세계 최강의 육군세력으로 단련된 소련군 관점에선 본토 가져가는 운송비가 더 비싸게 나올 희대의 장난감 같은 물건들이었다. 이러다보니 겸사겸사 땡처리도 하는 겸 소련군은 당시 관동군 노획장비 태반을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공 홍군에게 넘겨줬고,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장난감같다고 땡처리한 이런 일제 군수품은 2차 국공내전기 물적으로 열악했던 홍군의 손에 맹활약했다. 국민당 또한 당장 대만 시절 특히 소련 유학 다녀온 장징궈가 추진한 통제, 계획경제식 경제개발 정책도 그렇고 경제, 국가 건설 정책 전반에서 소련의 영향력도 상당한 편이었다.

개인적인 정치가, 사상가로서도 장제스는 반공주의는 강력하게 견지했지만 그가 추구한 정치적 가치관은 일반적인 반동 우익 정치가 아니라 공산주의식 혁명과는 반대하지만 분명 나름의 근본적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혁명 정치의 일종이었다. 장제스는 평생 본인의 정치적 숙원이자 이상을 쑨원이 시작한 국민혁명의 완성으로 보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 또한 이 뜻을 계승하고 유지할 혁명가로 보았다. 장제스 또한 공산당과 비슷하게 '반동'이란 말을 주로 비공산당 경쟁 군벌 세력을 지칭하는 욕으로 썼고, 외부 열강 제국주의 세력을 뿌리깊게 미워했으며, 당시 중국의 자본가 세력은 태반이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라며 이들을 우대하긴 커녕 국민정권 치하 중국은 종종 정권이랑 충돌하는 자본가들 또한 '외세 앞잡이', '수구반동' 꼬리표 붙히고 잡아 조지는 그다지 비즈니스-프렌들리 하지 못한 정권이었다. 당장 장제스가 청방, 남의사 같은 친위 테러조직들을 동원해 백색테러를 저지르고 다닌 희생자들 중엔 공산당 같은 좌익 못지 않게 토지 개혁, 기업과 산업 국유화 등을 추구하는 본인 경제 개혁과 정책에 반대하는 자본가, 사업체들도 종종 두드려패고 조지고 다녔다.

정리하자면 크게 보면 반공 지도자로서 이름이 남았지만 본인 또한 스스로 나름 진보적, 일정 부분 사회주의적 내용이 있는 국민혁명의 혁명가로서 관점을 견지했으며 중국의 재통일과 근대화라는 목적에 유용하기만 하면 중국 전통 유교사상에서부터 친소, 친공 노선을 넘어 친독 파시즘까지 다양한 사상적 조류와 성향을 넘나든 독창적이면서도 유연한 사상가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이데올로기적 다양함과 유연성은 비단 장제스 뿐만 아니라 쑨원도 그렇고, 평생의 숙적이자 공산주의자지만 소련의 오리지널과는 영 뭔가 다른 걸 만들어낸 마오쩌둥까지 포함하여 이 시기 중국 정치 지형 자체 전반의 특성이기도 하다.

구체제는 붕괴했고 새로운 안정적인 체제는 자리잡지 않은 과도기적 난세에서 변화하는 세상의 조류를 맞아 당시 중국 지식인들도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등 각종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분명 뚜렷하게 받았지만 중국의 물리적인 사회경제적 현실은 저런 서구발 근대 사상들과는 너무나 다른 문맥에서 논다는 건 누구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면에서 평가하자면 이런 장제스와 국민혁명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은 유연함과 독창성으로 평가해줄 수 있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자면 소련 입장에선 전략적 동맹이면서 지나치게 반공적이고, 독일이나 일본 관점에선 지나치게 친공용소적이고, 미국과 영국 입장에선 민중을 선동해서 본인들의 제국주의적 이권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빨갱이'나 매한가지라 지원에 소극적으로 나오는 등 국민당에게 마냥 도움만 된 건 아니었다.


5.3. 파시즘 논란[편집]


“좁은 의미에서 가족은 단지 한 가정을 뜻한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가족은 민간 및 정부의 모든 조직을 포함하고 여기에 혁명당과 학교까지 든다.”


“우리 개인의 모든 말과 행동은 국가와 민족을 유일의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권위주의 + 반공 성향 정치가였고 대륙에서 장제스의 시대가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날뛰던 1930 ~ 1940년대였던 것에 주목하여 장제스가 파시즘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국민당의 유력 정치가 왕징웨이장쉐량 등은 유럽을 방문하면서 히틀러, 무솔리니를 칭송하며 파시즘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장쉐량은 장제스를 중국의 히틀러로 옹립하여 중국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후 천리푸, 다이리 등 장제스의 측근들이 지휘한 CC단, 남의사 등은 게슈타포, SS와 같은 파시즘 단체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중화민국과 나치 독일이 밀접한 교류를 하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협력한 것 역시 장제스 파시스트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저 시기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평가가 좋았던 시절인 만큼 파시즘이나 히틀러, 무솔리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전 세계적으로 있었다. 윈스턴 처칠 총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무솔리니와 파시즘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가 있었다.


5.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편집]


분명히 장제스 정권이나 장제스를 옹호하는 다이리남의사, 천리푸, 천궈푸CC단 등에서 파시즘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며 흑룡회를 비롯, 일본의 파시즘 성향이 짙은 비밀결사와의 연계가 있었으며 1932년 남의사 결성 이후 중국 내부에서 장제스와 파시즘의 연계에 관한 의혹이 제기된 바가 있다. 예컨대 1932년 7월 대공보는 장제스에게 '귀하가 파시스트당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라는 공개 질문서를 제출했고 왕징웨이 계통의 황포동학구국단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 질문을 보냈다.

