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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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초대
제2대
쑨원
위안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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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정부
초대
제2대
제3대
위안스카이
리위안훙
펑궈장
제4대
제5대
제6대
쉬스창
리위안훙
차오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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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정부
육해군대원수

초대
장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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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부 ·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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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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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5대 총통
장제스
蔣介石 | Chiang Kai-shek



[ 지위 목록 ]
중화민국 1~5대 총통
임기
1950년 3월 1일 ~ 1975년 4월 5일
부총통
리쭝런(1948~1949)
천청(1954~1965)
옌자간(1966~1975)
행정원장
옌시산(1949~1950)
천청(1950~1954)
위훙쥔(1954~1958)
천청(1958~1963)
옌자간(1963~1972)
장징궈(1972~1978)
전임
옌시산 (대리)
후임
옌자간
임기
1948년 5월 20일 ~ 1949년 1월 21일
부총통
리쭝런
행정원장
장췬(1947~1948)
웡원하오(1948)
쑨커(1948~1949)
전임
(신설)
후임
리쭝런 (대리)
국민정부 주석
임기
1943년 8월 1일 ~ 1948년 5월 20일
부주석
쑨커
행정원장
쑹쯔원(1945~1947)
장제스 (본인) (1947, 대리)
장췬(1947~1948)
전임
임삼
후임
(폐지)
임기
1928년 10월 10일 ~ 1931년 12월 15일
행정원장
탄옌카이(1928~1930)
쑹쯔원(1930, 대리)
장제스 (1930~1931)
전임
탄옌카이
후임
린썬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임기
1931년 12월 15일 ~ 1946년 5월 31일
전임
(신설)
후임
(폐지)
국민정부 행정원장
임기
1939년 12월 11일 ~ 1945년 6월 25일
주석
린썬
부원장
쿵샹시
전임
쿵샹시
후임
쑹쯔원
임기
1935년 12월 16일 ~ 1938년 1월 1일
주석
린썬
부원장
쿵샹시
전임
후임
임기
1930년 11월 24일 ~ 1931년 12월 15일
주석
장제스 (본인)
부원장
쑹쯔원
전임
쑹쯔원 (대리)
후임
천밍수 (대리)
국민정부 행정원장대리
임기
1947년 3월 1일 ~ 1947년 4월 18일
주석
장제스 (본인)
전임
쑹쯔원
후임
장췬
중국국민당 총재
임기
1938년 4월 1일 ~ 1975년 4월 5일
부주석
왕징웨이
천청
전임
장개석 (본인)중앙집행위원회 상무총회 주석 직함
후임
장징궈당주석 직함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
임기
1936년 5월 12일 ~ 1938년 4월 1일
전임
후한민
후임
장제스 (본인)총재 직함
임기
1926년 7월 6일 ~ 1927년 3월 11일
전임
장런제
후임
우지휘
리시징

본명
蔣中正
장중정 | Jiǎng Zhōngzhèng


蔣介石 | 장개석
장제스 | Jiǎng Jièshí
창카이섹 | Chiang Kai-shek

본관
계구 장씨
출생
1887년 10월 31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저장성 닝보부 펑화현 시커우진[1]
사망
1975년 4월 5일 (87세)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타이베이 스린구, 스린 관저[2]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정부파일:대만 국기.svg 국민정부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직업
정치가, 군인
최종 계급
특급 상장(特級上將)
정당


주요 경력
2대 주석[3]
대리[4]
4대 주석[5]
초대 총통[6] – 복귀[7]
2~5대 총통[8]

[ 정보 더 보기 ]
신체
169cm, O형[62]
종교
개신교 (감리회)
학력
봉록학당
금천공학
용진학당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제1기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산하 진무학교 (중퇴)
난징대학[63] 교장
배우자
마오푸메이(毛福梅, 1번째 부인, 기간: 1901-1921)
야오예청(姚冶誠, 첩, 기간: 1913-1921)
천제루(陳潔如, 2번째 부인, 기간: 1921-1927)
쑹메이링(宋美齡, 3번째 부인, 기간: 1927-1975)
자녀
슬하 2남 2녀
장남 장징궈(蔣經國)
장녀 장젠화(蔣建華)
차남 장웨이궈(蔣緯國)[64]
차녀 장야오광(蔣瑤光)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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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내력
2.2. 출생과 성장
2.2.1. 군관학교 입학
2.2.2. 신해혁명과 귀국
2.2.3. 개명(中正)과 호법전쟁
2.2.4. 쑨원을 모시다
2.3. 쑨원의 사망
2.4. 2차 국공 합작과 중일전쟁
2.5.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
2.5.1. 일본을 몰아낸 항일영웅
2.5.2. 만주 수복 시도
2.5.3. 총통 당선
2.5.4. 몰락의 징조
2.5.5. 몰락에 대한 책임
2.6. 국부천대와 대만 시절
2.6.1. 대만 계엄령과 대만 이주
2.6.2. 실패에서 배우다
2.6.3. 대만의 경험
2.6.4. 철저한 민주주의 탄압
2.6.6. 마지막 총통 취임과 사망
2.6.7. 장례식
4. 사상과 성격
4.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4.3.2. 장제스 정권 분석
6. 이름 표기법
7. 여담
8. 한국과의 관계
9. 매체에서
9.1. 역사서
10. 참고 문헌
12. 갤러리
13. 둘러보기



1. 개요



파일:장제스1.jpg


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중국의 혁명가, 정치가.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의 제2·4대 국민정부주석이자, 헌정 실시 이후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을 역임하였다.

실질적으로 1928년부터 1975년 죽을 때까지 집권한 독재자이자 학살자로도 평가받는다.

그가 젊었을 시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지지만, 군벌의 난립으로 중국이 난세에 빠진다. 장제스는 쑨원 사후 중국국민당의 지도자로 등극한뒤, 국민당의 북벌반장전쟁으로 외형적으론 군벌들을 굴복시켜, 외형상 중국통일을 완성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후 국부천대대만으로 건너간다.

유년기엔 일본으로 유학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1912년 본토에서 제정을 폐지시키는 신해혁명에 가담했으나 손문을 속이고 황제를 선포한 원세개의 축출엔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그곳에서 전전하다 중국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자신만의 기반을 만든다.

이후 스승인 손문이 사망하자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내에서 힘이 강했던 왕정위를 몰아낸 다음 국민당 1인자가 되어 북벌을 감행해 원세개 이후 중국의 마지막 전국시대인 근대 군벌시대를 종식시켜갔고, 최종적으론 봉천군벌[9]의 장학량이 일본의 압박으로 국민당에 투항하자 중국을 다시 통일했으며 법 제정의 통과를 두고 그것에 반대한 염석산, 풍옥상의 반란을 진압해 1인자의 입지를 다졌으나 곧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학량의 만주를 빼앗고 그곳에 전(前) 청나라의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만주국을 선포, 중국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소멸 직전의 공산당을 치기 위해 서안까지 이동하여 국민당군을 지휘하려 했으나 빼앗긴 만주 수복이 아닌 공산당 축출만을 앞장서는 장개석에 반감을 품은 장학량이 그를 감금하여 강제로 항일을 목적으로 하는 국공 합작을 체결시킨다. 곧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고, 일제가 이를 빌미삼아 중국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한다.[10] 낙후된 인프라, 미발달된 농업 국가, 보급의 한계에 부딪혀 화북, 수도인 난징까지 빼앗겨 난징대학살이란 피해까지 겪었으나 약 8년간의 긴 항쟁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여 중국 보존에 성공한다.

한편 국공합작 당시 국민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공산당은 중일전이 끝나자 마자 다시 내전을 재개해 국민당을 공격했다. 이전 중일전쟁의 후유증과 여러 개혁정책의 실패로 인한 민심 하락은 국민당을 약화시키게 했고 공산당에게 처참하게 밀리는 모습을 본 미국마저 지원을 중단하기까지 이른다. 서서히 대륙을 상실하자 마지막엔 대북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본토 수복을 꾀한다. 하지만 수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대만으로 이동한 후 자신에게 반발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해 자신의 독재를 강화했다.

비록 커다란 대륙을 잃고 국가적 위신마저 실추당하기까지 했으나 본토 수복과 명(命)을 보존한 국민당의 발전을 위해 경제 성장, 문맹 퇴치, 부정부패 척결을 실시, 성공했고 대만을 용(龍)의 반열에 올리기까지 하는 대업을 이루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대만을 통치하던 장개석은 1975년 89세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한 항일 영웅 또는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 심각한 부정부패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대륙을 중국공산당에 뺏긴 무능한 지도자,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학살자라는 다양한 평가가 공존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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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가 진정 민중이 주체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다 바쳐 주권이 민중한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로써 민권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 중정기념당 장제스 동상에 새겨진 문구



2.1. 내력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4대가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집안의 전승에 따르면 장제스는 주공단의 3자 백령(白齡)의 후손이며 저장성 펑화현으로 이주한 것은 13세기의 일이라고 한다. 이후 17세기에 장제스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곳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는데 명, 청 교체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원인이 된 듯하다. 그의 아버지 장조총(蔣肇聰)[11]태평천국의 난 시기에 가산을 모두 소실했음에도 가업인 소금 도매업으로 몇 년 만에 재기했을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제스는 1894년 12월, 일찍 아버지를 잃은 후로 삼촌들의 농간으로 인해 유산을 받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과부란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10살 때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고 저항하는 장제스 일가에 대한 부패한 관료들의 보복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이때 장제스의 어머니가 세금(사실상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 왕채옥(王采玉)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일찍 사별한 충격으로 잠시 비구니가 되기도 했던 여자인데 22세의 나이로 45세의 장제스의 아버지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았는데다가 남편을 잃고 나서는 생계를 위해서 다른 지방으로 떠났는데 이방인이란 이유로 백안시를 당했다.

관리들이 장제스를 감옥에 넣었던 것은 그의 일가가 타향 출신이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었다.[12] 그러나 그녀는 홀로 장제스까지 2남 2녀를 키우면서도 일상 예절, 신체 단련, 위생 상식, 가사 노동 등을 가르쳤으며 자녀들을 사숙에 보내기에 힘썼는데 이러한 교육은 장제스가 평생 엄격한 생활을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2.2. 출생과 성장


할아버지 장사천(蔣斯千)[13]이 지어준 아명은 상서로운 시작이란 뜻의 뤼위안(서원 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 학명[14]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 본명 지청(志淸). 그리고 존경의 의미로 선총통 장공(先總統 蔣公)[15] 그래서 대만에서 F-5 전투기를 라이선스 생산할 때 별명을 중정호라고 붙였다.

한편 장제스는 6세부터 16세까지 고전 교육을 받았고 17살에는 고향 계구진(溪口鎭)을 떠나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각지의 스승들에게 고전을 강의받았다. 이후 1902년에 동자시에 응시하지만 무질서와 부패에 실망하고 과거 시험에 대한 미련을 끊고 만다. 이후 1905년에 쑨원에 대해서 최초로 인지하고 혁명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군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 1906년, 장제스는 도일하지만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가 있어야만 군사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일본어만 공부하고 다시 귀국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다녔던 학교는 캉유웨이가 세운 청화(淸華) 학교였다고 한다.


2.2.1. 군관학교 입학


이후 귀국한 뒤에 어머니를 설득한 후 통국육군속성군관학교(通國陸軍速成學敎) 1기생으로 입학하며,[16] 졸업 후[17] 좋은 학업 태도와 성적을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의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입학한다.[18] 그 시기에 그는 혁명의지를 보이기 위해 변발을 잘라 집에 보내는 선전 포고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이후 1909년 중국 동맹회에 입회하며, 같은 저장성 출신인 중국 동맹회 간부인 천치메이(진기미)로부터 호감을 얻고 그의 정치적 제자이자 심복이 되었다. 이후 1910년 진무 학교를 졸업해 니카타현 다카다시 야전 포병 13연대의 견습 사단으로 배치되었다.


2.2.2. 신해혁명과 귀국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해혁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1년 8월, 진기미와 장제스는 혁명이 발생할 경우의 전술 등을 공부하는데 이것은 신해혁명이 성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한 봉기가 성공하자 장제스는 자신이 탈영병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군복과 군도를 학교에 소포로 부친 다음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천치메이를 도와 항저우 봉기의 결사대를 지휘해 이 공으로 2사단 5단(연대)장이 된다. 이후 천치메이의 후원으로 일본에서 군사학을 공부하며 독일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전제화에 반발하여 반년만에 귀국하게 된다.

