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트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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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ght Honourable
데이비드 트렌치 경
Sir David Trench

GCMG[1] MC[2] DL[3]
파일:220px-Sir_David_Crosbie_Trench.jpg
본명
데이비드 클라이브 크로스비 트렌치
(David Clive Crosbie Trench)
중국명
다일린지
(戴麟趾)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915년 6월 2일
[[인도 제국|
인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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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퀘타
사망
1988년 12월 4일 (향년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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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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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도싯 실링스톤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컬리지
재임 기간
제3대 영국령 솔로몬 제도 총독
1961년 3월 4일 ~ 1964년 6월 16일
제24대 영국령 홍콩 총독
1964년 4월 14일 ~ 1971년 10월 19일
정당
''' [[무소속|
무소속
]]'''

1. 개요
2. 생애
3. 퇴임 이후



1. 개요[편집]


데이비드 트렌치는 제24대 영국령 홍콩 총독이다.


2. 생애[편집]


1915년 인도 제국 퀘타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후에 솔로몬 제도 총독 등을 지내고 영국령 홍콩 총독으로 부임했다.


2.1. 영국령 홍콩 총독[편집]


1964년 4월 14일 영국령 홍콩 총독으로 취임했다. 취임 당시 1960년대 홍콩은 물 부족, 난민 유입 등의 문제들에 시달렸는데, 특히 난민들에 의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수자원 부족으로 인해 1963년과 1967년 두 해에 걸쳐 심각한 가뭄까지 발생하여 이를 직면한 트렌치는 물 사용량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후 물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수호를 건설하고 물 가격들을 조정하여 홍콩의 물 공급량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1970년 트렌치는 2,800만 홍콩 달러를 투자하여 담수호의 높이를 높이고 모래밭 정수장 등을 확장하여 1971년 퇴임 후에야 홍콩의 물 공급은 더욱 완화되어졌다.

문화대혁명, 67폭동 등 여러 테러와 시위들로 어려움 속에서 극복하면서 이후 행정부는 1968년 홍콩 정부, 주민들의 간의 역할으로 홍콩 구의회를 조직하고 1971년 주 6일 84시간 근무제를 입법화하기도 하였다.


3. 퇴임 이후[편집]


총독 퇴임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1973년부터 1981년까지 도싯 시의회에서 일했으며 재임 중 1977년 부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988년 실링스톤 자택에서 73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은 트렌치에 대해 "트렌치는 뛰어난 삶을 살았습니다. 식민지 사무부에서 일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홍콩에서 보냈으며 이 기간동안은 그의 생애의 전성기였습니다. 트렌치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홍콩은 사회적, 경제적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침착하고 침착하며 모든 상황에 직면한 그의 현명한 리더십으로 하나씩 극복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홍콩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문제점들을 대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며 오늘날 홍콩을 국제도시로 발전시켰습니다."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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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rder of St Michael and St George. 세인트 마이클 앤드 세인트 조지 훈장.[2] Military Cross. 군 십자 훈장.[3] Deputy Lieutenant. 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