작년 이래의 외모, 수재, 비화는 귀하의 6년간에 걸친 전정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귀하는 조속히 하야하여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처지인데도 오히려 불한당들을 이용하여 파시스트당을 조직하려는 것은 위로 쑨원 총리의 유언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아래로 동지의 기대에 배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귀하에 대하여 다음의 제항목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 귀하는 어찌하여 황포동학을 자기 옹호에 이용하고, 혁명을 돌보지 않는가.
2. 귀하는 국민당의 영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당 외에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여 국민 혁명을 파괴하려 하는가.
3. 삼민주의를 고취함에 있어서 폭력 정책을 사용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귀하는 어찌하여 철혈대로 하여금 민중을 압박하는가.
4. 귀하는 황제가 되어 인생의 부귀를 누리려고 하지만 황포 동학을 이용하여 혁명 군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말라.
5. 만약 혁명 구국을 위하여 파시스트당을 조직한다고 하면 바야흐로 항일을 위해 출병하라.
6. 파시스트당의 유일한 수단은 암살에 있으나 귀하는 3천 명의 사병으로 4억 민중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다고 사료하는가.
7. 파시스트당의 경비는 1개월 120만 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귀하의 강회 지역의 영세민이 날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는 궁핍한 상태를 염려한 일이 있는가.
8. 귀하는 파시스트당의 조직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째서 중앙군관학교의 군관특별연구반, 교육총대 및 단경반에 대해 파쇼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가.
9. 귀하는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의 내부는 무솔리니의 친척으로 충만되어 무솔리니 일가의 천하로 보이지 않는가.
10. 귀하는 파시스트당을 존경한다고 했다. 하지만 각국 파시스트당은 대외 무저항주의를 국민에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해 장제스는 "나는 파시즘을 아주 싫어한다."라고 답변할 뿐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어 대공보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중국 혁명의 조직과 방략에는 쑨원 총리가 정한 조직과 방략만으로도 국민 혁명의 사명을 완성하기에 충분하다. 외국의 혁명 방략을 좇아서 중국의 민족성과 상반되는 조직을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만약 내가 사욕을 품는다면 국가도 민족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쑨원 총리를 배반한 반혁명 분자가 국민당 고유의 조직과 방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고유, 유일한 혁명 조직을 회복하지 않고 파시스트의 조직을 좇아서 이를 중국에 강행하려고 함은 공산당이 중국을 적화하려고 함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살아서도 중국 국민당원이요, 죽어서도 당귀가 될 뿐이다. 중국 혁명의 조직에는 국민당의 조직이 있을 뿐이며 중국 혁명의 방략에도 역시 국민 혁명의 방략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 혁명 완성을 위한 유일무이의 도립이다. 이외의 조직은 절대로 반대한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민국 13년에 성립한 국민당의 혁명 정신과 국민 혁명의 조직 및 방략을 부흥시킴으로써 삼민주의의 실현을 기대함에 있다."


하지만 장제스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파시즘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파시즘의 혁명적 열기에 관심을 보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기존 국민당원들에게서 혁명적 열기가 사라지고 오히려 중국 공산당에게서만 열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제스의 맹우이며 반공 이데올로그 다이지타오도 한탄했던 문제였는데 장제스는 혁명 열기를 고취시키고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파시즘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고 분명 관심과 희망을 가졌었다.

"1931년 9월 18일 이후,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방하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앞으로 중국 혁명에 대한 협의체는 삼민주의와 파시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국민당의 삼민주의 원칙이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피를 수혈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파시즘은 중국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내용면에서 삼민주의를 활용하고 기능면에서 파시즘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934년에는 이렇게도 말했다.

"유명한 정당이 있는 외국에서는 그 당이 통치권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경우 유명한 정당은 국민당입니다. 그러나 국민당은 권력이 없는 형식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정당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최근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중국에도 파시스트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는 장제스가 파시즘의 사상적 면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는 기능적 수단에 주목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시 중국 엘리트들에게 파시즘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매우 진보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두음 박사는 장제스가 유럽 파시즘에 관심을 보인 분야는 조직에 있지 '사상'에 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분적인 기능적 수단을 차용하는 경우는 비파시즘 계열의 여러 국가에 대해서 얼마든지 보인 경우이다. 예컨대 팩스턴의 견해를 따르면 후안 페론이나 안토니우 살라자르. 사상면에서는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트들은 유교 사상이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장제스의 파시즘에 대한 관심은 예전과 달라졌고 1938년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정치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중화민국을 설립한 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위 대중 집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나 헌정주의는 없었습니다. 또한 불행히도 이런 초기 집회들이 몰고 온 수많은 부패 관행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혼란과 허약한 상태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억압과 굴욕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정치위원회는 의회가 아니지만 여러분은 정당 정치가 빚어낸 과거의 실수들이 지속적인 경고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시에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굳걷한 기반을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요약해서 장제스가 20년대 후반~30년대 중후반에 파시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근대화의 수단 중 하나로 관심을 보인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장제스의 통치 방식은 파시즘적인 색채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5.3.2. 장제스 정권 분석[편집]


중국국민당이 권위주의 정권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학적 분석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고 중국 파시즘에 대한 연구도 남의사, CC단, 그중에서도 남의사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중국에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준동한 세력으로 그나마 지목되는 것이 남의사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남의사와 파시즘의 연대를 연구했던 것은 로이드 이스트만인데 그는 이렇게 규정한다.

남의사가 파시스트 조직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때 역행사의 지도층이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명시적인 방법으로 파시즘에 전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역행사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잠깐이었다.


우선 이런 문제는 무엇이 파시즘이냐는 파시즘의 정의 차원에서 상당히 민감한데 권위 있는 파시즘 연구자들인 로버트 팩스턴이나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는 남의사가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파시즘 단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소위 '파시즘의 최소치'에 중점을 두는 팩스턴의 경우 구조주의적 파시즘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제국조차도 파시즘이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장제스나 남의사나 파시즘 얘기를 꺼낼 건덕지가 없게 된다.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도 남의사는 대중 정당이 아니라 비밀결사로 파시즘식 대중 정당으로는 볼 수 없다고 분류한다.

물론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는 일본식 파시즘의 존재를 긍정할 경우에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긴 한다. 일본식 파시즘을 긍정할 경우, 현양사, 흑룡회를 비롯한 비밀결사들의 행동이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일본 파시즘은 대중 운동보다는 위의 군사,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은 파시즘 정당이 대중 운동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서구와 달리 기존의 국가 조직과 지도자를 탈바꿈하는 식으로 집권하기 때문에 없잖아 국민당의 통치에도 맞아떨어질 건덕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남의사는 1938년 이후로 해체되어 중일전쟁을 위한 정보기관에 흡수되었고 그 이전의 남의사의 첩보 활동들도 단순히 권력 탈취와 국가 개조를 위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정두음 박사의 경우, 남의사를 파시스트 단체로 정의하지만 이는 남의사의 공식적 이념보다는 선전 자료, 출판물을 중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6. 타 정치인과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이름 표기법[편집]


구분
명자(名字)
설명
족보명
저우타이(周泰, 주태)
장제스의 족보 이름.
초명
루이위안(瑞元, 서원)
초명
학명(學名)
즈칭(志淸, 지청)
학생 시절 이름.
본명
중정(中正)
본명

제스(介石, 개석)
자. 실제 이름인 중정보단 장제스로 유명하다.
한국에선 자를 그대로 읽은 장개석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별명
노장(老蔣)
어린 아들 장징궈[2]와 구별되는 존칭.