한편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이었던 천치메이는 장제스에게 황진룽(황금영), 두웨성(두월생), 장소림(장샤오린), 장런제, 다이지타오, 천궈푸, 천리푸 등을 소개해 준다. 황진룽, 두웨성, 장샤오린 모두 상하이 암흑계의 3대 대부이며, 특히 두웨성은 청방의 수장이자 그의 비밀 후원자였다. 장징강은 상하이의 거부이자 국민당의 원로로 그가 당 총재가 되게끔 만들어 주었다. 다이촨셴은 장제스와 의형제를 맺어 훗날 중화민국 고시원장 직을 역임한다. 천궈푸와 천리푸는 천치메이의 조카들로 장제스의 충복이 되어 국민당 조직부, CC단, 중앙 조사 통계국(남의사(藍衣社)를 의미한다) 등의 수장이 되며, 중화민국 4대가족인중 진씨(천씨) 일가를 이루게 된다.[19]


2.2.3. 개명(中正)과 호법전쟁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법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또한 1913년경에는 그 동안 사용하던 이름 지청(志淸)을 버리고 이름을 중정(中正)으로 개명한다. 또한 필명으로 사용하던 개석(介石)은 자(字)라고 사용한다.[20]

천치메이에 대한 장제스의 충성심은 대단히 높았고 천치메이의 정적인 타오청장(도성장)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병원에서 쏘아죽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측근들은 타오청장이 장제스를 죽이려고 해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상식적으로 병원에 혼자 있는 사람이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 하겠는가... 여하튼 이후 장제스는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하자 천치메이와 함께 계축전쟁에 참여해 상하이 제조창을 공격했으며 이후 여러차례 봉기했지만 실패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중화제국의 황제가 되려 하자 차이어, 량치차오가 봉기하면서 호국전쟁이 발발했고 천치메이와 함께 호국전쟁에 투신하여 위안스카이 타도에 나섰다. 이후 1916년 5월 천치메이가 위안스카이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자 좌절하여 3년동안 상해 암흑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32세의 나이로 14세의 천제루를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한였고 쑨원의 호법운동에도 참가하여 천중밍과 함께 호법전쟁에 참전했으나 천중밍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주변의 견제로 사직과 복귀를 반복하였다.


2.2.4. 쑨원을 모시다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2차 호법운동

이후 1920년 쑨원(손문)이 2차 호법운동을 이끌며 광동에 자리를 잡자 장제스는 쑨원을 따라 광동으로 가며, 곧바로 쑨원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쑨원을 이상론자라고 비웃는 천중밍과 노선 차이로 자주 마찰을 빚었고 또 다시 상하이와 고향 광저우를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22년 광동 군벌 천중밍(진형명)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총탄과 포화가 난무하던 시내를 뚫고 쑨원과 제2차 호법군 정부가 피신해 있던 군함 융펑[21]에 승선하여 쑨원을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이 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류전환, 양시민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의 도움으로 천중밍을 축출하고 광저우를 다시 정복하여 정처없이 떠돌던 국민당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2.5. 1차 국공합작 시기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1차 국공합작

천중밍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대본영 참모장을 위시로 여러 군사적 중책을 맡으면서 쑨원의 신임을 확고히 받게 된다. 장제스는 상하이와 광저우를 오가면서 혁명 사업에 투신했고 쑨원의 명령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 레프 트로츠키와 만나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쑨원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해주지 않는다고 자주 불만을 표출하며 상하이나 고향인 시커우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자주 했고 이때마다 쑨원은 장제스를 달래야 했다. 이 시기 미하일 보로딘이 쑨원의 고문으로 국민당에 합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1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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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6월 16일, 황푸 군관 학교[22] 개교일. 쑨원 등과 함께)

이후 소련 유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황푸 군관 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국민당의 당군인 국민 혁명군 양성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장제스는 점차 국민당의 실력자가 된다. 이후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상단군(商團軍) 제압과 천중밍의 군대 괴멸, 군민재정 통일선언에 반발한 전계군벌 양시민(楊希閔)과 계계군벌 유진환(劉震環)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들을 격파해 광주 위수 사령으로 임명, 광저우의 실력자가 된다.


2.3. 쑨원의 사망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쑨원이 죽었다. 한국에선 장제스가 쑨원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쑨원은 장제스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일이 없고 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과 경쟁하면서 쑨원의 후계자 자리를 쟁취했다. 쑨원에게 장제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측근 심복 정도의 위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동정을 지휘, 광저우를 탈환하려는 군벌 천중밍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장군으로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었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쑨커의 태자파, 왕징웨이와 후한민의 당권파, 국민당 원로들의 노동파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지지하며 당권파에 몸을 담고 있었다.

이후 양시민, 유전환 등이 중앙의 말을 듣지 않고 반기를 들자 대원수 대리 후한민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 이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듣지 않고 광저우를 점령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장제스는 쉬충즈와 함께 이들을 토벌하여 이들의 패잔병과 무기들을 흡수하여 국민당의 병력을 통일시켰다. 이 시기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매우 심하였고 특히 소련의 지원을 입은 좌파가 강성하여 당내 우파는 물론, 주변의 군벌들과 열강 세력의 우려를 사고 있었다. 놀랍게도 장제스는 이 시기에 좌파에 속했다. 장제스는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특별위원회에 참가하여 암살 사건을 수사했고 월군사령관 겸 군정부장 쉬충즈를 숙청하고 그의 군사력을 흡수하면서 최고의 군사실력자로 성장했다. 또한 국민당의 2차 동정을 통해 최후의 발악을 가하던 천중밍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국민혁명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왕징웨이, 보로딘을 이은 국민당의 3대 거물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정'을 통한 하이난 섬과 광둥 지역의 확보로 군사적인 업적도 드높아졌다. 이 시기 중국의 여러 청년 엘리트들이 잇달아 국민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의 좌우 대립은 사그라들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 끓고 있었다.


2.3.1. 왕징웨이 제거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중산함 사건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밀월 관계이던 왕징웨이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의 커넥션을 의심했고 국민당 우파는 장제스를 좌파 똘마니로 보았다. 게다가 새 소련 고문인 쿠이비셰프가 장제스보다 왕징웨이를 지지하자 장제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다시금 소련을 방문하여 이 위기를 타개하려다가 소련에 간 사이에 실각할 점을 두려워하여 취소하기도 했다. 장제스를 지지하던 보로딘이 펑위샹과 회동하러 자리를 뜨자 장제스는 보로딘이 자신이 아니라 펑위샹과 연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즉각 자신의 권력 기반인 황푸 군관 학교를 정비하며 선제적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3월 18일, 중산함 사건에서 국민당 좌파의 장제스 납치 음모(?)를 뒤엎으면서 국민당 정부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후한민(호한민), 왕징웨이(왕정위) 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쑨원의 후계자이자 국민당군의 지도자로 오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는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친소련, 친좌익 성향이었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저우언라이의 귀뜸도 무시하고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민족이 아니라 소련에 충성한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소련 고문들을 추방했다. 이로써 기존의 서산회의파와는 구분되는 신우익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2.3.2. 국민혁명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국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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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우한에서 사열을 거행하는 장제스

1926년 7월 장제스와 국민당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우페이푸, 장쭤린 등을 잇달아 격파하고 우한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자세한 것은 국민혁명 참조.


2.3.3. 4.12 정변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4.12 상하이 쿠데타


허나 국공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장제스가 자신을 공격하는 소련 고문 보로딘 해임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우한 정부는 장제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를 숙청하려고 했는데 이에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직후인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23]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독자적인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우한 국민정부와의 내전에 돌입할 뻔 했으나 북양군벌과의 싸움 때문에 잠시 우한과 협력하여 북벌에 나섰다.

이후 우한 정부에서도 마일사변, 경제위기, 펑위샹의 분공요구, 코민테른의 5월 지시 등을 이유로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우한과 난징의 통합이 논의되었는데 우한에서는 통합의 조건으로 장제스 하야를 완강하게 요구했고 옛 동맹인 광서파가 이에 호응하자 장제스는 하야했다. 이후 우한과 난징의 통합인 영한합작이 이루어졌으나 당계전쟁,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 등의 내부 분열 끝에 장제스를 다시 추대하기에 이른다.


2.3.4. 장제스-다나카 회담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다나카 회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장제스는 하야한 시기에 일본 유학을 떠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하는 등 일본과의 합작을 추구하는 한편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제루와 이혼, 쑨원의 처제이자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쑹메이링(송미령)과 결혼하였다.[24] 이후 탄옌카이 등 국민정부 요인들의 빗발치는 요청과 경쟁자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통해 1928년, 장제스는 드디어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한다. 1928년 행해진 2차 북벌에서 장제스는 장쭤린의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등극하는데 성공했다. 만주로 퇴각하던 장쭤린은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장쉐량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합류한다.


2.3.5. 봉소전쟁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봉소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북벌 완료 직후인 1929년, 소련의 침공을 받던 시기에 인터뷰하는 장제스쑹메이링. 장제스는 쑨원과 국민정부의 정치 이념인 삼민주의의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쑹메이링은 삼민주의 하에서 증진될 신중국 여성의 권리에 대해 설명하였다. 두 명 모두 카메라를 앞에 두고 상당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장제스는 왕정팅의 통역을 거친 반면 미국에 살았던 쑹메이링은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3.6. 편견회의 개최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편견회의

북벌이 완료된 후 장제스는 경제개발과 내부 안정화를 위해 편견회의를 개최하여 군벌들의 군사력 감축을 논하고 정치분회 폐지를 통해 권력을 중앙정부로 집중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펑위샹(풍옥상), 옌시산(염석산), 리쭝런(이종인) 등의 군벌 실력자들은 반대할 명분이 없어서 군사력 감축안에 마지못해 동의했으나 실행을 놓고 결국 반발하였다. 또한 장제스가 각 지방 정치분회를 폐지하여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려 하자 제일 먼저 계계군벌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노척평을 무단해임하는 호남 사건을 일으키면서 중앙에 반기를 들었다.

장제스는 이를 온화하게 처리하려 했으나 결국 1차 장계전쟁으로 번졌고 1차 장계전쟁을 진압하자 이에 분노한 펑위샹이 1차 장풍전쟁을 일으키는 식으로 반란은 계속 확대, 1930년 중원대전으로 발전했다. 장제스와 반장 측 모두의 러브콜을 받던 장쉐량은 결국 봉천군을 이끌고 장제스 편에 가담함으로 장제스의 우세를 확고히 해주었다. 장쉐량의 도움을 받은 장제스는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1인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3.7. 탕산 사건제3차 초공작전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초공작전


1931년 2월, 후한민과의 의견충돌로 그를 감금하는 탕산 사건을 자행하고 7월, 제3차 초공작전에 나섰지만 광동파, 광서파, 개조파, 서산회의파의 합작으로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1차 양광사변이 발생했다. 이는 갓 통일된 중화민국의 남북내전으로 발전할 뻔 했으나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

장제스는 광저우 국민정부의 요구에 따라 1931년 12월 하야했으나 후임인 쑨커가 한달 만에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사퇴하면서 1932년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군사위원장으로 복직하였고 왕징웨이는 행정원장이 되어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다.


2.4. 2차 국공 합작과 중일전쟁



2.4.1. 처참한 실패



군벌의 세를 꺾는 데 성공한 장제스는 이를 갈아오던 공산당 토벌을 위해 1930년 겨울 초공작전을 시작하지만 국민혁명군의 한계와 군벌들의 비협조로 오히려 공산당에게 막대한 무기 지원만 해주는 꼴이 되었다. 1930년 12월의 제1차 초공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1931년의 제2차 초공작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장제스는 기존의 전략을 재고하는 한편 정치공작을 강화하고 한스 폰 젝트를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초빙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도로와 공장을 건설하여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력을 뒷받침했다. 이 때문에 초반의 지리멸렬한 패주와 달리 1932년 제4차 초공작전에서는 일부 소비에트의 분쇄에 성공하였으며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공산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근거지에 쫓겨난 공산당은 유명한 대장정의 길에 올랐고 한때 수십만에 달했던 홍군이 옌안에 겨우 새 근거지를 마련했을 때는 3만 명이 조금 넘는 수로 몰락한 후였다.


2.4.2. 복건사변2차 양광사변



이 과정에서 독일 고문 오토 브라운, 28인의 볼셰비키, 장궈타오 등이 몰락하고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1인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이 '붉은 심장병'이라 불렀던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해 최후의 공세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투입되었던 것이 만주 사변으로 본거지에서 쫓겨난 장쉐량과 토비 출신의 북방 군벌인 양후청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초공 작전은 공산당과 토벌과 더불어 군벌 세력 약화를 겸하고 있었는데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앞세우는 한편 중앙군을 군벌 영지에 보내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군벌들이 이를 좋아할 리가 없었고 운남군벌 룽윈을 비롯한 많은 지방 군벌이 공산당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태업 행위를 한 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복건사변, 2차 양광사변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2.4.3. 장쉐량의 배반과 시안 사건



만주 사변으로 인해 자신의 근거지에서 쫓겨나면서도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했던 장쉐량은 아예 초공 임무를 띠고 왔기 때문에 태업을 할 수도 없었고 태업을 하면 자신의 근거지와 더 먼 푸젠으로 쫓겨날 처지였기 때문에 대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국 장쉐량 등은 "빈대를 잡으려다가 군벌 자신들의 세력을 모두 날려먹는" 초공 작전에 반발하여 비밀리에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 접촉한다.

