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2세 드 부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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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이 2세 드 부르봉.jpg
성명
루이 2세 드 부르봉
Louis II de Bourbon
생몰년도
1339년 8월 4일 ~ 1410년 8월 10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부르봉
사망지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몽뤼송
아버지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어머니
발루아의 이자벨
형제
잔, 블랑슈, 본, 카트린, 마르그리트, 이사벨, 마리
배우자
오베르뉴의 안
자녀
장 1세, 이자벨, 루이
직위
부르봉 공작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공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2. 생애[편집]


1339년 8월 4일 프랑스 왕국 부르봉에서 제2대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과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 이자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잔[1], 블랑슈[2], 본[3], 카트린[4], 마르그리트[5], 이자벨[6], 마리[7]가 있었다.

1356년 프랑스 국왕 장 2세에 의해 랑그독, 오베르뉴, 페리고르, 푸아티에 보안관으로 선임된 장 드 베리의 수행원이 되었다. 이후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버지가 전사한 뒤 부르봉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프랑스 대의원 직위를 받았다. 1359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포위된 랭스를 구출하는 임무를 성사시켰으며, 1360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화 협약인 브레티니 조약이 무사히 체결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장 2세의 석방 대가로 잉글랜드 궁정에 인질로 남겨졌다. 그가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 이자벨이 대리 통치했다.

그러나 그가 부재하는 동안 부르봉 공국은 혼란에 빠졌다. 자유 용병대는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심한 약탈을 일삼았고, 지역 영주들은 그들과 싸우기는커녕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거나 심지어 약탈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1366년 석방되어 부르봉 공국으로 귀환한 그는 용병들과 맞서기 위해 황금방패 기사단을 창설하고 자기 영지의 주요 영주들을 여기에 배속시키기로 했다. 1367년 1월 1일에 교단 창설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다.

15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카바레 도르빌에 따르면, 이날 부르봉 공작의 궁정에 위그냉 쇼보라는 인물이 찾아와서 공작에게 그의 가신들이 저지른 악해를 집필한 서적을 제출하면서, 여기에서 악행이 적혀진 영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재산을 멀수해, 공국의 금고를 충족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루이 2세는 이 책을 화로에 던져 불태운 뒤, 위그냉이 자기를 따르는 영주들을 중상모략한다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가신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해 사실상 사면했다. 이렇게 해서 영주들을 포섭한 뒤, 그는 영주들의 지원에 힘입어 1367년과 1368년에 두 차례의 원정을 단행해 부르봉 영지에서 활개치던 자유 용병대를 몰아냈다.

루이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이 백년전쟁 초기에 점령했던 영토를 탈환하려는 샤를 5세를 도왔다. 그는 샤를 5세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지시에 따라 잉글랜드군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소규모 기습 작전만 수행했고, 1369년부터 1347년 사이에 리무쟁, 브르타뉴, 기옌에서 약 30개의 요새를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1374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휴전 협약이 체결된 뒤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무어인과 싸우기 위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갔지만,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가 십자군으로 포르투갈을 치게 하려고 하자 여기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1378년 샤를 5세의 지시에 따라 노르망디에서 카를로스 2세와 전쟁을 벌여 카를로스 2세가 가지고 있던 요새 대부분을 점령했다.

1380년 9월 16일 샤를 5세가 사망한 후, 루이 2세는 어린 국왕 샤를 6세의 섭정 위원회 일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외조카이기도 한 샤를 6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샤를 6세는 그를 "선량한 공작"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순행을 떠날 때 그가 항상 동행하게 했다. 그는 어느 한 정파에 소속되길 기피하고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해 수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다. 샤를 6세는 즉위 1주년 행사 때 부르봉 가문의 상징이었던 "날아다니는 연" 또는 "날개 달린 사슴"을 자신의 상징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1390년 튀니지를 거점으로 삼고 지중해 각지를 약탈하는 무어인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제노바 공화국십자군에 가담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했다. 이후 프랑스 궁정에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 파가 치열한 정쟁을 벌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영지 운영에 힘을 기울였으며, 1392년부터 광기를 드러낸 샤를 6세를 돌봤다. 1400년 그의 조카인 에두아르 2세 드 보주가 사망하면서 그에게 보졸레를 물려줬다. 또한 1398년부터 1400년까지 키프로스 왕국에 사절로 가서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프랑스 기사들을 돌려받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트 1세와 협상했다. 이후 바예지트 1세에게 포위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돕기 위한 프랑스 원정대에 부르봉 기사 장 드 샤토모랑을 비롯한 루이 2세의 기사 다수가 참여했다.

1405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져 왕권을 저해하는 것을 경계해 루이 1세 도를레앙과 손잡고 맞섰지만, 1407년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암살당하자 부르봉 영지로 은퇴하고 비시에 셀레스틴 수도원을 세웠다. 1409년, 루이 2세는 직접 동방으로 떠나 예루살렘에 순례하고, 누이 마리의 유산을 통해 자신이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모레아 전제군주국에 개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내의 상황이 혼란스럽자 계획을 취소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이 일전에 조카로부터 몰려받았던 보졸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내전이 발생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루이 2세는 1410년 4월 아르마냐크 파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장 1세가 아르마냐크 파에 가담하자, 그는 아들을 심하게 꾸짖기도 했다. 그러다가 1410년 여름에 마침내 주위의 설득에 따라 아르마냐크파에 가담하기로 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인 1410년 8월 10일 몽뤼송에서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3. 가족[편집]


  • 오베르뉴의 안(1358 ~ 1417): 오베르뉴 8대 도팽 베르트랑 2세 드 클레르몽의 딸.
    • 장 1세(1382 ~ 1434): 4대 부르봉 공작.
    • 이자벨(1390 ~ 1452): 푸아시 수녀.
    • 루이(1388 ~ 1404): 보주의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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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38 ~ 1378,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왕비[2] 1339 ~ 1361,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의 부인.[3] 1341 ~ 1402,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의 부인[4] 1342 ~ 1427, 하쿠르 백작 장 6세의 부인[5] 알브레느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의 부인.[6] 1345, 요절[7] 1347 ~ 1401, 푸아시의 수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