그의 이름 표기는 다양한데,
  • 장제스가 태어날 때의 본명은 '장즈칭(蔣志清, Jiǎng Zhìqīng)'이다. 그의 두 번째 이름이 1913년경 바꾼 '중정(中正, Zhōngzhèng)'이다. '제스(介石, Jièshí)'는 본래 191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었으나 이후 자(字)로 사용했다.
  • 이 문서 표제로도 올라와 있는 '장제스'는 '장개석(蔣介石)'의 표준중국어 발음을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옮겨 적은 것으로, 한어병음의 표기를 따르면 'Jiǎng Jièshí'가 된다. 병음을 보면 알겠지만, 는 권설음이라 한국어 '스'와 다른 발음이다. 만약 온갖 표기 원칙을 무시하고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를 하면 지앙지에시으 정도일 듯.
  • 영어권을 비롯해 대부분의 서양 언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창카이섹, 'Chiang Kai-shek'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기는 광동어 발음 '쬥가이쎅(표기법 기준) / Zoeng2 Gaai3-sek6 (홍콩 언어학 학회(LSHK) 표기법 기준)'의 변형이다. 성씨 '蔣'은 표준중국어 발음 기준 웨이드식 표기법인 'Chiang'이고, 나머지는 광동어 발음 표기의 변형. 초기에 중국 국민당의 본진은 광둥성에 있었고, 장제스가 두각을 나타낸 때가 광동 국민 정부 시절이었기에 광동어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졌다. 영어 위키 백과 해당 항목명도 'Chiang Kai-shek'. 드물게 표준 중국어 발음을 웨이드 식으로 옮긴 Chiang Chieh-shih도 쓰이기는 한다.
2008년 칭화대 교수 왕치(王奇, 왕기)가 Chiang Kai-shek이 장제스임을 알지 못하고 창카이선(常凱申, Cháng Kǎishēn, 상개신)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번역하여 크게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 이후 '창카이선'과 '창공(常公, 상공)'이 중국 내에서 장제스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 한국의 경우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서 신해혁명 이후 중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인명을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겨 적는다는 원칙을 두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장제스'라는 표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한국 한자음 그대로 표기해 '장개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문서가 장개석으로도 리다이렉트된다.]
  • 대만에서는 '蔣介石'보다도 본명을 적은 '蔣中正'이 더 널리 쓰이며(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Jiǎng Zhōngzhèng'. 한국 한자음과 비슷한 '장중정'으로 읽는다.), 대만 내 영어 표기에서는 'Chiang Kai-shek'을 쓴다. 대만어 발음으로는 Chiúⁿ Kài-se̍k. 간단하게는 중정/C.K.S.으로 쓴다.
  • 일본에서는 '蔣介石'을 자신들 방식으로 읽어 'しょうかいせき(쇼카이세키)'라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중국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고, 그나마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인물은 거의 그렇게 표기하지 않는다.
  • 베트남에서는 '蔣介石'을 베트남식 독음으로 읽어 Tưởng Giới Thạch(뜨엉 저이 타익, 또는 뜨엉 저이 탓)으로 부른다. 베트남은 중국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고 거의 일괄적으로 베트남식 독음으로 읽고 쓴다.


8.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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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신 대만 달러 지폐에 나온 장제스. 밑의 건물은 타이베이 총통부다.


8.1. 종교[편집]


종교개신교(감리교)였다. 아내인 쑹메이링과 아들인 장징궈크리스천. 원래 쑨원을 포함한 중화민국 및 중국 국민당의 초기 정치적 주요 인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사실 장제스는 본래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불자였지만, 쑹메이링과 결혼하면서 개종을 한 것이다.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할 때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고...


8.2. 중국사 유물 보존[편집]


비록 대만으로 쫒겨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금성에 있던 진귀한 역사적 유물의 핵심을 보존해 대만으로 실어왔다. 이 유물들은 중국의 여러 황실에서 계속 모아온 보물 중의 보물로 지금까지도 중화민국이 가진 가장 큰 보물로 꼽힌다.

정말 문화적인 면에서는 중화민국의 유물 보존 노력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현재 유물을 전시 중인 고궁박물원을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장제스가 유물을 이전한 이후 자금성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 관광객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이후 중국 정부가 대륙 전체에서 유물을 수집해 양적으로는 과거의 규모를 능가했지만 질적으로는 국립 고궁 박물원의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장제스가 자금성의 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유물들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무사히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과 북경 고궁박물관을 비교한다면 대만 쪽이 명, 청 및 근대시기 유물이 많고 본토에는 고대 시대 유물이 많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장제스가 유물 들고 대만에 넘어갔을 쯤에는 전제 왕조 시절 부터 쌓여있던 오리지널 유물을 가져간 거고 그 후에 대약진 운동이야 문혁이야를 거치고 난 뒤 좀 안정됐을 때 좀 더 발전된 고고학 기술을 이용해 발견된 유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8.3. 증손 장여우보[편집]


증손자인 장여우보(장우백, 蔣友柏)가 매우 미남이라 한때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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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주간 - 나의 증조부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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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성이 뽑은 멋진 남자 2위에 올랐던 적도 있다. 그는 장징궈의 3남 장샤오융(장효용, 蔣孝勇)의 아들로, 장징궈의 아내 장팡량(장방량, 蔣芳良)이 소련 출신이라 장제스의 손자 대부터 혼혈 외모가 나타나는 것. 장징궈에게는 비서와 사통해서 낳은 쌍둥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쪽 계통 자손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장징궈 항목 참조. 장여우보는 미국 유학 후 대만에서 광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진정한 엄친아.

반대 급부로 마오쩌둥의 유일한 손자인 마오신위후덕한 외모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대만과 대륙의 여성 네티즌 사이에선 얼굴로 대륙을 탈환해 달라는 반응도 있다.