장쉐량은 101세로 죽을 때까지 시안 사변 직전에 공산당과 어떤 접촉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친국민당적 역사관을 가진 자들은 이 때 장쉐량이 공산당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본다.

마침내 1936년 12월 12일,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점검하러 시안으로 온 장제스를 장쉐량이 연금하는 서안 사건이 발생한다.[25] 결국 그는 장쉐량의 "공산당과 화해하고 일본을 물리치라"는 요구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풀려난다.

시안 사건은 일종의 쿠데타였으며, 장쉐량은 본래 장제스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나, 그가 죽으면 중국의 대일 항전 능력이 붕괴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의 발빠른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자신의 요구 조건에 동의하자마자 그를 풀어주었다. 장제스는 풀려난 즉시 항명을 이유로 장쉐량을 체포하여 난징으로 함께 돌아갔지만 장쉐량의 목숨만은 살려주었고, 훗날 대만으로 함께 도망간 장쉐량은 거의 죽을 때까지 연금 신세를 당해야 했다. [26]


2.4.4. 2차 국공합작의 실현



어쨌든 내키지는 않지만 2차 국공합작은 실행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 독일 국방군 장군들을 초빙,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을 조직하는 한편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강력한 독일식 중앙군을 양성하고 이탈리아와 미국의 협조로 공군을 양성했으며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아 상하이, 난징 등을 공업화하여 비행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중국이 건실한 국가가 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장제스의 권력도 약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후한민 체포에 반발한 국민당의 광둥 파벌, 1차 상하이 사변에서 활약한 19로군이라거나 광시 군벌 리쭝런, 바이충시, 광둥군벌 천지탕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2.4.5. 일본의 침략



1931년 만주 사변을 획책하여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강탈한 일본은 러허 사변으로 만리장성 쪽으로 자꾸 영토를 확장하며 중국을 갉아먹고 있었다. 장제스는 힘이 부족하니 힘을 길러 나중에 맞서겠다는 방침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양측의 긴장은 노구교에서 폭발(노구교 사건), 스기야마 하지메를 비롯한 일본의 주전파들이 폭주하면서 중일전쟁을 발발시키고야 만다. 결국 장제스는 기존의 방침을 포기하고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선포하였다.

장제스는 초반의 전략적인 실수로 화북과 동해안의 핵심 공업 지역을 모두 잃고 충칭(중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물자 부족과 왕징웨이를 비롯한 거물들의 배신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의 정신적 지주로 군림하면서 8년에 걸친 기나긴 항일 전쟁을 지도하여 마침내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이 대륙에서 붙잡아둔 일본군은 관동군을 합쳐 총합 410만으로, 필리핀, 뉴기니나 그밖의 섬에 전개한 일본군 전체의 몇 배에 달했다. 이 병력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로 동원되었다면 미국도 상당한 희생을 각오했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장제스는 처형이자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송경령)과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장제스는 쑹칭링이 소련에 가 있는 도중에 소련에서 새 애인"들"을 만났다고 하는 등의 날조 기사를 퍼트리고 쑹칭링은 장제스가 5천만 달러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로 대응할 정도였다. 이유는 국공 합작을 지지한 쑨원의 노선에 대한 장제스의 반감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장제스를 푸른 수염 같은 자라고 부르며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결혼하려 할때 펄쩍 뛰며 만류했지만 쑹아이링, 쑹메이링의 뜻이 확고해 물러선 것이며, 더구나 쑹칭링은 그 당시 국민당의 독재 정책과 공산당 탄압에 반기를 들었다. 1935년 이후 쑹칭링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 신청을 하는 등 친공적 행동을 보여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2.5.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



2.5.1. 일본을 몰아낸 항일영웅


8년 간의 전쟁 끝에 장제스는 2300만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침략자인 일본군을 물리치고 중일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얻었으며,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의 점령지는 물론 그 전에 빼앗긴 만주, 내몽골, 대만을 반환받았다. 그리고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꿰어찼다. 국제연맹에서는 일본이 상임 이사국이었고, 국력에서도 일본은 중일전쟁 때 여러 면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이걸 다 뒤집어 엎었다.

그랬기에 여러 삽질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 시점까지의 상황은 장제스에게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와 국민당 내부의 시기상조란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국공내전을 재개하여 만주 깊숙히 진군하여 하얼빈까지 공산당을 몰아붙이면서 통일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어정쩡한 공세와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이 그에게 화를 불러왔다.


2.5.2. 만주 수복 시도



그가 미국의 마셜 장군의 사실상 강압적인 정전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계속하려 했던 것은 만주가 당시 중국 최고의 공업 지대였기에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장제스는 공산당과 화합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지 않는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분노한 마셜과 트루먼은 만약 장제스가 진군을 멈추지 않으면 중국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5억 달러의 차관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물주의 압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46년 6월 7일 마셜의 개입으로 장제스가 진격을 정지하고 정전 명령을 내린 사건은, 그 역시 이후 자신 일생의 최대 실수라고 회고할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바로 전날 6월 6일 린뱌오가 하얼빈의 포기를 건의할 정도로 중공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정전으로 인해 중화민국군 내부의 전력 이동 정지[27]까지 겹치고...OTL

하지만 국민당군은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중일전쟁 당시의 전투 의지는 사라진 상태였고 보급선과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고 너무 마구잡이로 진군하여 반격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붕괴되기 딱 좋은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탄탄히 다져놔야 할 후방 정리가 전혀 안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군벌들을 때려잡기 시작하면서 장제스의 중앙군을 제외한 군벌군의 대오들이 잇달아 붕괴되기 시작했다. 만주 일대의 주민들을 징병해 병력을 보충하고 소련군이 넘겨준 일본군 무기로 대거 무장을 하면서 오히려 전력이 강화된 공산당은 린뱌오군이 만주에서부터 반격을 개시했고, 이어 패퇴하면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던 펑더화이, 천이가 지휘하던 다른 방면군들도 일제히 반격을 하면서 전세를 뒤집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선양, 랴오양 등지에서 국민당군은 참패했고 쉬저우 전역에서는 정면 대결에서도 완전히 패주하고 말았다. 이에 고립된 부작의가 베이핑에서 항복하면서 공산군에게 막대한 인력과 무기를 넘겨주어 공산군 숫자를 4백만명으로 늘리고 말았다.


2.5.3. 총통 당선



장제스는 1948년 헌정을 실시,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총통에 당선되었으나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1949년 신년사에서 공산당에 화평을 제안하는 한편 1949년 1월 21일 총통 직을 사퇴하고 부총통 리쭝런을 총통 권한 대행으로 두었으나, 진짜 목적은 서남부 일대에서 대규모 징병을 할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은 평화 협상을 하면서도, "전범 장제스를 넘겨야 협상에 응하겠다"고 요구했는데, 이는 국민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공산당은 4월 20일 장강 이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만약 국민당군이 장강을 중심으로 철통같은 방어를 고수했다면 해군, 공군이 압도적인 국민당군에게 승산이 높았겠지만, 화북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전력의 손실이 너무 컸으며 장제스의 군벌 약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홍군이 진격을 재개하자 장강의 방어 병력들이 집단으로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허망하게 방어선이 무너졌다.


2.5.4. 몰락의 징조


그리하여 공산당이 장강을 건너 오자마자 난징상하이를 비롯한 국민당의 주요 도시는 모두 공산당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다. 국민 정부는 임시 수도인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2일 내륙의 옛 임시 수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11월 29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청두로 다시 이동했으며, 12월 7일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장제스는 쓰창(西昌) 대본영을 순시하고 돌아온 후 12월 10일 타이베이로 떠났고, 이후 두 번 다시 대륙 본토로 돌아오지 못했다.


2.5.5. 몰락에 대한 책임


이렇게 당초에 장제스가 압도할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 것에는 내부적인 요인도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물가통제 실패였다. 8년간의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산업시설들이 파괴되었고, 상당수의 지역이 황폐화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재건이 필수였지만 장제스 본인은 당장 경제와 인프라를 재건하기보다는 공산당을 몰아내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 내전을 재개한 이후로는 재건작업은 뒷전이 되어버렸고 전비충당을 위해 화폐발행을 남발하면서 물가가 다시금 급속히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공무원들이나 노동자들은 월단위가 아닌 일단위나 심지어 현물로 봉급을 받을 정도로 경제상황이 매우 궁핍해졌으며[28] 이는 장제스에 대한 민심을 크게 악화시켰다.

장제스측도 초인플레이션의 심화로 민심이 악화되어나가자 물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8년에 화폐개혁을 시행했지만(재정경제긴급처분령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화폐개혁도 결국 실패로 돌아섰고 이는 국민당과 장제스의 지지기반 상실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이렇게 장제스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어가면서 중국공산당으로 민심이 쏠려버렸고, 공산당군이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이기면서 국민당군은 맥없이 패배해버리고 말았던것이었다. 이렇듯. 장제스 본인에게도 경제기반 재건 대신에 섣불리 공산당을 제거하려는 쪽을 택하다가 경제난으로 지지기반을 산산조각 내버리면서 패배한 것은 너무도 뼈아프게 다가온 경험이었고, 이후 꽤나 오랜기간 동안 대만의 경제정책이 고금리 위주로 돌아갔던 것도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의 악몽 때문이었다.


2.6. 국부천대와 대만 시절



1957년 열병식에서 중화민국군을 사열하는 장제스


1958년, 본토 수복을 준비하는 중화민국군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부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6.1. 대만 계엄령과 대만 이주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대만 계엄령

결국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대만 계엄령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기반으로 본토 수복을 위한 철권 통치에 들어간다. 그는 국공내전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통에서 사퇴한 상태였지만 그 시기에도 실권자는 장제스였고, 결국 1950년 1월에 총통직에 복귀한다.


2.6.2. 실패에서 배우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의 패배 원인을 부정부패 척결 실패와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 정착같은 사회정책의 부재, 3000%대의 초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난 물가상승 억제 실패에 있다고 보면서 중국 통치시절과는 다르게 대만 시절에는 사회정책과 부패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29] 우선 대륙 시절에는 부패가 매우 심해서 미국이 지원을 가망이 없다고 보면서 지원을 중단한데다가,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 도입이 지지부진하여 문맹률은 1949년도에 80%에 달했고 결국 중공이 문맹퇴치를 위해서 간화자 도입을 단행해야 했던데 반해, 대만 시절에는 토지개혁을 전격적으로 시행하고 복지예산과 교육예산도 어느정도 확충시키면서 이미 1963년도에 9년제 의무교육 제도를 시행했으며 고금리 정책과 쌀, 밀가루, 돼지고기, 닭고기 같은 기초 식료품 가격 안정조치로 물가상승률을 한자리수로 안정화시켰고, 저축률도 늘렸으며 부정부패척결도 어느정도 단행했다.[30]


2.6.3. 대만의 경험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또한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제계획정책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중소기업과 국영기업 중심으로 경제성장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큰 성과를 내면서 대만은 1950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연 평균 8%대의 고도경제성장을 누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비교적 빠르게 향상되었으며, 빈부격차도 영미권이나[31] 한국에 비해서 크게 낮아졌다.[32] 이를 타이완의 기적(혹은 경험)[33]이라고 불렸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다. 당시 중국이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으로 경제/사회적인 혼란, 침체가 극심하여 대만과 중공은 큰 대조를 이루었다.[34] 이러한 대만에서의 경제 발전은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이 국공내전 패퇴 후에도 본토의 공산정권에 대한 체제 우월성, 본토수복 노선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2.6.4. 철저한 민주주의 탄압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28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하지만 장제스는 타이완 내부에서 제기되는 분리 독립, 민주화 요구 등의 주장을 모두 강경하게 탄압했고,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는 철저하게 거리가 먼 독재자였다. 1950년대에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만 4천명에 달했고, 호적상에는 있는데 행방불명되거나 처벌을 받은 사람이 14만명이 넘었다. 또한 중화민국 실효 통치 지역 전역에서 10개의 정도의 강제 수용소가 존재하였으며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게임으로 반교 -Detention-이 있는데 마치 대한민국의 독재정권 시절 반정부 인사를 사회주의자로 몰아가 제거하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정적과 재야인사에 대한 탄압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장제스에 대해서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지만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도 있고 중국에 대한 견제도구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점도 있기에 미중수교 이전까지 타이완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었다.