정치와는 큰 관련을 맺지는 않지만 장제스의 대만 통치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나타내는 등 장제스에 대해 여타 장씨 가문 인사들과 다른 인식을 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한편 장여우보의 동생인 장여우칭(장우청, 蔣友青)은 모교인 타이베이 아메리카 스쿨에 "교사와 학생을 다 죽이겠다",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일삼은 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8.4. 증손 장완안[편집]


장제스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은 장징궈(장경국)의 비서이자 내연녀 장야뤄(章亞若) 사이에서 난 자식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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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의 본처 장팡량이 장징궈의 친자식으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람에 내연녀의 성을 따라 章씨였다. 후에 장팡량이 죽고 장씨 가문에서 인정받아 2005년 3월에 蔣씨로 성을 바꿨다. 이후 2007년도에 2.28 사건의 최고 책임자가 장제스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오자 명예 훼손이라며 저자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장완안은 2016년 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시 3선거구(중산구, 쑹산구)에서 중국 국민당 후보로 입법위원(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입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수려한 외모와 참신한 이미지 덕분에 인기가 매우 높아 정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의 차기 주자 중 하나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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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的學生及年輕人,無懼港警強力鎮壓,為了捍衛自由與民主,向全世界發聲及吶喊,對於這樣的勇敢,我必須要給予最高的敬意。
                          
在臺灣,一國兩制沒有存在的空間,民主自由憲政體制也不容任何破壞及妥協。政府除了要密切注意並維護在香港就讀的臺生、在港工作的臺灣民眾人身安全,必要時也該提供香港民眾人道救援。
홍콩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 세계에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강력히 지지할 것입니다.
대만에는 일국양제가 있을 곳이 없으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헌법 체계는 어떠한 탄압도 타협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대만 정부는 홍콩에서 유학 중인 대만 학생들과 홍콩에서 일하는 대만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 홍콩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 장완안(蔣萬安, 장만안) 중화민국 입법원 국회의원(중국국민당) 출처

그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위해 뛰쳐나온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일국양제를 거부하는 논평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장제스의 자손이라는 점 때문에 대만 정계에 충격을 몰고 왔고, 해당 글에 대한 댓글중국에서 몰려온 우마오당들은 "장개석 얼굴에 먹칠할 거면 민주진보당으로 꺼져라"등 각종 패드립을 치고 있고, 범록연맹 지지자들도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며 까고 있다. #


8.5. 생전 육성[편집]



군사학교의 사관 후보생을 대상으로 한 연설. 2분 부터는 소련 주재 중국 공사 옌후이칭의 연설이다.


중일전쟁 승전 연설(중 일부)이다. 표준중국어로 하긴 하는데 발음이 영 좋지 않은데 저장성 지역의 방언인 오어를 오랫동안 썼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열혈 중앙집권주의자로 표준중국어를 유일 국어로 밀었지만 본인은 국어가 어색했다. 이는 숙적인 마오쩌둥과 이 둘의 대선배인 쑨원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오쩌둥도 역시 표준중국어만 유일한 공용어로 지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사석에서는 고향인 후난성의 샹어를 주로 썼고 공식 석상에서 표준중국어를 쓰긴 하는데 상당히 서툴렀다. 쑨원의 경우 광동어가 모어이고 정치 활동에 쓰던 주 언어는 영어였다. 참고로 중국어 방언들은 소통이 안 되는 외국어 수준으로 각자 다르다.

타이베이에 있는 중정기념당에서 전문을 재생해 준다.


8.6. 야사[편집]


한국에서 정재계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 가끔 언급되는 장제스에 대한 야사가 있다. 야사에서의 시점은 중일전쟁이 한창일 시기이거나,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국민당 정권을 개혁할 때로 꼽힌다. 야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장제스의 며느리가 밀수 등 심각한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장제스는 며느리의 집을 강제 수색하라고 명하였는데, 집을 수색하자 각종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장제스는 며느리를 불러서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는데,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와 상자를 열자 권총이 나왔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압박을 눈치채고 그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

이 야사는 의외로 오래되었는데, 한때 중화민국 주재 대사를 지냈던 김신의 회고록에서 이 내용의 기반이 된 썰이 나오며, 김영삼도 대통령 시절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면서 김현철에게 이를 언급한 적도 있다. 장제스의 며느리 중 한 명인 스징이(石靜宜, 장웨이궈의 첫 번째 부인 )는 실제로 사치와 밀수 등의 행위 때문에 장제스가 매우 싫어했다. 스징이는 1953년에 사망했는데, 이때 전후 사정이 석연치 않아서 장제스가 스징이를 암살, 혹은 비밀리에 처형했다는 설이 크게 나돌았다. 김신은 아예 회고록에서 이 설을 사실이라고 소개했다. 이 살해설이 앞서 언급한 부정부패 야사로 발전한 것.


9. 갤러리[편집]


군복을 입은 장제스
제복을 입은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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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초상(컬러)
1945년 공군 기지를 방문한 장제스(컬러)
쑹메이링과의 결혼 기념 사진
앉아있는 장제스


10.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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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12월 3일에 걸린 것으로, 지금의 마오쩌둥 초상보다 컸는데, 고작 3년 1개월 만에 내려지게 되었다.

  • 장제스의 사진이 톈안먼에서 내려진 것과 달리 난징 총통부 안의 옛 집무실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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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옛 총통부 건물은 한국으로 치면 도청(道廳)에 해당하는 장쑤 성 정부 청사 등으로 쓰여왔다. 따라서 건물을 제외하면 장제스 및 국민당과 관련된 상징물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정부 기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고 옛 총통부 건물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1990년대 후반 옛 총통부는 태평천국 및 근대 역사 박물관이 되었고, 2003년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초상화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할 때 만든 것으로 장제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저 초상화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여기가 그의 집무실이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물건이다. 가끔가다 대만의 젊은이들이 난징 국민당 청사로 가 청천백일기를 들고 인증샷을 찍기도 한다.

  • 타이베이 북부의 스린(士林)에는 그와 부인 쑹메이링이 국공 내전 직후 후퇴한 1949년부터 26년 동안 거주했던 총통 관저가 있다. 한국에는 청와대 안에 대통령의 살림집(공관)이 있으나, 중화민국은 밖에 있으며, 거기에서 총통부로 출근한다. 현임 차이잉원의 관저는 리덩후이 집권기 때부터 쓰이는 곳으로 총통부와 약 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총통 관저는 1975년 그가 타계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부터 일반에 공원 및 사적지로 개방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공원은 무료지만 관저는 NTD 100달러를 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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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구조로 장제스 부부가 사용했던 서재, 침실, 각종 사진, 소장품, 그리고 외국 귀빈과의 접견실 등이 마련되어 중국 현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한 곳이다.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관저 2층에는 장제스와 쑹메이링 여사의 침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군인 출신인 장제스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기상과 취침 시간이 빨랐던 반면, 쑹메이링은 올빼미 스타일로 밤에도 독서와 취미 활동을 했다. 주로 자수, 그림을 했으며, 관저에 걸린 미술품의 상당수가 쑹 여사의 작품이다. 그래서 서로 취침 시간이 맞지 않았던 점을 반영한 결과다.

  • 오늘날 대만에서는 쑨원과 장제스, 장징궈의 캐리커처 인형을 과거의 적수였던 공산당의 마오쩌둥, 덩샤오핑 인형과 함께 만들어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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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기념당을 포함한 장제스 관련 사적지에서 이런 인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엔 마잉주시진핑의 인형도 추가되었다.


  • 장제스는 살아생전 자신에 대해 교장 선생님이란 호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황푸 군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는데, 이 황푸 군관 학교 시절이 애착이 강했다는 것. 이 호칭에 따라 그는 직계 / 방계를 구분했었다고 한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국립정치대학의 총장(중국어로는 '교장'이라고 한다) 직을 죽을 때까지 겸임했다. 그러니까 장제스는 국립 정치 대학의 '교장 선생님'이기도 했던 셈(물론 실제 업무를 하는 총장은 따로 있었다). 장제스가 아직 기력이 남아있었을 시절에는 국립 정치 대학에 때때로 강연을 나가기도 했던 모양이다. 쑹추위2016년 총통 선거 출마 선언 직후에 대만 TV와의 인터뷰에서 국립 정치 대학에 다니던 리즈시절에 장제스를 강단에서 처음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 여러모로 말투가 굉장히 험해서, 외국 외교관들과의 대화를 아내인 쑹메이링(송미령)이 번역하는 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장징궈가 사실상 후계자가 된 후 쑹메이링은 찬밥 먹는 신세가 되어, 국부천대 이후엔 미국에 거주하게 된다.

  • 유명한 카이로 회담에서 담소하는 장제스 사진은 연출이다. 장제스는 영어를 전혀 못 했고 회담 내내 본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창더 전투의 불리한 전황과 이를 자꾸 캐묻는 미국과 영국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다만 쑹메이링의 활약으로 회담 자체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 1940~1960년대의 전설적인 여배우 이려화(李麗華)의 팬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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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려화가 출연했던 영화 <양산백과 축영태(梁山伯與祝英台 1964년)를 측근들과 함께 여러 번 반복해서 보기도 했었다고 한다. 사진은 1957년 12월 10일에 신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려화 - 엄준(嚴俊) 부부를 초청하여 찍은 것이다.

  • 장징궈의 동생인 장웨이궈(장위국, 蔣緯國)는 원래 장제스의 아이가 아니라 손문의 동지이자 신해 혁명에 참가하였던 다이지타오(戴季陶)가 일본 여자와 관계해서 낳고 키울 수 없어서 맡은 아이로 알려져 있다. 이 아이에게 자기의 성과 항렬까지 준 대인배였고 장웨이궈는 독일 유학파 장교로 강하엽병 장교로 오스트리아 병합에 참가한 바 있다. 일설에는 폴란드 침공 때도 있었다고 한다. 장웨이궈의 혈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장제스의 친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장제스가 고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나 언제 생식 기능을 상실했는지에 대해선 말이 많다. 까지 둔 걸로 봐서는 성관계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씨라는 말도 있는데, 이게 장웨이궈의 일방적 주장이고 장징궈를 엿 먹이려는 의도가 강해서 신빙성이 없는 걸로 판단된다. 장제스가 고자가 된 시기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인 천제루(陳潔如)의 회고록에 나와있는 대로 장제스가 30대 초반에 상하이의 윤락가들을 들락거리다 성병을 옮아 부고환염에 걸려 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성병을 아내에게 옮겨서 천제루까지 불임의 몸이 되었다. 다만 천제루도 장제스가 장제스의 모친인 왕차이위의 불륜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등 신빙성이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해서 수상쩍기도 하다. 어렸을 때 고환을 화로에 데어 그 여파로 고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 무척이나 무뚝뚝하고 웃지도 않고 과묵한 성격으로 젊은 시절 이후로 술, 담배를 끊었다. 중일전쟁 중에는 담배를 조금 피우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내가 살다살다 담배 안 피우고도 오래 사는 인간은 장제스 말고 본 일이 없다"고 50년대에 장제스를 까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런 말이 나올 만한 게 그때는 담배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기도 했고, 마오쩌둥은 장제스와는 대조적으로 하루 50개비씩(2갑 반) 꼬박꼬박 피운 골초였다.

  • 하지만 그와 별개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유명하다.

  • 술, 담배는 물론 차조차도 사치라고 즐기지 않았지만 고향인 저장 성 특유의 생선 요리를 무척 좋아하여 대만에 가서도 저장성 생선 요리를 먹을 때면 생선의 풍미에 대해 얘기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했다 한다.

  • 통치에 있어서는 실정을 저질렀을지언정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지극한 효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고 거의 홀몸으로 온갖 고생을 해가며 장제스와 형제들을 키웠는데 장제스가 군인으로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던 1921년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도 장제스를 배려하여 남편과 합장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장제스는 유명한 풍수학자들을 불러다가 고향 땅의 가장 좋은 명당을 찾아내서 장사 지냈으며 이후 총통의 자리에 오르자 묫자리를 크게 넓히고 아무리 바빠도 매년 어머니의 기일마다 찾아와 제사를 올렸다. 내전에서 패하고 대만으로 가기 직전에도 찾아와 꽤 오랜 시간을 머물다 떠났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묘소를 건들지 말고 보존하라 명령을 내렸다. 문화대혁명 때 묘소는 박살 나고 시신은 꺼내져서 불탔지만, 현재는 대륙에서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묘소도 다시 복원되어 있으며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곳에 가면 '항일 영웅이자 마오쩌둥 주석의 위대한 맞수'라고 그를 표현한 글귀들이 있다.

  • 환빠들 중 상태가 특히 안좋은 일부 환빠들은 장제스가 중일 전쟁 종전 후에 만주족의 본거지인 만주에 치를 떤 나머지 만주를 조선에 양도하려 했지만 마오쩌둥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장쉐량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매도하기도 한다.[3]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주요 연합국 지도자 중에 장제스는 마지막 생존 인물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945년 졸), 조지 6세(1952년 졸), 이오시프 스탈린(1953년 졸), 윈스턴 처칠(1965년 졸), 클레멘트 애틀리(1967년 졸), 해리 트루먼(1972년 졸)에 이은 마지막 사망자. 하지만 중화민국의 몰락으로 인하여 대개 고려되는 경우가 크게 적다. A.J.P 테일러의 2차 세계 대전의 기원에서도 주요 연합국 지도자들을 언급하면서 당시 생존해 있던 그를 빼고 당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지도자들 중에 살아있는 것은 드골과 처칠뿐이며 그중에서 현역에서 정치를 하는 건 드골뿐이라고만 한다.