2.6.5. 권토중래 시도


장제스는 중국이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으로 잇달아 혼란을 겪고, 외교적으로도 중국과 소련간의 사이가 소원해지자 미국의 지원을 통해 권토중래를 노렸다. 실제로 스파이들을 중공으로 보내봤지만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을 겪는 와중에도 중공의 안보는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되려 반격만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장제스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물론 당대 중공의 민심을 보았을 때 비록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공산당에 대한 실망감이나 반감이 커지던 상황이라서 전면전을 벌일 때 대만에게도 일단 승산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장제스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너무도 작았기 때문에 출혈이 만만치 않았던데다가, 미국이 중공이 아무리 혼란을 겪었다 한들 세계 최대의 인구대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막대한 인적자원과 예산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 중국과 소련간의 관계가 나빠지는데 소련 견제용으로 중국에 접근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는 실용적인 일이었던지라 미국은 장제스가 중공과 전쟁을 벌이자고 할때마다 이를 반려했다. 결국 미중회담이 성사되며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된 반면 대만은 상임이사국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UN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탈퇴당하는 굴욕을 겪었으며, 이후로 대만은 UN 가입을 시도만 하는 안습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장제스는 권토중래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았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도 타이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6.6. 마지막 총통 취임과 사망



중화민국 정부가 UN에서 축출된 이듬해인 1972년 5월, 마지막으로 총통 취임식을 거행했다. 당시 취임식은 TV로 생중계되고 있었는데, 장제스가 부총통 옌자간이 마주보는 장면에서 "형님, 안됐습니다(大哥, 不好了)!"라는 자막이 등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방영되고 있던 대만의 TV 드라마에 나온 대사였고, 당연히 방송 사고였지만, 생방송 중에 나온 것이어서 불길한 장면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5년,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한편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중국을 구하라'로 말했다는 설이 있다.[35] 공식적인 유언은 장제스가 사망하기 6일 전인 3월 29일 구술하고, 사망 직후에 발표된 "나는 상투를 자른 이래, 총리(쑨원)의 혁명을 쫓아 살아왔으며, 총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도로서 있지 않은 적이 한시도 없었다", "나의 죽음에 실망하지 말고 삼민주의를 실천하고 대륙의 국토를 수복하라" 등의 내용인데[36], 이 유언은 오늘날 중정기념당의 대형 장제스 동상 아래에도 조각되어 있다.


2.6.7.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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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의 장례식은 국부 쑨원을 모신 타이베이 국부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준비하던 미국은 장례식에 농업부 장관을 대표로 보내려다가 중화민국의 항의를 받고 넬슨 록펠러 부통령을 보냈으나 불과 4년 후에 미국은 단교하게 된다. 1972년 중국과 수교한 일본에서는 전임 수상인 사토 에이사쿠,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거물급 정치가들이 조문을 왔으나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모두 우인 대표라는 애매한 명칭을 쓰고 참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대한뉴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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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 장제스는 자신은 패배자이기 때문에 본토를 수복할 때까지 타이완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실제로 해외 순방조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진먼 섬 일대는 방문했다. 죽는 순간에도 중화민국이 본토를 수복할 때 난징에 매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탓에 장제스의 유해는 지하에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었다.[37]

장제스의 유해가 안치된 타오위안(桃園) 현의 츠후(慈湖)는 장제스가 생전에도 고향과 비슷한 경치라며 종종 방문했다고 전해진다.[38] 묘지는 중화민국군 의장대가 관리 중이다. 1988년 타계한 아들 장징궈 전 총통도 비슷한 형태로 안장되었고, 장제스의 유해와는 약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3. 평가





4. 사상과 성격



4.1. 권위주의 성향


장제스의 권위주의 사상은 1912년경 스스로 발행인을 맡은 군사학 잡지 군성잡지(軍聲雜誌)에서 최초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장제스는 "우리 당이 중국을 강대한 공화국으로 건설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10년 안에, 단지 미국과 프랑스 공화정의 껍데기만을 치리(治理)하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개명전제의 정신을 이용하여 계획을 세워야한다." 라고 언급했다. 개명 전제론은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공화 혁명론에 대항하여 내놓은 입지로 "중국이 급하게 공화제를 도입할 경우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으니 개명한 군주가 우선 민도를 향상시켜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통치자가 있어야한다고 보았고 쑨원의 삼서론에 입각하여 국민당의 총재인 본인이 그 역할을 맡아야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장제스가 기본적으로 추구한 것은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가정'이었다. 장제스는 일본 유학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초국가주의와 유년 시절에 받았던 전통 교육, 국민당원으로서의 쑨원의 사상 등의 영향을 모두 받았는데 이 사상들의 공통점들은 바로 강력한 권위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었다. 장제스는 쑨원의 발언을 언급하여 "중국인은 자유를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39] 지금 필요한 것은 빈곤의 격퇴(와 이를 위한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장제스는 인민의 자유가 사회의 발전에 비례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의회 민주주의가 언젠가 중국에 도입돼야 함은 인정했지만 당대 중국의 상황에는 언감생심이라면서 도입을 거부했고[40]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을 추구한 쑨커나 다른 지식인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훈정 시기 국민당은 언론과 교육을 국민당이 총괄하고 쑨원의 이론과 삼민주의 사상을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제스를 위한 첩보 / 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납치하여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고 CC단도 한 몫 했다. 중국의 강제 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데 끌려와서 코로 마라탕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지식인의 반발을 불러오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4.2. 반공


장제스의 정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반공 성향이다. 국민당은 1차 국공 합작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에 꽤 우호적이었지만, 장제스 본인은 소련 방문을 기점으로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어 여러번 쑨원에게 국공 합작을 끝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소, 용공 성향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소련 고문인 보로딘은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장제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중산함 사건도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쿠데타를 선동하여 역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 장제스의 사상은 반공적이었으나 그의 정책은 자본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 당시 군벌들이 다 그러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적들과 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던 사람이다. 장쉐량을 비롯한 만주 군벌들도 북벌 시절엔 적이었고 펑위샹, 옌시산과는 천하를 놓고 한 번씩 다투어봤으며 리쭝런, 바이충시는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룽윈, 천지탕 등의 지방 군벌들과도 이합집산과 반목을 반복했다. 그 장제스가 국공 합작을 깨기 전까지 일관되게 적대했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편하게 헤쳐모여가 가능한 군벌들과 공산당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군벌들에 우세한 점이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 사상인데 공산당은 국민당보다도 혁신적이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를 알기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목을 매달았다. 더불어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중앙군을 지방에 박아 군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쓰촨, 윈난, 화북의 군벌들은 장제스하면 치를 떨게 되고 아예 공산당과 내통하여 태업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쉐량의 시안 사건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합작을 아주 거부한 것은 아니어서 대장정 이후 공산당에 홍군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다시 받아주겠다고 제안한 바도 있고 시안 사건으로 강요된 합작도 번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일 감정이 너무 고조되어 합작을 거부했다간 국민당의 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컸다. 그래도 공산당은 결국 없애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었고 중일 전쟁 이후 무리한 공세를 취하다가 망했다.


4.3. 파시즘



“좁은 의미에서 가족은 단지 한 가정을 뜻한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가족은 민간 및 정부의 모든 조직을 포함하고 여기에 혁명당과 학교까지 든다.”


“우리 개인의 모든 말과 행동은 국가와 민족을 유일의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권위주의 + 반공 성향 정치가였고 대륙에서 장제스의 시대가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날뛰던 1930 ~ 1940년대였던 것에 주목하여 장제스가 파시즘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국민당의 유력 정치가 왕징웨이장쉐량 등은 유럽을 방문하면서 히틀러, 무솔리니를 칭송하며 파시즘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장쉐량은 장제스를 중국의 히틀러로 옹립 하여 중국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후 천리푸, 다이리 등 장제스의 측근들이 지휘한 CC단, 남의사 등은 게슈타포, SS와 같은 파시즘 단체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중화민국과 나치 독일이 밀접한 교류를 하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협력한 것 역시 장제스 파시스트 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저 시기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평가가 좋았던 시절인 만큼 파시즘이나 히틀러, 무솔리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전 세계적으로 있었다. 윈스턴 처칠 총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무솔리니와 파시즘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가 있었다.(...)


4.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분명히 장제스 정권이나 장제스를 옹호하는 다이리남의사, 천리푸, 천궈푸CC단 등에서 파시즘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며 흑룡회를 비롯, 일본의 파시즘 성향이 짙은 비밀결사와의 연계가 있었으며 1932년 남의사 결성 이후 중국 내부에서 장제스와 파시즘의 연계에 관한 의혹이 제기된 바가 있다. 예컨대 1932년 7월 대공보는 장제스에게 '귀하가 파시스트 당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라는 공개 질문서를 제출했고 왕징웨이 계통의 황포동학구국단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질문을 보냈다.

작년 이래의 외모, 수재, 비화는 귀하의 6년간에 걸친 전정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귀하는 조속히 하야하여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처지인데도 오히려 불한당들을 이용하여 파시스트 당을 조직하려는 것은 위로 쑨원 총리의 유언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아래로 동지의 기대에 배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귀하에 대하여 다음의 제항목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 귀하는 어찌하여 황포동학을 자기옹호에 이용하고, 혁명을 돌보지 않는가.
2. 귀하는 국민당의 영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당 외에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여 국민혁명을 파괴하려 하는가.
3. 삼민주의를 고취함에 있어서 폭력정책을 사용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귀하는 어찌하여 철혈대로 하여금 민중을 압박하는가.
4. 귀하는 황제가 되어 인생의 부귀를 누리려고 하지만 황포동학을 이용하여 혁명군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말라.
5. 만약 혁명구국을 위하여 파시스트당을 조직한다고 하면 바야흐로 항일을 위해 출병하라.
6. 파시스트 당의 유일한 수단은 암살에 있으나 귀하는 3천명의 사병으로 4억 민중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다고 사료하는가.
7. 파시스트 당의 경비는 1개월 120만 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귀하의 강회 지역의 영세민이 날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떄우는 궁핍한 상태를 염려한 일이 있는가.
8. 귀하는 파시스트당의 조직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째서 중앙군관학교의 군관특별연구반, 교육총대 및 단경반에 대해 파쇼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가.
9. 귀하는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의 내부는 무솔리니의 친척으로 충만되어 무솔리니 일가의 천하로 보이지 않는가.
10. 귀하는 파시스트당을 존경한다고 했다. 하지만 각국 파시스트당은 대외 무저항주의를 국민에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해 장제스는 "나는 파시즘을 아주 싫어한다."라고 답변할 뿐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어 대공보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중국혁명의 조직과 방략에는 쑨원 총리가 정한 조직과 방략만으로도 국민혁명의 사명을 완성하기에 충분하다. 외국의 혁명방략을 좇아서 중국의 민족성과 상반되는 조직을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만약 내가 사욕을 품는다면 국가도 민족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쑨원 총리를 배반한 반혁명분자가 국민당 고유의 조직과 방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고유, 유일한 혁명조직을 회복하지 않고 파시스트의 조직을 좇아서 이를 중국에 강행하려고 함은 공산당이 중국을 적화하려고 함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살아서도 중국 국민당원이요, 죽어서도 당귀가 될 뿐이다. 중국혁명의 조직에는 국민당의 조직이 있을 뿐이며 중국혁명의 방략에도 역시 국민혁명의 방략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혁명 완성을 위한 유일무이의 도립이다. 이외의 조직은 절대로 반대한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민국 13년에 성립한 국민당의 혁명정신과 국민혁명의 조직 및 방략을 부흥시킴으로써 삼민주의의 실현을 기대함에 있다."


하지만 장제스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파시즘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파시즘의 혁명적 열기에 관심을 보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기존 국민당원들에게서 혁명적 열기가 사라지고 오히려 중국 공산당에게서만 열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제스의 맹우이며 반공 이데올로그 다이지타오도 한탄했던 문제였는데 장제스는 혁명열기를 고취시키고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파시즘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고 분명 관심과 희망을 가졌었다.

"1931년 9월 18일 이후,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방하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앞으로 중국 혁명에 대한 협의체는 삼민주의와 파시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국민당의 삼민주의 원칙이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피를 수혈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파시즘은 중국의 미래입니다. (...) 우리는 내용면에서 삼민주의를 활용하고 기능면에서 파시즘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934년에는 이렇게도 말했다.