  • 대만의 고등학교인 젠궈중학(建國中學)이란 학교에선 매년 졸업식 때 학생들이 교내에 있는 장제스 동상을 우스꽝스럽게 꾸미는 전통이 있는데 2019년에는 타노스로 꾸며서 대만에서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이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일 뿐'이라며 학생들을 옹호했다.

  • 국내 남성 잡지 맥심 2020년 9월호 168쪽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방부는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를 중화인민공화국 사람으로 바꿔버렸다.

같은 해 6월, 국방부의 관리를 받는 전쟁기념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도왔던 '중화민국'(현 대만)에 엄청난 외교 결례를 범했다.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이던 장제스를 '광복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소개하면서 국적을 중국으로 홀라당 바꿔버린 것.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기' 대신 그들의 적이자 1945년 광복 전까지 건국되지도 않았던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의 '오성홍기'를 때려 박았거든.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 사진에 일장기를 박아넣고 "위대한 일본인 이순신!"을 외친 수준이다. 온라인 게임하다 만난 중국인에게 "타이완 넘버원!"을 외쳤을 때 분노하는 중국인을 만나본 독자라면 대만과 중국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품는지 잘 알 거다. 그런 대만에 중국 국기를 들이밀었으니... 이 사건으로 국방부는 중화권 언론에서 신나게 조롱을 받야야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국방부가 이와 흡사한 사건을 불과 1년 전에 겪어놓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거다. 2018년, 국방부는 국군 창설 7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국군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웹툰 홍보물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근데 이 게시물에서 중화민국의 국기를 중공의 국기처럼 보이도록 색을 입혀놨던 사건이었다. 이 게시물의 원안인 1940년 광복군 창설식 사진이 흑백이라서 깃발의 색을 몰랐대도 그렇지, 인터넷으로 몇 초만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정보를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도 못 한다는 말인가?

  • 키는 169cm 정도로 추정된다.


11. 한국과의 관계[편집]



11.1. 카이로 회담 및 지원 여부[편집]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국인 후원자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 주었으며 얄타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한반도 문제에서 장제스의 역할은 크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 독립에 관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조차도, 장제스가 카이로에 오지 않았다면, 한반도 문제는 언급될 기회가 적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4]

193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남의사 계열이나 CC파를 통해 지원하였고, 난징 중앙 군관 학교 분교 지원금을 김구에게 보내줘서 이범석 등의 걸출한 독립 운동가들이 나올 수 있었다.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장제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장제스가 생색도 냈고 광복군 창설 당시에는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이라 하여 활동을 제약한 편이라고는 하나,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망명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그것만 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난립하는 지방 군벌과 공산당 때문에 골치를 썩던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군사 세력이 중국 땅에 생기는 셈인데 이 정도도 크게 인심 쓴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한 이유는 한국이 독립하면 한국을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장제스의 원 계획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한국, 일본, 몽골, 베트남, 미얀마, 태국, 인도 등을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임시정부의 조소앙과 미국 정부 측 인사들은 장제스가 이들 나라들을 장차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정황들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장제스가 한반도를 병합시킬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기밀이 공개되었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사

다만 장제스가 장래에 한반도를 병합하려고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관련 연구는 루즈벨트와 미 국무부의 오해로 본다.[5] 사실 중국 입장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도 절대로 일본령으로 내버려둘 수 없는 위치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목적부터가 중국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쓰기 위함이었으니까.[6]

1942년 11월 장제스의 처남이자 외교 부장이었던 송자문(쑹쯔원)이 외교 부장으로 취임하고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만주타이완 섬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고, 조선을 전후에 독립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7월 장제스는 임시정부 간부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 정상들과의 회의에서 합의를 얻도록 "힘써 싸우겠다(力爭)"고 약속했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출발 전에 휘하의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한국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한국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 바로 전날의 일기(1943년 11월 17일)에도 회담의 의제를 기록했는데 조선 독립 항목이 들어가 있고, 의제 전 항목도 국방 최고위에서 제출한 내용과 같았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즉시 한국의 독립을 공동 혹은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는 조선 독립 조항을 위한 교섭 지침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고했다. 회담 중 걸림돌이 발생할 경우의 전략까지 언급했는데 "한국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한국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정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소련 역시도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장제스는 영국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되겠지만, 중국이 독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결국 영국과 미국의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판단대로 흘러갔고 장제스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한 영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에 장제스는 한국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다. 출처


11.2. 이승만과의 관계[편집]


장제스&쑹메이링 부부와 이승만. 1953년 이승만대만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해방 직전에 한국이 해방되면 누가 한국의 대표로 UN에 출석할 것일까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장제스의 처남이자 중국의 외교 부장인 송자문(쑹쯔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나섰던 김구, 이승만, 한길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한길수야 처음부터 송자문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김구는 장제스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씹었고 기분이 상한 송자문은 이승만에 대해 장제스에게 안 좋게 말했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승만은 무시하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김구를 지지했다. 장제스가 김구에게 준 20만 달러의 독립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도 두 사람은 충돌했었다.

이후 기선을 잡은 것은 이승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장제스가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당신처럼 분열이나 조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차라리 마오쩌둥이 훨씬 믿음직하니 앞으로 한반도 문제는 마오쩌둥 주석하고만 논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이에 장제스는 송자문 탓을 하며 이승만을 대형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근데 이 일화에 너무 의미를 둘 것은 없는 것이 대형이란 칭호 자체가 당시 중국에선 굉장히 헤픈 칭호였다. 장제스가 형제 운운했던 사람들 중에선 그와 적이 된 사람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펑위샹이나 리쭝런. 그 둘과도 의형제 결의를 맺고 하하호호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중국에서 유학이나 사업차 인간관계 맺으며 꽌시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중국에서 형님 아우 운운하는건 진짜 그만한 친밀감의 표현이라기보단 캐쥬얼하게 친한척 하면서도 그만큼 거리를 두는 표현에 가깝다.

그래도 1947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 중국 난징을 방문했을 때 장제스에게 직접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지지한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고 쑨원의 중산릉을 직접 방문해서 참배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신탁통치건으로 인한 미군정과의 사이 악화때문에 한국으로의 귀국길이 막히자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귀국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한중화민국대사를 역임했던 사오위린(邵毓麟)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과 달리 장제스는 이승만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의도가 어쨌건 현실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난 결과, 한국을 위성국화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선 물 건너간 소리가 되어버렸다. 한국도 물론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화민국의 남은 영토인 타이완 섬은 거리도 멀뿐더러 한국의 1/3을 조금 넘는 수준의 섬이 영토의 거의 전부인, 한국보다 많이 작은 나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11.3. 건국훈장 수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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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정 기념당에 전시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공헌을 기려서 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그의 부인 쑹메이링, 쑨원, 천궈푸, 천치메이와 같이 임시 정부와 한국의 독립 운동을 도운 중화민국의 정부 요인들에게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6.25 전쟁 때에도 장제스국부군을 한반도에 파견해 한국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이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 의해 거부당했지만 그 대신 정보부대 등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 중심으로 소수의 부대를 파병했다. 여기에는 이를 통해 본토 수복을 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1.4. 박정희 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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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타이베이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오른편의 군복을 차려입은 하얀 수염의 노인이 장제스이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이념적 반공 동맹을 유지하는 우호 관계였다. 대만이 국제 연합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게도 버림받자 박정희 정권도 슬슬 중국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장제스의 애간장을 태웠지만 한중 수교 때까지 한국과 대만은 현실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됐을 때도 후술하는 김신 대만 대사를 통해 미국은 대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 달라고 친필 편지를 보낼 정도로 대만은 미국과 소통하려면 한국의 도움이라도 있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회담에서 이에 대해 물어보자 리처드 닉슨은 "대만은 중국 대륙의 마지막 자유의 보루"라고 대답했고, 이를 듣고 장제스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1.5. 이후 행보[편집]


김구와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고 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안가를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깊었다. 1962년 김신이 공군에서 예편하여 대만 대사로 부임하자 몹시 반가워했으며 김신에게 "나는 자네를 일개 대사로 생각하지 않네.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환대했으며 복잡한 의전을 생략하고 김신과는 정말 가족을 불러올 때처럼 허물없이 자주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장징궈(장제스의 아들)와 너의 의형제와 다름 없지 않냐"라며 상당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장제스는 김신에게 털어놓길, 중국 대륙에서 패배한 이유는 주변에서 좋은 얘기만 하고 안 좋은 국가 상황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라고 후회하며 대만에 고칠 점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거나 자주 대만 내정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김신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정 간섭이라고 말을 자주 피했고 김신에게 뇌물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과묵하고 웃지도 않는 장제스였지만 김신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웃고 떠들었으며 장제스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경호원들이 김신을 데려와서 장제스 기분을 풀어줄 정도였다 한다.(1975년 4월 7일자 장제스 사망을 다룬 동아 일보 기사) 임시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김구의 서거 20주기이기도 했다) 남산 공원에 세워진 김구 동상에는 장제스가 현직 총통 자격으로 보낸 추모 글귀가 조각되어 있다.

1963년 한국에 대흉년이 들어서 긴급히 쌀을 사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의장은 김신 대사에게 대만에서 쌀 5만 톤을 사올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대만에서도 흉년이 들어서 한국에 쌀을 팔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대만 행정원장은 쌀을 팔 수 없다고 김신을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즉각 국무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에 쌀을 팔 것을 지시했다. 장관들이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김신을 쌀 5만 톤을 사서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이에 김신이 장제스에게 감사를 표하자 장제스는 우리가 대륙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까짓 5만 톤이 아니라 55만 톤 정도는 거저로 주었을 것이라고 한국 같은 각별한 나라에게 쌀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고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는 박정희의 손을 잡으면서 "내 나이가 이제 80이 다 되어가니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는 박 대통령이 이으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하자, 한국 정부에서는 당시 국무 총리였던 김종필을 대표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관련 영상

결론적으로는 중국을 통치했을 당시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최대 물주였으며 생색도 많이 내기는 냈지만, 위에 언급된 김구이승만말고도 김규식, 김원봉, 이시영, 이동녕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장제스의 후원을 받아 활동했기에 결론적으로 매우 큰 도움을 받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있어서 일정 부분 공헌을 했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기에도 남한과 대만은 같은 반공을 표하며 동맹으로 지냈다.

한편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대만과 단교하며 한국에 배신감을 느끼는 등, 반한 감정도 꽤 있는 편이며, 문화적 중화주의 면에서는 대륙과 대만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대만 관계 참조. 혹여나 장제스가 세간의 의혹처럼 당초 품었던 속셈 곧 작게는 영향력 확대, 크게는 위성국화가 있었더라도, 2차 대전 후 마오쩌둥에게 쫓겨 대만으로 도주하게 되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에, 결국 정말 한국에 도움만 준 인물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한들 김구-김신과의 관계에 대한 일화들을 보면 김신 개인에 대해 인간적인 진정성도 없진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12. 매체에서[편집]



12.1. 역사서[편집]


  • 장제스의 저서라 알려진 중국의 운명이 1946년에 한국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고서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 1970년대 말부터 대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일본의 산케이신문에서 연재 후 출판한 '장개석 비록'이 있다. 한국에선 1976년,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 6권으로 출판되었으나 2부는 끝내 정발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들어온 것도 옛날에 절판되어서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후 장개석 비록의 주요 필진이었던 후루야 켄지지의 주도로 영어 번역 버전도 나와서 세인트 존스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하였으나 이 역시 현재는 조너선 펜비와 제이 테일러의 장제스 평전에 밀려서 흔적도 찾기 힘들다. 현재도 판매되는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가 장개석 비록의 짭퉁인지라 정히 보고 싶다면 이쪽이 있다. 원래 1986년에 출판되었다가 2014년에 재판되었는데 재판을 대충했는지 곳곳에 오탈자가 많으며 문체나 편집 스타일 자체도 좀 예스럽고 장징궈가 아직도 현 대만 총통이라고 되어 있는 등옛날에 나온 책이라는 티를 좀 낸다. 이후 산케이 신문에서는 마오쩌둥 비록 역시 내놓은 바가 있다.