"유명한 정당이 있는 외국에서는 그 당이 통치권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경우 유명한 정당은 국민당입니다. 그러나 국민당은 권력이 없는 형식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정당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최근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중국에도 파시스트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는 장제스가 파시즘의 사상적 면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는 기능적 수단에 주목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시 중국 엘리트들에게 파시즘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매우 진보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두음 박사는 장제스가 유럽 파시즘에 관심을 보인 분야는 조직에 있지 '사상'에 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분적인 기능적 수단을 차용하는 경우는 비 파시즘 계열의 여러 국가[41]에 대해서 얼마든지 보인 경우이다. 사상면에서는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트들은 유교 사상이 근반이 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장제스의 파시즘에 대한 관심은 예전과 달라졌고 1938년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정치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중화민국을 설립한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위 대중집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나 헌정주의는 없었습니다. 또한 불행히도 이런 초기 집회들이 몰고 온 수많은 부패 관행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혼란과 허약한 상태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억압과 굴욕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정치위원회는 의회가 아니지만 여러분은 정당정치가 빚어낸 과거의 실수들이 지속적인 경고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시에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굳걷한 기반을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요약해서 장제스가 20년대 후반~30년대 중후반에 파시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근대화의 수단 중 하나로 관심을 보인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장제스의 통치방식은 파시즘적인 색채가 있었던것은 확실하다.


4.3.2. 장제스 정권 분석


중국 국민당이 권위주의 정권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학적 분석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고 중국 파시즘에 대한 연구도 남의사, CC단, 그 중에서도 남의사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중국에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준동한 세력으로 그나마 지목되는 것이 남의사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남의사와 파시즘의 연대를 연구했던 것은 로이드 이스트만인데 그는 이렇게 규정한다.

남의사가 파시스트 조직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때 역행사의 지도층이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명시적인 방법으로 파시즘에 전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역행사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잠깐이었다.

우선 이런 문제는 무엇이 파시즘이냐는 파시즘의 정의 차원에서 상당히 민감한데 권위있는 파시즘 연구자들인 로버트 팩스턴이나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는 남의사가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파시즘 단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소위 '파시즘의 최소치'에 중점을 두는 팩스턴의 경우 구조주의적 파시즘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제국조차도 파시즘이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장제스나 남의사나 파시즘 얘기를 꺼낼 건덕지가 없게 된다.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도 남의사는 대중정당이 아니라 비밀결사로 파시즘식 대중정당으로는 볼 수 없다고 분류한다.

물론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는 일본식 파시즘의 존재를 긍정할 경우에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긴 한다. 일본식 파시즘을 긍정할 경우, 현양사, 흑룡회를 비롯한 비밀결사들의 행동이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일본 파시즘은 대중운동보다는 위의 군사,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은 파시즘 정당이 대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서구와 달리 기존의 국가조직과 지도자를 탈바꿈하는 식으로 집권하기 때문에 없잖아 국민당의 통치에도 맞아 떨어질 건덕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남의사는 1938년 이후로 해체되어 중일전쟁을 위한 정보기관에 흡수되었고 그 이전의 남의사의 첩보활동들도 단순히 권력 탈취와 국가 개조를 위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정두음 박사의 경우, 남의사를 파시스트 단체로 정의하지만 이는 남의사의 공식적 이념보다는 선전자료, 출판물을 중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5. 대인관계


장제스/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6. 이름 표기법


구분
명자(名字)
설명
족보명
저우타이(周泰, 주태)
장제스의 족보 이름.
초명
루이위안(瑞元, 서원)
초명
학명(學名)
지칭(志淸, 지청)
학생 시절 이름.
본명
중정(中正)
본명

제스(介石, 개석)
자. 실제 이름인 중정보단 장제스로 유명하다.
한국에선 자를 그대로 읽은 장개석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별명
노장(老蔣)
어린 아들 장징궈[42]와 구별되는 존칭.

그의 이름 표기는 다양한데,
  • 장제스가 태어날 때의 본명은 '장즈칭(蔣志清, Jiǎng Zhìqīng)'이다. 그의 두 번째 이름이 1913년경 바꾼 '중정(中正, Zhōngzhèng)'이다. '제스(介石, Jièshí)'는 본래 191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었으나 이후 자(字)로 사용했다.
  • 이 문서 표제로도 올라와 있는 '장제스'는 '장개석(蔣介石)'의 표준중국어 발음을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옮겨 적은 것으로, 한어병음의 표기를 따르면 'Jiǎng Jièshí'가 된다. 병음을 보면 알겠지만, 는 권설음이라 한국어 '스'와 다른 발음이다. 만약 온갖 표기 원칙을 무시하고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를 하면 지앙지에시으 정도일 듯.
  • 영어권을 비롯해 대부분의 서양 언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Chiang Kai-shek'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기는 광동어 발음 '쬥가이쎅(표기법 기준) / Zoeng2 Gaai3-sek6 (홍콩 언어학 학회(LSHK) 표기법 기준)'의 변형이다. 성씨 '蔣'은 표준중국어 발음 기준 웨이드식 표기법인 'Chiang'이고, 나머지는 광동어 발음 표기의 변형. 초기에 중국 국민당의 본진은 광동성에 있었고, 장제스가 두각을 나타낸 때가 광동 국민 정부 시절이었기에 광동어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졌다. 영어 위키 백과 해당 항목명도 'Chiang Kai-shek'. 드물게 표준 중국어 발음을 웨이드 식으로 옮긴 Chiang Chieh-shih도 쓰이기는 한다.[43]
  • 한국의 경우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서 신해혁명 이후 중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인명을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겨 적는다는 원칙을 두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장제스'라는 표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한국 한자음 그대로 표기해 '장개석'이라고 한다.
  • 대만에서는 '蔣介石'보다도 본명을 적은 '蔣中正'이 더 널리 쓰이며(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Jiǎng Zhōngzhèng'. 한국 한자음과 비슷한 '장중정'으로 읽는다.), 대만 내 영어 표기에서는 'Chiang Kai-shek'을 쓴다. 대만어 발음으로는 Chiúⁿ Kài-se̍k. 간단하게는 중정/C.K.S.으로 쓴다.
  • 일본에서는 '蔣介石'을 자신들 방식으로 읽어 'しょうかいせき(쇼카이세키)'라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중국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고, 그나마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인물은 거의 그렇게 표기하지 않는다.
  • 베트남에서는 '蔣介石'을 베트남식 독음으로 읽어 Tưởng Giới Thạch(뜨엉 저이 타익, 또는 뜨엉 저이 탓)으로 부른다. 베트남은 중국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고 거의 일괄적으로 베트남식 독음으로 읽고 쓴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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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신 대만 달러 지폐에 나온 장제스. 밑의 건물은 타이베이 총통부다.

  • 종교는 기독교(감리교)였다. 아내인 쑹메이링과 아들인 장징궈도 기독교인. 원래 쑨원을 포함한 중화민국 및 중국 국민당의 초기 정치적 주요 인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장제스가 처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건 아니고 쑹메이링과 결혼하면서 개종을 한 것이다.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할 때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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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12월 3일에 걸린 것으로, 지금의 마오쩌둥 초상보다 컸는데, 고작 3년 1개월 만에 내려지게 되었다.

  • 장제스의 사진이 톈안먼에서 내려진 것과 달리 난징 총통부 안의 옛 집무실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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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옛 총통부 건물은 한국으로 치면 도청(道廳)에 해당하는 장쑤 성 정부 청사 등으로 쓰여왔다. 따라서 건물을 제외하면 장제스 및 국민당과 관련된 상징물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정부 기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고 옛 총통부 건물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1990년대 후반 옛 총통부는 태평천국 및 근대 역사 박물관이 되었고, 2003년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초상화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할 때 만든 것으로 장제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저 초상화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여기가 그의 집무실이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물건이다. 가끔가다 대만의 젊은이들이 난징 국민당 청사로 가 청천백일기를 들고 인증샷을 찍기도 한다.

  • 비록 대만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금성에 있던 진귀한 역사적 유물의 핵심을 보존해 대만으로 실어왔다. 이 유물들은 중국의 여러 황실에서 계속 모아온 보물 중의 보물로 지금까지도 중화민국이 가진 가장 큰 보물로 꼽힌다. 정말 문화적인 면에서는 중화민국의 유물 보존 노력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현재 유물을 전시 중인 고궁박물원을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장제스가 유물을 이전한 이후 자금성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 관광객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이후 중국 정부가 대륙 전체에서 유물을 수집해 양적으로는 과거의 규모를 능가했지만 질적으로는 국립 고궁 박물원의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장제스가 자금성의 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유물들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무사히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과 북경 고궁박물관을 비교한다면 대만쪽이 명, 청 및 근대시기 유물이 많고 본토에는 고대시대 유물이 많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장제스가 유물들고 대만에 넘어갔을 쯤에는 전제왕조 시절 부터 쌓여있던 오리지널 유물을 가져간거고 그 후에 대약진운동이야 문혁이야 를 거치고 난 뒤 좀 안정됐을때 좀 더 발전된 고고학 기술을 이용해 발견된 유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 타이베이 북부의 스린(士林)에는 그와 부인 쑹메이링이 국공 내전 직후 후퇴한 1949년부터 26년 동안 거주했던 총통 관저[44]가 있는데, 1975년 그가 타계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부터 일반에 공원 및 사적지로 개방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공원은 무료지만 관저는 NTD 100달러를 내야 한다.그리고 대중교통이 시원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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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구조로 장제스 부부가 사용했던 서재, 침실, 각종 사진, 소장품, 그리고 외국 귀빈과의 접견실 등이 마련되어 중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가볼만한 곳이다.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관저 2층에는 장제스와 쑹메이링 여사의 침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군인 출신인 장제스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기상과 취침 시간이 빨랐던 반면, 쑹메이링은 올빼미 스타일로 밤에도 독서와 취미 활동[45]을 해서 서로 취침 시간이 맞지 않았던 점을 반영한 결과다.

  • 오늘날 대만에서는 쑨원과 장제스, 장징궈의 캐리커처형 인형을 과거의 적수였던 공산당의 마오쩌둥, 덩샤오핑 인형과 함께 만들어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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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기념당을 포함한 장제스 관련 사적지에서 이런 인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엔 마잉주시진핑의 인형도 추가되었다.


  • 장개석은 살아 생전 자신에 대해 교장 선생님이란 호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황푸 군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는데, 이 황푸 군관 학교 시절이 애착이 강했다는 것. 이 호칭에 따라 그는 직계 / 방계를 구분했었다고 한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국립정치대학의 총장(중국어로는 '교장'이라고 한다) 직을 죽을 때까지 겸임했다. 그러니까 장제스는 국립 정치 대학의 '교장 선생님'이기도 했던 셈(물론 실제 업무를 하는 총장은 따로 있었다). 장제스가 아직 기력이 남아있었을 시절에는 국립 정치 대학에 때때로 강연을 나가기도 했던 모양이다. 쑹추위2016년 총통 선거 출마 선언 직후에 대만 TV와의 인터뷰에서 국립 정치 대학에 다니던 리즈시절에 장개석을 강단에서 처음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 여러 모로 말투가 굉장히 험해서, 외국 외교관들과의 대화를 아내인 쑹메이링(송미령)이 번역하는 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장징궈가 사실상 후계자가 된 후 쑹메이링은 찬밥 먹는 신세가 되어, 국부천대 이후엔 미국에 거주하게 된다.

  • 유명한 카이로 회담에서 담소하는 장제스 사진은 연출이다. 장제스는 영어를 전혀 못 했고 회담 내내 본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상덕 전투의 불리한 전황과 이를 자꾸 캐묻는 미국과 영국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다만 쑹메이링의 활약으로 회담 자체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 1940 - 1960년대의 전설적인 여배우 이려화(李麗華)의 팬이었다고 한다.
파일:이려화,엄준,장제스.jpg
이려화가 출연했던 영화 <양산백과 축영태(梁山伯與祝英台 1964년)를 측근들과 함께 여러 번 반복해서 보기도 했었다고 한다. 사진은 1957년 12월 10일에 신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려화 - 엄준(嚴俊) 부부를 초청하여 찍은 것이다.

  • 장징궈의 동생(?)인 장웨이궈(장위국, 蔣緯國)는 원래 장제스의 아이가 아니라 손문의 동지이자 신해 혁명에 참가하였던 다이지타오(戴季陶)가 일본 여자와 관계해서 낳고 키울 수 없어서 맡은 아이로 알려져 있다. 이 아이에게 자기의 성과 항렬까지 준 대인배였고 장웨이궈는 독일 유학파 장교로 강하엽병 장교로 오스트리아 병합에 참가한 바 있다.[46] 장웨이궈의 혈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장제스의 친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장제스가 고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나 언제 생식 기능을 상실했는지에 대해선 말이 많다. 내가 고자라니 까지 둔 걸로 봐서는 성관계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씨라는 말도 있는데, 이게 장웨이궈의 일방적 주장이고 장징궈를 엿먹이려는 의도가 강해서 신빙성이 없는 걸로 판단된다. 장제스가 고자가 된 시기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인 천제루(陳潔如)의 회고록에 나와있는 대로 장제스가 30대 초반에 상하이의 윤락가들을 들락거리다 성병을 옮아 부고환염에 걸려 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성병을 아내에게 옮겨서 천제루까지 불임의 몸이 되었다.(...) 다만 천제루도 장제스가 장제스의 모친인 왕차이위의 불륜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등 신빙성이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해서 수상쩍기도 하다. 어렸을 때 고환을 화로에 데어 그 여파로 고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충공깽스럽게도 조석마음의소리의 주인공으로 패러디되어[47] "차가운 도시의 총통, 하지만 자본가에게는 따뜻하겠지."라고 말한다. 개드립이긴 하나, 장제스의 국민 정부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대로 자본가의 지지가 아니라 군대의 권위로 인해 성립된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필요하면 자본가든 노동자든 가리지 않고 족쳤으니까 또한 해당 만화에서 장제스는 매 장면마다 다르게 나오며 심지어 마오쩌둥(?)이 나올 때도 있다.

  • 무척이나 무뚝뚝하고 웃지도 않고 과묵한 성격으로 젊은 시절 이후로 술, 담배를 끊었다.[48] 마오쩌둥은 내가 살다살다 담배 안 피우고도 오래 사는 인간은 장제스 말고 본 일이 없다고 50년대에 장제스를 까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런 말이 나올만한 게 그때는 담배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기도 했고, 마오쩌둥은 장제스와는 대조적으로 하루 50개비씩(두 갑 반) 꼬박꼬박 피운 골초였다.

  • 술담배는 물론 차조차도 사치라고 즐기지 않았지만 고향인 저장 성 특유의 생선 요리를 무척 좋아하여 대만에 가서도 저장 성 생선 요리를 먹을 때면 생선의 풍미에 대해 얘기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했다 한다.

  • 통치에 있어 실정을 했을지언정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지극한 효자 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고 거의 홀몸으로 온갖 고생을 해가며 장제스와 형제들을 키웠는데 장제스가 군인으로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던 1921년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죽을때 까지도 장제스를 배려하여 남편과 합장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장제스는 유명한 풍수학자들을 불러다가 고향땅의 가장 좋은 명당을 찾아내서 장사 지냈으며 이후 총통의 자리에 오르자 묫자리를 크게 넓히고 아무리 바빠도 매년 어머니의 기일 마다 찾아와 제사를 올렸다. 내전에서 패하고 대만으로 가기 직전에도 찾아와 꽤 오랜 시간을 머물다 떠났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묘소를 건들지 말고 보존하라 명령을 내렸다. 문화대혁명 때 묘소는 박살나고 시신은 꺼내져서 불탔지만, 현재는 대륙에서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묘소도 다시 복원되어 있으며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곳에 가면 '항일 영웅이자 마오쩌둥 주석의 위대한 맞수'라고 그를 표현한 글귀들이 있다.

  • 증손자인 장여우보(장우백, 蔣友柏)가 매우 미남이라 한때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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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주간 - 나의 증조부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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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성이 뽑은 멋진 남자 2위에 올랐던 적도 있다. 그는 장징궈의 3남 장샤오융(장효용, 蔣孝勇)의 아들이로, 장징궈의 아내 장팡량(장방량, 蔣芳良)이 소련 출신이라 장제스의 손자 대부터 혼혈 외모가 나타나는 것.[49] 그는 미국 유학 후 대만에서 광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진정한 엄친아. 반대 급부로 마오쩌둥의 유일한 손자인 마오신위후덕한 외모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대만과 대륙의 여성 네티즌 사이에선 얼굴로 증조 할아버지의 숙원인 대륙을 탈환해달라는 반응도 있다. 정치와는 큰 관련을 맺지는 않지만 장제스의 대만 통치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나타내는 등 장제스에 대해 여타 장씨 가문 인사들과 다른 인식을 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한편 장여우보의 동생인 장여우칭(장우청, 蔣友青)은 모교인 타이베이 아메리카 스쿨에 "교사와 학생을 다 죽이겠다",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일삼은 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 환빠들 중 상태가 특히 안좋은 일부 환빠들은 장제스가 중일 전쟁 종전 후에 만주족의 본거지인 만주에 치를 떤 나머지 만주를 조선에 양도하려 했지만 마오쩌둥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장쉐량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몽골조차도 중국 땅이라도 하는 장제스가 만주를 포기?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군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주요 연합국 지도자 중에 장제스는 마지막 생존 인물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945년 졸), 조지 6세(1952년 졸), 이오시프 스탈린(1953년 졸), 윈스턴 처칠(1965년 졸), 클레멘트 애틀리(1967년 졸), 해리 트루먼(1972년 졸)에 이은 마지막 사망자. 하지만 중화민국의 몰락으로 인하여 대개 고려되는 경우가 크게 적다. A.J.P 테일러의 2차 세계 대전의 기원에서도 주요 연합국 지도자들을 언급하면서 당시 생존해 있던 그를 빼고 당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지도자들 중에 살아있는 것은 드골과 처칠 뿐이며 그중에서 현역에서 정치를 하는 건 드골 뿐이라고만 한다.

  • 장제스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은 장징궈(장경국)의 비서이자 내연녀 장야뤄(章亞若) 사이에서 난 자식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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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의 본처 장팡량이 장징궈의 친자식으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람에 내연녀의 성을 따라 章씨였다. 후에 장팡량이 죽고 장씨 가문에서 인정받아 2005년 3월에 蔣씨로 성을 바꿨다. 이후 2007년도에 2.28 사건의 최고 책임자가 장제스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오자 명예 훼손이라며 저자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장완안은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시 3선거구(중산구, 쑹산구)에서 중국 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입법위원)에 당선되어 국회 의원으로 활동중이다. 수려한 외모와 참신한 이미지 덕분에 인기가 매우 높아 정계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의 차기 주자 중 하나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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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的學生及年輕人,無懼港警強力鎮壓,為了捍衛自由與民主,向全世界發聲及吶喊,對於這樣的勇敢,我必須要給予最高的敬意。
                          
在臺灣,一國兩制沒有存在的空間,民主自由憲政體制也不容任何破壞及妥協。政府除了要密切注意並維護在香港就讀的臺生、在港工作的臺灣民眾人身安全,必要時也該提供香港民眾人道救援。
홍콩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세계에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강력히 지지할 것입니다.
대만에는 일국양제가 있을 곳이 없으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헌법 체계는 어떠한 탄압도 타협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대만 정부는 홍콩에서 유학중인 대만 학생들과 홍콩에서 일하는 대만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 홍콩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 장완안(蔣萬安, 장만안) 중화민국 입법원 국회의원(중국 국민당) 출처
그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위해 뛰쳐나온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일국양제를 거부하는 논평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장제스의 자손이라는 점 때문에 대만 정계에 충격을 몰고 왔고, 해당 글에 대한 댓글중국에서 몰려온 우마오당들은 "장개석 얼굴에 먹칠할 거면 민주진보당으로 꺼져라"등 각종 패드립을 치고 있고, 범록연맹 지지자들도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며 까고 있다. 링크

장제스의 실제 육성 연설 중 하나. 중일전쟁 승전 연설(중 일부)이다. 표준중국어로 하긴 하는데 발음이 영 좋지 않은데 저장성 지역의 방언인 오어를 오랫동안 썼기 때문이었다.[50] 타이베이에 있는 중정기념당에서 전문을 재생해주니 갈 수 있는 위키니트는 들어보자.

  • 한국에서 정재계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 가끔 언급되는 장제스에 대한 야사가 있다. 야사에서의 시점은 중일전쟁이 한창일 시기이거나,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국민당 정권을 개혁할 때로 꼽힌다. 야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장제스의 며느리가 밀수 등 심각한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장제스는 며느리의 집을 강제 수색하라고 명하였는데, 집을 수색하자 각종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장제스는 며느리를 불러서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는데,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와 상자를 열자 권총이 나왔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압박을 눈치채고 그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
이 야사는 의외로 오래되었는데, 한때 중화민국 주재 대사를 지냈던 김신의 회고록에서 이 내용의 기반이 된 썰이 나오며, 김영삼도 대통령 시절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면서 김현철에게 이를 언급한 적도 있다. 장제스의 며느리 중 한 명인 스징이(石靜宜, 장웨이궈의 첫번째 부인 )는 실제로 사치와 밀수 등의 행위 때문에 장제스가 매우 싫어했다. 스징이는 1953년에 사망했는데, 이 때 전후 사정이 석연치 않아서 장제스가 스징이를 암살, 혹은 비밀리에 처형했다는 설이 크게 나돌았다. 김신은 아예 회고록에서 이 설을 사실이라고 소개했다. 이 살해설이 앞서 언급한 부정부패 야사로 발전한 것.

  • 대만판 의정부고 대만의 고등학교인 젠궈중학(建國中學)이란 학교에선 매년 졸업식 때 학생들이 교내에 있는 장제스 동상을 우스꽝스럽게 꾸미는 전통이 있는데 2019년에는 타노스로 꾸며서 대만에서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이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일 뿐'이라며 학생들을 옹호했다.

국내 남성 잡지 맥심 2020년 9월호 168쪽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방부는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를 중화인민공화국 사람으로 바꿔버렸다.
 같은 해 6월, 국방부의 관리를 받는 전쟁기념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도왔던 '중화민국'(현 대만)에 엄청난 외교 결례를 범했다.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이던 장제스를 '광복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소개하면서 국적을 중국으로 홀라당 바꿔버린 것.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기' 대신 그들의 적이자 1945년 광복 전까지 건국되지도 않았던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의 '오성홍기'를 때려 박았거든.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 사진에 일장기를 박아넣고 "위대한 일본인 이순신!"을 외친 수준이다. 온라인 게임하다 만난 중국인에게 "타이완 넘버원!"을 외쳤을 때 분노하는 중국인을 만나본 독자라면 대만과 중국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품는지 잘 알 거다. 그런 대만에 중국 국기를 들이밀었으니... 이 사건으로 국방부는 중화권 언론에서 신나게 조롱을 받야야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국방부가 이와 흡사한 사건을 불과 1년 전에 겪어놓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거다. 2018년, 국방부는 국군창설 7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국군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웹툰 홍보물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근데 이 게시물에서 중화민국의 국기를 중공의 국기처럼 보이도록 색을 입혀놨던 사건이었다. 이 게시물의 원안인 1940년 광복군 창설식 사진이 흑백이라서 깃발의 색을 몰랐대도 그렇지, 인터넷으로 몇 초만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정보를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도 못 한다는 말인가?

8. 한국과의 관계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국인 후원자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주었으며 얄타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서 장제스의 역할은 크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 독립에 관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조차도, 장제스가 카이로에 오지 않았다면, 한반도 문제는 언급될 기회가 적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51]

193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남의사 계열이나 CC파를 통해 지원하였고, 난징 중앙 군관 학교 분교 지원금을 김구에게 보내줘서 이범석 등의 걸출한 독립 운동가들이 나올 수 있었다. 한국 광복군 창설에도 장제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장제스가 생색도 냈고 광복군 창설 당시에는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이라 하여 활동을 제약한 편이라고는 하나,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망명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그것만 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난립하는 지방 군벌과 공산당 때문에 골치를 썩던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또다른 군사 세력이 중국 땅에 생기는 셈인데 이 정도도 크게 인심 쓴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한 이유는 한국이 독립하면 한국을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장제스의 원 계획은 통일하고 나서 한국, 일본, 몽골, 베트남, 미얀마, 태국, 인도 등을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의 조소앙과 미국 정부측은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정황들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장제스가 한반도를 병합시킬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기밀이 공개되었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사 다만 장제스가 장래에 한반도를 병합하려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관련 연구는 루즈벨트와 미 국무부의 오해로 본다.[정병준,2014,315-318]

1942년 11월 장제스의 처남이자 외교 부장이었던 송자문(쑹쯔원)이 외교 부장으로 취임하고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만주타이완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고, 조선을 전후에 독립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7월 장제스는 임시정부 간부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 정상들과의 회의에서 합의를 얻도록 "힘써 싸우겠다(力爭)"고 약속했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출발 전에 휘하의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한국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한국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 바로 전날의 일기(1943년 11월 17일)에도 회담의 의제를 기록했는데 조선 독립 항목이 들어가 있고, 의제 전 항목도 국방 최고위에서 제출한 내용과 같았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즉시 한국의 독립을 공동 혹은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는 조선 독립 조항을 위한 교섭 지침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고했다. 회담 중 걸림돌이 발생할 경우의 전략까지 언급했는데 "한국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한국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정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소련 역시도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장제스는 영국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되겠지만, 중국이 독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결국 영국과 미국의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판단대로 흘러갔고 장제스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한 영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에 장제스는 한국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다. 출처


이승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해방 직전에 한국이 해방되면 누가 한국의 대표로 UN에 출석할 것일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장제스의 처남이자 중국의 외교 부장인 송자문(쑹쯔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나섰던 김구, 이승만, 한길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한길수야 처음부터 송자문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김구는 장제스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씹었고 기분이 상한 송자문은 이승만에 대해 장제스에게 안 좋게 말했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승만은 무시하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김구를 지지했다. 장제스가 김구에게 준 20만 달러의 독립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도 두 사람은 충돌했었다.