  • 장제스는 1915년부터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 1917년에 푸젠성 지역의 전투에 휘말리면서 1917년 이전의 자료는 일부 망실되었다.'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 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 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 놓았다.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검열삭제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미국 후버 연구소가 유족으로부터 이걸 빌려와 2006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일기를 공개했다.
장제스가 당대 중국의 1인자였던 만큼 중국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기에 중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부천대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개가 되어있지 않은데 대만 현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부분인 만큼 아쉬움이 남는다.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는 시안 사건 때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체포했지만, 장제스의 일기를 읽어본 후, (항일을 기피하던) 장제스가 아주 애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를 처형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장제스가 집권자였던 시절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한들 절대로 웹 공개를 허락하지 않으며 보고 싶으면 후버 연구소에 열람을 신청하고 다시 후버 연구소가 장제스 유족들에게 허락을 받는 식으로 진행하여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보기 복잡했다. 게다가 이후 저작권 문제가 복잡해져서 장제스의 남은 유족들이 누구 맘대로 일기를 후버 연구소에 기증했냐고 소송을 걸어서 현재는 읽기가 좀 복잡해진 상태다. 즉,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가 힘들다.
한편 1917년 이전의 일기의 일부는 장제스가 쑨원을 따라 광둥성으로 떠나면서 장제스의 은사가 맡아 보관하고 있다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발견되어 용케도 파괴되지 않고[7]

  • 파일:external/www.bluehistory.net/4d500a998656ae8ec92e30b23742a20c.jpg

레이 황 교수가 1930년대과 70년대에 일부 공개된 일기를 바탕으로 <장제스 일기를 읽다>(從大歷史的角度讀蔣介石日記)란 책으로 내놓은 바가 있다. 이 사람은 본명은 황런위(黄仁宇)로 중일 전쟁에도 참전했던 중화민국군 장교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2000년에 타계할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전공은 중국 근현대사는 아니고 명나라 경제사다.
이는 위에 언급한 공개된 일기가 아닌 일기의 공개 이전에 나온 부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레이 황 교수는 2006년의 일기 완전 공개가 있기 전인 2000년에 타계했다. 그래서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역자의 말을 보면 번역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스럽다는 역자의 말이 남아있다. 2004년에 원고를 받았는데 중국어판과 영어판이 너무도 다른 등 번역에 애로 사항이 꽃피어 2009년에야 완성됐다고 한다. 타이완 출판 버전과 미국 출판 버전이 다른데, 미국 버전은 미국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스틸웰-장제스 불화나 카이로 회담 등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한다.

  • 파일:장제스평전.jpg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조너선 펜비 경이 저술한 장제스 평전이 있다. 한국에선 2014년 민음사에서 정발했다. 원서가 나온 시점이 장제스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인데 이를 감안하면 꽤나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이뤄내서 '공정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대 언론 보도나 편향된 일부 자료를 사용하고 사실 관계에서도 일부 오류가 발견되는 등 지금 보기엔 좀 비판점이 있으나 그래도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유일한 장제스 평전.

  • 미국의 외교관 출신인 제이 테일러가 집필하고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장제스 평전(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이 있는데 이건 국내에 정발되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의 책보다도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시도한 책 중 하나다.

  • 대만에서는 장총통전을 비롯하여 장제스를 칭송하는 저작들이 많다. 장제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만 보수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겸하기도 하여 저작의 학문적인 질은 장담할 수 없다.

  • 본토에서는 장제스를 항일 지도자로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장제스 평전이 출간되는 등 장제스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12.2. 창작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참고 문헌[편집]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의 전반적 생애 관련.
  • 중일 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 전쟁 시기와 공업화 관련.
  • 중국 혁명사, 서지영, 한울 아카데미 - 장제스의 농업 정책 관련.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 난징 10년 관련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 - 국공 합작 결렬과 상하이 쿠데타, 펑위샹 관련.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민두기 역.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 출판 삼화 - 초공 작전 관련.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 중일 전쟁 관련.
  • 중일 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 전략, 기세찬, 경인 문화사 - 중일 전쟁 관련.
  • 모택동의 사생활 1~3권, 리즈수이, 고려원 - 반우 운동 관련.
  •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 장칭의 난징 정부 회상 관련
  • 학문의 제국주의, 폴 코헨, 순천향 대학교 출판부 - 서양 학계 시각 비판 관련.
  •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 강명희, 한세 대학교 - 장제스 경제 정책 관련.
  • 1930년대 농촌 위기와 남경 국민 정부의 농업 정책, 아주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 1920~30년대 난징 국민 정부의 농촌 정책: 장쑤 성을 중심으로, 박정현, 고려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14. 관련 문서[편집]



14.1. 인물[편집]



14.1.1. 국민당 계열[편집]




14.1.2. 공산당 계열[편집]




14.1.3. 군벌[편집]




14.1.4. 가족[편집]




14.1.5. 열강[편집]



14.1.5.1. 미국[편집]



14.1.5.2. 일본[편집]



14.1.5.3. 영국[편집]



14.1.5.4. 독일[편집]



14.1.5.5. 소련[편집]



14.2. 사건[편집]




14.3. 단체[편집]




14.4. 기타[편집]




1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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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 역대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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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직 신설

초대

총사령관직 폐지
장제스
(1926년 6월 5일 ~ 1927년 4월 1일)

국민혁명군 역대 제1집단군 사령관
파일: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_Army.svg.png
1집단군 신설

초대

1집단군 폐지
장제스
(1927년 4월 5일 ~ 1929년 1월 22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역대 위원장
파일:800px-Flag_of_the_Chairman_of_the_ROC_Military_Affairs_Commission.svg.png
1대

2대

편견회의로 폐지
왕징웨이

장제스
(1926년 4월 14일 ~ 1928년 11월 10일)

위원회 신설

초대

위원회 폐지
장제스
(1932년 2월 8일 ~ 1946년 5월 31일)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파일:대만 외교부 로고.svg
11대

12대

13대
궈타이치

장제스
(1941년 12월 27일 ~ 1942년 10월 20일)

쑹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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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명은 장중정(蔣中正).[2] 장징궈는 노장인 아버지처럼 소장(小蔣, 작은 장)이라 불렸다.[3] 후술하겠지만 장제스는 한국을 독립시킨 뒤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만들거나 아예 병합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다.[4] 카이로선언의 국제정치적 의미, 최영호, 영토해양연구, p. 72[5] 정병준,2014,315-318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역사비평, 2014, p.315-318 # [6] 한반도는 특히나 자원과 특산품은 없고 부양인구만 많아서 식민지로서도 영 실속이 없는 지역이다. 일제가 그런 한반도를 끝까지 쥐고 있었던건 대륙으로 확장하고 제국주의 열강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7] 장제스 생가와 모친 묘까지 모든 것이 박살 나던 시기에 이 일기가 발견되어 어떠한 문제도 없이 남아있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중국대륙에서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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