이후 기선을 잡은 것은 이승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장제스가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당신처럼 분열이나 조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차라리 마오쩌둥이 훨씬 믿음직하니 앞으로 한반도 문제는 마오쩌둥 주석하고만 논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근데 마오 주석과 회담했으면 아마 한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이에 이미 그에게 밀려 타이완으로 쫓겨나기 직전이던 장제스는 송자문 탓을 하며 이승만을 대형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아...안습 근데 이 일화에 너무 의미를 둘 것은 없는 것이 대형이란 칭호 자체가 당시 중국에선 굉장히 헤픈 칭호였다. 장제스가 형제 운운했던 사람들 중에선 그와 적이 된 사람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펑위샹이나 리쭝런. 그 둘과도 의형제 결의를 맺고 하하호호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의 의도가 어쨌건 현실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난 결과, 한국을 위성국화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작금에 와선 물 건너간 소리가 되어버렸다. 한국도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화민국의 남은 영토인 타이완 섬은 거리도 멀 뿐더러 한국의 1/3을 조금 넘는 수준의 섬이 영토의 거의 전부인, 한국보다 많이 작은 나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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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정 기념당에 전시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공헌을 기려서 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북한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6.25 전쟁을 말아먹어 중공의 타이완 침공을 무산시켰다 카더라.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그의 부인 쑹메이링, 쑨원, 천궈푸, 천치메이와 같이 임시 정부와 한국의 독립 운동을 도운 중화민국의 정부 요인들에게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6.25 전쟁 때에도 장제스국부군을 한반도에 파견해 한국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이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 의해 거부당했지만 그 대신 정보부대 등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 중심으로 소수의 부대를 파병했다. 여기에는 이를 통해 본토 수복을 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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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타이베이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의 모습. 왼쪽의 익숙한 얼굴이 박정희, 군복을 차려입은 하얀 수염의 노인이 장제스이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이념적 반공 동맹을 유지하는 우호 관계였다. 대만이 국제 연합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게도 버림받자 박정희 정권도 슬슬 중국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장제스의 애간장을 태웠지만 한중 수교 때까지 한국과 대만은 현실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됬을때도 후술하는 김신 대만 대사를 통해 미국은 대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달라고 친필 편지를 보낼 정도로 대만은 미국과 소통하려면 한국의 도움이라도 있어야할 처지였기 때문이다.[52]

김구와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고 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안가를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깊었다. 1962년 김신이 공군에서 예편하여 대만 대사로 부임하자 몹시 반가워했으며 김신에게 "나는 자네를 일개 대사로 생각하지 않네.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환대했으며 복잡한 의전을 생략하고 김신과는 정말 가족을 불러올 때처럼 허물없이 자주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장징궈(장제스의 아들)와 너의 의형제와 다름 없지 않냐"라며 상당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장제스는 김신에게 털어놓길, 중국 대륙에서 패배한 이유는 주변에서 좋은얘기만 하고 안좋은 국가상황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라고 후회하며 대만에 고칠점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거나 자주 대만 내정에 대해 이야기한것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김신은 아무리그래도 이건 내정간섭이라고 말을 자주 피했고 김신에게 뇌물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과묵하고 웃지도 않는 장제스였지만 김신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웃고 떠들었으며 장제스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경호원들이 김신을 데려와서 장제스 기분을 풀어줄 정도였다 한다.[53] 임시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김구의 서거 20주기이기도 했다) 남산공원에 세워진 김구 동상에는 장제스가 현직 총통 자격으로 보낸 추모 글귀가 조각되어 있다.

1963년 한국에 대흉년이 들어서 긴급히 쌀을 사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의장은 김신 대사에게 대만에서 쌀 5만 톤을 사올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대만에서도 흉년이 들어서 한국에 쌀을 팔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대만 행정원장은 쌀을 팔 수 없다고 김신을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즉각 국무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에 쌀을 팔 것을 지시했다. 장관들이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김신을 쌀 5만톤을 사서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이에 김신이 장제스에게 감사를 표하자 장제스는 우리가 대륙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까짓 5만 톤이 아니라 55만 톤 정도는 거저로 주었을 것이라고 한국 같은 각별한 나라에게 쌀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고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는 박정희의 손을 잡으면서 "내 나이가 이제 80이 다 되어가니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는 박 대통령이 이으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하자, 한국 정부에서는 당시 국무 총리였던 김종필을 대표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관련 영상

결론적으로는 중국을 통치했을 당시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최대물주였으며 생색도 많이 내기는 냈지만, 위에 언급된 김구이승만말고도 김규식, 김원봉, 이시영. 이동녕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장제스의 후원을 받아 활동했기에 결론적으로 매우 큰 도움을 받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있어서 일정부분 공헌을 했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기에도 남한과 대만은 같은 반공을 표했던 동맹국이기에 현재까지도 양국 간의 이미지는 우호적인 편이며, 서로간의 관광과 교류도 꽤나 활발한 편.[54]혹여나 장제스가 세간의 의혹처럼 당초 품었던 속셈[55]이 있었더라도, 2차 대전 후 마오쩌둥에게 쫓겨 대만으로 도주하게 되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에, 결국 정말 한국에 도움만 준 인물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한들 김구-김신과의 관계에 대한 일화들을 보면 인간적인 진정성도 없진 않았다고 볼만하다.


9. 매체에서



9.1. 역사서


  • 장제스의 저서라 알려진 중국의 운명이 1946년(!) 한국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고서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는 수준...

  • 1970년대 말부터 대만의 전폭적인 지원[56]을 받아 일본의 산케이신문에서 연재 후 출판한 '장개석 비록'이 있다. 한국에선 1976년,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 6권으로 출판되었으나 2부는 끝내 정발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들어온 물건도 옛날에 절판되어서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후 장개석 비록의 주요 필진이었던 후루야 켄지의 주도로 영어 번역 버전도 나와서 세인트 존스 대학교(뉴욕) 출판부에서 출판하였으나 이 역시 현재는 조너선 펜비와 제이 테일러의 장제스 평전에 밀려서 흔적도 찾기 힘들다. 다만 현재도 판매되는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가 장개석 비록의 짭퉁(...)인지라 정히 보고 싶다면 이쪽이 있다. 이쪽은 원래 1986년에 출판되었다가 2014년에 재판되었는데 재판을 대충했는지 곳곳에 오탈자가 많으며 문체나 편집 스타일 자체도 좀 예스럽고 장징궈가 아직도 현 중화민국 총통이라고 되어 있는 등(...) 옛날에 나온 책이라는 티를 좀 낸다. 여담으로 이후 산케이 신문에서는 마오쩌둥 비록 역시 내놓은 바가 있다.

  • 장제스는 1915년부터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57] '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 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 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놓았다.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검열삭제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미국 후버 연구소가 유족으로부터 이걸 빌려와 2006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일기를 공개했다. 당대 중국의 1인자였던 만큼 중국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기에 중국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부천대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개가 되어있지 않은데 대만 현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부분인 만큼 아쉬움이 남는다.[58] 집권자였던 시절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한들 절대로 웹 공개를 허락하지 않으며 보고 싶으면 후버 연구소에 열람을 신청하고 다시 후버 연구소가 장제스 유족들에게 허락을 받는 식으로 진행하여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보기 복잡했을 뿐더러 이후 저작권 문제가 복잡해져서 장제스의 남은 유족들이 누구 맘대로 일기를 후버 연구소에 기증했냐고 소송을 걸어서 현재는 읽기가 좀 복잡해진 상태다. 즉,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가 힘들다. 한편 1917년 이전의 일기의 일부는 장제스가 쑨원을 따라 광둥성으로 떠나면서 장제스의 은사가 맡아 보관하고 있다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발견되어 용케도 파괴되지 않고[59] 현재 대륙에서 전시하고 있다.

  • 파일:external/www.bluehistory.net/4d500a998656ae8ec92e30b23742a20c.jpg
레이 황[60] 교수가 1930년대과 70년대에 일부 공개된 일기를 바탕으로 <장제스 일기를 읽다>(從大歷史的角度讀蔣介石日記)란 책으로 내놓은 바가 있다.
이는 위에 언급한 공개된 일기가 아닌 일기의 공개 이전에 나온 부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레이 황 교수는 2006년의 일기 완전 공개가 있기 전인 2000년에 타계했다. 그래서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역자의 말을 보면 번역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스럽다는 역자의 말이 남아있다.[61] 타이완 출판 버전과 미국 출판 버전이 다른데, 미국 버전은 미국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스틸웰-장제스 불화나 카이로 회담 등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한다.

  • 파일:장제스평전.jpg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조너선 펜비 경이 저술한 장제스 평전이 있다. 한국에선 2014년 민음사에서 정발했다. 원서가 나온 시점이 장제스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인데 이를 감안하면 꽤나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이뤄내서 '공정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대 언론 보도나 편향된 일부 자료를 사용하고 사실 관계에서도 일부 오류가 발견되는 등 지금 보기엔 좀 비판점이 있으나 그래도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유일한 장제스 평전.

  • 미국의 외교관 출신인 제이 테일러가 집필하고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장제스 평전(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이 있는데 이건 국내에 정발되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의 책보다도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시도한 책 중 하나다.

  • 대만에서는 장총통전을 비롯하여 장제스를 칭송하는 저작들이 많다. 장제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만 보수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겸하기도 하여 저작의 학문적인 질은 장담할 수 없다.

  • 본토에서는 장제스를 항일 지도자로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장제스 평전이 출간되는 등 장제스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9.2. 창작물





10. 참고 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의 전반적 생애 관련.
  • 중일 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 전쟁 시기와 공업화 관련.
  • 중국 혁명사, 서지영, 한울 아카데미 - 장제스의 농업 정책 관련.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 난징 10년 관련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 - 국공 합작 결렬과 상하이 쿠데타, 펑위샹 관련.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민두기 역.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 출판 삼화 - 초공 작전 관련.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 중일 전쟁 관련.
  • 중일 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 전략, 기세찬, 경인 문화사 - 중일 전쟁 관련.
  • 모택동의 사생활 1~3권, 리즈수이, 고려원 - 반우 운동 관련.
  •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 장칭의 난징 정부 회상 관련
  • 학문의 제국주의, 폴 코헨, 순천향 대학교 출판부 - 서양 학계 시각 비판 관련.
  •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 강명희, 한세 대학교 - 장제스 경제 정책 관련.
  • 1930년대 농촌 위기와 남경 국민 정부의 농업 정책, 아주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 1920~30년대 난징 국민 정부의 농촌 정책: 장쑤 성을 중심으로, 박정현, 고려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11. 관련 문서





12. 갤러리


파일:장개석 초상.jpg
파일:장개석 결혼사진.jpg
장개석 초상 컬러버젼
쑹메이링과의 결혼 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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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 역대 총사령관
파일: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_Army.svg.png
총사령관직 신설

초대

총사령관직 폐지
장제스
(1926년 6월 5일 ~ 1927년 4월 1일)

국민혁명군 역대 제1집단군 사령관
파일: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_Army.svg.png
1집단군 신설

초대

1집단군 폐지
장제스
(1927년 4월 5일 ~ 1929년 1월 22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역대 위원장
파일:800px-Flag_of_the_Chairman_of_the_ROC_Military_Affairs_Commission.svg.png
1대

2대

편견회의로 폐지
왕징웨이

장제스
(1926년 4월 14일 ~ 1928년 11월 10일)

위원회 신설

초대

위원회 폐지
장제스
(1932년 2월 8일 ~ 1946년 5월 31일)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파일:ROC_Ministry_of_Foreign_Affairs_Emblem.svg.png
11대

12대

13대
궈타이치

장제스
(1941년 12월 27일 ~ 1942년 10월 20일)

쑹쯔원

[1]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닝보시 펑화구 시커우진[2] 안장 지점: 중화민국 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3] 1928년 10월 10일1931년 12월 15일 (1,162일)[4] 1943년 8월 1일 – 1943년 10월 10일 (71일)[5] 1943년 10월 10일1948년 5월 20일 (1,685일)[6] 1948년 5월 20일1949년 1월 21일 (247일)[7] 1950년 3월 1일1954년 5월 20일 (4년 81일)[8] 1954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20년 320일)[9] 만주 일대를 장악했다.[10]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 문서 참조.[11] 호는 숙암(肅庵).[12] 중화민국의 최고 훈장 이름이 장제스의 어머니 이름을 딴 차이위(采玉) 대훈장이며, 본국과 외국의 국가 원수에게만 주어진다. 마잉주를 제외한 전직 중화민국 총통은 다 받았다.[13] 현지 발음으론 장쓰쳰.[14] 學名. 여기서는 학생 때 쓰는 이름. 중국의 문벌 있는 집안에서는 입학할 때가 되면 아버지나 스승이 학명을 지어준다.[15] 그냥 스페이스 한 번(반각)으로 先總統 蔣公이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先總統"과 "蔣公"을 글자 하나가 들어갈 만큼(전각) 띄어 쓴다. 띄어쓰기가 없는 중국어에서 이렇게 특별히 띄어쓰기를 하는 것은 나대(挪擡)라고 해서, 해당 인물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용법이다. 줄여서 장공(蔣公)이라고 불린다.[16] 이 때 중국인을 흙 속의 세균에 비유한 일본인 강사에 맞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17] 당시 장제스는 매일 아침마다 새벽 운동을 하는 등 규칙적인 군대 생활이 체질적으로 몸에 맞았다고 한다. 그 결과 저장성 전체에서 15명을 뽑는데 장제스는 3등이었다.[18] 장제스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라 알려져 있고 국민당 공식 자료에서도 21기 졸업생이라고 나와있지만, 일본 육사 기록에는 장제스가 육군 사관학교를 입학했다는 기록이 없어, 장제스가 군사적 기반이 없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윤색한 것으로 보인다.[19] 저 진과부는 김구의 백범 일지에도 등장하는데,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중국 국민당에 지원받을때도 저 CC단과 남의사 루트로 지원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목의 '중국과의 관계'를 참조.[20] 중정이라는 표현은 역경의 예과 부분의 '상전에 말하기를, (의지함을) 그치는 날이 없으면 점괘가 길하다는 것은 중정하기 때문이니라.'(象曰 不終日 貞吉 以中正也)에서 따온 것으로 중정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곧고 올바름. 또는 그런 모양.'을 뜻하는 말이다. 개석이라는 단어는 역경의 그 바로 윗부분에 '돌에 의지하는 상이니 (의지함을) 그치는 날이 없으면 점괘가 길하리라'.( 不終日 貞吉)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21] 1900년대 말에 일본에 주문해서 완성된 700t 대의 포함으로, 주로 장강 유역의 초계를 목적으로 하는 전투함이다. 쑨원 사후에 쑨원의 호인 중산함으로 개명된 뒤 중산함 사건(공산당원이던 함장이 장제스의 지시를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중일 전쟁 초반에 일본군의 공습으로 장강 중류에서 격침되었다가 21세기 초에 선체가 인양되어 복원 작업을 받아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22] 정식 명칭은 육군 군관 학교지만 황포 섬에서 개교했기 때문에 편의상 황푸 군관 학교라 부른다.[23] 현재 중국에서는 상해 정변이나 4.12 반 혁명 정변이라 한다. 중화민국은 4.12 청당이라고 부르며 맞선다.[24] 이때 장제스는 천제루에게 쑹메이링과의 결혼은 오로지 중국 통일을 위한 정략 결혼일 뿐이니 5년 후에 그녀와 재결합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자신의 난징 정부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이미 천제루는 그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후였다. 유학이라는 빌미로 미국에 갖다버려진 천제루는 중국 외교관들의 감시 속에서 결국 수차례 자살 기도를 했고 1933년에 귀국하였다가 이후 1960년대에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자신과 장제스의 혼인 증명서를 첨부한 회고록을 1971년에 내놓은 다음에 사망했다. 장제스는 이 회고록이 출판되지 못하도록 로비를 하였고 실제로 회고록은 장제스도 죽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25] 이 과정에서 쿠데타군 가운데 양호성의 제17로군은 서안 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군벌들은 말로는 항일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같은 중국인의 생명과 재산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26] 이때 동참한 양호성이 1949년 충칭에서 일가 모두와 함께 살해당한 데 비하면 훨씬 양호한 대접이었다.[27] 정전 기간 동안 대부분의 병력은 여전히 서북 지역과 사천, 운남에 머물러 있었다.[28] 이 때의 상황이 어땠냐면 돈보다 똥이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진짜로(...). 1945년에 분표 한장 가격이 45위안이었는데 1949년에는 무려 70만 위안에 달했다. 사실 화학비료가 널리 쓰이기 이전인지라 똥이 비료로 널리 쓰였던 시절이어서 똥의 가치가 생각보다 컸고, 그래서 1950년대에 모든 화장실이 국영화 되기 이전까지는 똥을 모은 다음에 팔아치우는 일이 쏠쏠한 돈벌이 거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짓거리는 1980년대부터 다시 시작되어 201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볼일보는데 돈을 받는 식이었지만[29] 반대로 마오쩌둥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천윈, 보이보 등의 지휘아래에서 통화가치 안정 등 안정성장 노선을 취했지만(다만 이 부분은 스탈린이 중국의 경제정책에 관여하면서 축소시킨 영향도 있기는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조급증을 보이며 1950년대 초중반의 안정성장 노선을 뒤엎고 대약진 운동을 추진하다가 현실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계획의 조기수정을 거부하며 결국 3000만명이 죽는 대 참사가 일어난것을 보면 매우 대조적이었다.[30] 장제스의 며느리 중 하나인 스징이가 1953년에 의문사했는데, 스징이가 평소 사치로 인해 평판이 안 좋았기 때문에 스징이가 사망했을 때 장개석이 며느리를 부패문제 때문에 일부러 자살시켰다는 풍문이 대만 내에서 퍼졌다. 이러한 소문은 한국에도 전해져서 김영삼금융실명제를 단행했을 때도 이를 언급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패가 척결된 것은 아니라서 삼합회에 대한 완벽한 척결은 단행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삼합회가 국민당 정치인들과 연계해서 합법적(!!!)으로 유흥업소를 운영하거나(사실 국민당 일당독재시절에 대만에서 매춘은 의외로 합법이었다) 국민당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고, 국민당이 운영하는 기업은 세금을 내지 않는 병폐 또한 있었다. 이 때문에 타이베이는 1990년대까지 태국 방콕과 더불어서 아시아에서 매춘업으로 유명했던 도시였다. 타이베이가 매춘도시라는 꼬리표를 뗀 것은 천수이볜이 타이베이 시장이 된 이후로 매춘업소와 퇴폐업소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31]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고소득자들에게 90%대에 달하는 고세율 정책을 펼치던 시절이었고 신자유주의가 대두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우파에서도 복지에 대한 인식이 나쁜 것이 아니었던지라(사실 1940년대 이래부터 마가렛 대처 이전까지 보수당도 복지정책을 발전시켜나가는 식이었고, 공화당에서도 꽤나 진보적인 성향의 아이젠하워가 집권하는 등 복지정책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빈부격차가 적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대만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둔 것이다.[32] 다만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부동산 규제완화를 단행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탓에 대만의 빈부격차 수준도 크게 늘어났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세대간 격차가 크다.[33] 경험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대륙 시절 1927년~1937년까지 이른바 난징 10년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대대적인 공업화가 있었기 때문. 즉 이미 경험한 공업화를 타이완에서 다시 경험하는 것.[34] 당시 대만은 이미 1969년에 컬러TV 방송을 시작했을 정도였다(한국의 첫 TV 방송이 1956년, 대만이 1962년이었음을 감안하면, 꽤 빠른 시간만에 역전시킨 셈). 이에 비해 한국은 컬러TV는 커녕 아직 흑백TV조차도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이었다. 또한 자동차 보급도 한국보다 대만이 약 5~6년 정도 일찍 이루어졌고 해외여행 자유화도 한국이 1989년에 이루어진데 반해 대만은 1979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다보니 당시 대만인들은 경제적으로 확실히 한국보다 우월감을 갖고 있었고, 축구경기를 할 때 대만인들이 한국인들을 깔본다거나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다 옛날 얘기일 뿐이지만...[35]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이라 영파(지금의 저장 성 닝보 시) 사투리가 굉장히 심해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당직 부관 웡위안(翁元)만이 그 말을 듣고 의사에게 이 말이라고 전했다. 진짜 그런지 진실은 그만이 안다고. 이 양반 1930년생이고 2020년 기준 아직 살아 있으니 저 세상 가기 전에 진실을 이야기해 주길[36] 이러한 유언 방식은 1925년 쑨원이 타계 직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분투하라"고 구술했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다만 유언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일부 주장도 남아있다.[37] 2005년도에 타이베이 국군 묘지에 안치할 계획이었으나 무산되었고 2007년도에는 고향인 저장 성에 안치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2008년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취소되었다.[38] 장제스는 이곳에 본토 수복을 위한 군사 작전을 지휘할 비밀 지휘소까지 건설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훗날 공개된 정부 문서에서 밝혀졌다.[39] 이것은 량치차오의 신민설에서도 언급되고 있다.[40] 거부하긴 했지만 중일 전쟁 발발 직전에는 이미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1937년 12월 입법원이 열릴 예정이었다.[41] 예컨대 팩스턴의 견해를 따르면 후안 페론이나 안토니우 살라자르.[42] 장징궈는 노장인 아버지처럼 소장(小蔣, 작은 장)이라 불렸다.[43] 2008년 칭화대 교수 왕치(王奇, 왕기)가 Chiang Kai-shek이 장제스임을 알지 못하고 창카이선(常凱申, Cháng Kǎishēn, 상개신)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번역하여 크게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 이후 '창카이선'과 '창공(常公, 상공)'이 중국 내에서 장제스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고...[44] 한국에는 청와대 안에 대통령의 살림집(공관)이 있으나, 중화민국은 밖에 있으며, 거기에서 총통부로 출근한다. 현임 차이잉원의 관저는 리덩후이 집권기 때부터 쓰이는 곳으로 총통부와 약 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45] 주로 자수, 그림을 했으며, 관저에 걸린 미술품의 상당수가 쑹 여사의 작품이다.[46] 일설에는 폴란드 침공 때도 있었다고 한다.[47] 짱개(중국인) + (조)석 이라서 짱개석이라고 한다...[48] 다만 중일전쟁 중에는 담배를 조금 피우기도 했다.[49] 다만 장징궈에게는 비서와 사통해서 낳은 쌍둥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쪽 계통 자손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장징궈 항목 참조.[50] 장제스는 열혈 중앙집권주의자로 표준중국어를 유일 국어로 밀었지만 본인은 국어가 어색했다. 이는 숙적인 마오쩌둥과 이 둘의 대선배인 쑨원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오쩌둥도 역시 표준중국어만 유일한 공용어로 지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사석에서는 고향인 후난성의 샹어를 주로 썼고 공식석상에서 표준중국어를 쓰긴 하는데 상당히 서툴렀다. 쑨원의 경우 광동어가 모어이고 정치활동에 쓰던 주 언어는 영어였다. 그야 다들 어른이 되고 나서 외국어 배우듯 표준어를 배웠을테니[51] 카이로선언의 국제정치적 의미, 최영호, 영토해양연구, p. 72.[정병준,2014,315-318]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역사비평, 2014, p.315-318[52] 여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회담에서 이에 대해 물어보자 리처드 닉슨은 "대만은 중국대륙의 마지막남은 자유의 보루"대답했고, 이를 듣고 장제스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53] 1975년 4월 7일자 장제스 사망을 다룬 동아 일보 기사.[54] 다만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기위해 대만과 단교하며 한국에 배신감을 느끼는 등, 반한 감정도 꽤 있는 편이다.한국-대만 관계참조[55] 작게는 영향력 확대, 크게는 위성국화.[56] 기밀 문서 열람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장제스의 일기를 비롯한 장제스의 개인 기록들까지도 제공하였다.[57] 다만 1917년에 푸젠성 지역의 전투에 휘말리면서 1917년 이전의 자료는 일부 망실되었다.[58]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는 시안 사건 때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체포했지만, 장제스의 일기를 읽어본 후, (항일을 기피하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애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를 처형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59] 장제스 생가와 모친 묘까지 모든 것이 박살나던 시기에 이 일기가 발견되어 어떠한 문제도 없이 남아있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60] 본명은 황런위(黄仁宇)로 중일 전쟁에도 참전했던 중화민국군 장교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2000년에 타계할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전공은 중국 근현대사는 아니고 명나라 경제사다.[61] 2004년에 원고를 받았는데 중국어 판과 영어 판이 너무도 다른 등 번역에 애로 사항이 꽃피어 2009년에야 완성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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