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리오 벨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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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리오 벨로모
Liborio Bellomo


파일:L. Bellomo.jpg

이름
Liborio Salvatore Bellomo
리보리오 살바토레 벨로모
출생
1957년 1월 8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마피아
신체
175cm, 73kg#
배우자
카밀 피오리노 (1979년 ~ 2013년)[1]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어록
5. 리보리오 벨로모에 대한 언사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일명 바니(Barney)[2], 마피아 천재(The Mafia Prodigy)

20세기 후반의 미국 조직범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 여겨지는 빈센트 지간테의 후계자다.


2. 생애[편집]


리보리오 벨로모의 할아버지는 1879년 5월 27일 시칠리아 코를레오네 마을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화공 및 정육점 주인 행세를 한 그가 마피아 조직원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역사적 맥락, 기록된 활동, 악명 높은 조직범죄 인물과의 긴밀한 가족 관계 등을 고려하면 그가 이탈리아미국을 오가는 초기 마피아 조직원이었다고 단정하기란 쉬운 일이다. 1972년 2월 11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의 유산은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 행동대원이 되는 장남 살바토레 벨로모가 이었다.

리보리오 벨로모는 상술한 살바토레 벨로모의 아들로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지오바나 디질리오의 가문 역시 시칠리아 코를레오네 마을 출신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일찌감치 범죄 세계에 가담한 리보리오 벨로모는 17세에 총기 소지 혐의로 기소되어 3개월의 보호관찰을 선고받았는데, 이미 이 시점의 그는 폭력배 지망생들에게 전설로 여겨졌다. 리보리오 벨로모는 마피아 조직원들이 준 어떤 종류의 임무도 자원했고 이를 완수하려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빠르게 암흑가에서의 명성을 쌓았다. 10대 후반엔 브롱크스 남부에서 전개되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도박 사업을 감독하고 있었고 이맘때쯤 여러 건의 마피아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10대 때 암흑가 살인 작업을 수행했다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입증되진 않았지만 이는 단순한 소문 이상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조직 생활을 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던 리보리오 벨로모는 몬시뇰 스캔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파밍데일 주립대학교 장례지도과에 입학해 1년을 다녔다.

1977년 리보리오 벨로모는 약관 20세의 나이로 제노비스 패밀리에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했다. 이는 미국 마피아 역사상 최연소 입단 사례 중 하나였다.[3] 당시 벨로모의 입단식엔 그의 아버지도 참석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9년 22살의 리보리오 벨로모는 카밀 피오리노와 결혼했다. 훗날 그들은 한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을 둔다.

1980년 1월 10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살바토레 벨로모는 사망하기 전 제노비스 패밀리의 거물이자 자신의 친구인 앤서니 살레르노에게 아들을 잘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살레르노는 위독한 친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보장했고 실제로 약속을 지켰다. 이후 리보리오 벨로모는 패밀리 지부장 사베리오 산토라의 조직에 소속되어 그의 운전기사가 되었는데, 이듬해 산토라가 부두목으로 영전하자 조직을 물려받아 25세에 지부장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벨로모. 당시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주요 대화 주제는 "두목 빈센트 지간테가 어린 벨로모에게 중대한 간부 직책을 왜 이리도 빨리 맡겼는가?"였다.

1980년대 초반 리보리오 벨로모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초신성으로 여겨졌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는 부두목 사베리오 산토라의 조언을 받아들여 벨로모를 총애했다. 얼마 뒤 그는 수뇌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마권업, 도박업,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후 마피아 자금을 뉴욕 주플로리다 주의 부동산과 다양한 벤처 사업에 투자했고 여러 건설사, 폐기물관리사, 자판기유통사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동 공갈 같은 마피아식 화이트칼라 범죄에도 연루되었다. 한편, 노조 침투는 그를 FBI의 감시망에 올려놓았다. 이에 벨로모는 법망을 피하고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여러 별명과 가명을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바니', '스키니 가이', '바니 보이', '키드', '베니', '영 바니', '레오', '토미 바니', '리보리오 블룸', '바니 블룸' 등이 있다.

1987년 3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빈센트 카파로가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를 어기고 정부 측 증인이 되자 몇몇 조직원들이 보복으로 그의 아들을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카파로의 아들은 리보리오 벨로모와 함께 사업을 하고 있었고 그가 제거될 경우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벨로모가 카파로의 아들을 살해하려는 다른 조직원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이듬해 카파로는 가족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이유로 벨로모에게 불리한 증언을 철회한다.

리보리오 벨로모는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처럼 정신질환자 연기까진 하지 않았지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명품 정장으로 한껏 멋을 부린 당대 다른 마피아들과 달리 평범한 후드티나 청바지를 입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벨로모의 옷차림을 알 수 있는 사진. 때때로 그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면 자신의 얼굴을 스카프, 선글라스, 손 등으로 가리곤 했다. 그는 전화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휴대전화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내는 무선호출기를 선호했다. 특히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때의 벨로모는 훨씬 더 조심스러웠다. 미행당하지 않기 위해 자동차를 여러 번 갈아탔고 신호등을 무시한 채 달렸다. 오토바이 애호가로도 유명한 그는 FBI가 벨로모 수사에 투입한 40만 달러의 공작금 중 약 20만 달러를 가지고 감시를 피해 도주했는데, 요원들과 추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따돌리면서 FBI는 40만 달러의 공작금 중 2만 7천 달러를 회수하는데 그쳤다. 당대 익명의 FBI 요원은 이런 벨로모를 '유령(Ghost)'으로 묘사했다.

1987년 5월 제노비스 패밀리의 부두목이자 리보리오 벨로모의 후견인인 사베리오 산토라가 암으로 사망했다. 그 이듬해 벨로모는 31세라는 어린 나이로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 겸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맡으며 두목 빈센트 지간테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벨로모를 소개하는 당대 신문 기사. 이 시기 그는 대부분의 패밀리 사업을 관리하게 되었고 엄청난 재산을 증식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까지 부동산에 크게 관여했는데, 약 100평 크기의 별장과 쇼핑센터에서 아파트 단지까지 이르는 모든 것을 소유했다. 그는 여러 건설사의 대표였고 신문중개서비스사의 공동대표였다. 동시에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아콘 리싱 코퍼레이션'이란 회사를 소유하며 연료회사 '사브리지 연료'의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또 '서버번 카팅 코퍼레이션'과 '주식회사 프라임 카팅'의 사업 파트너로도 확인되었다. 벨로모는 자신의 영향력으로 패밀리 내 큰 사업들을 도맡아 했는데, 항만하역과 밀수 같은 항구에서의 이권을 포함해 뉴욕 시 맨해튼에 위치한 대형 전시장 제이콥 재비츠 센터의 노동조합을 관리했고 랄프 투티노, 레오루카 과리노, 살바토레 라르카 같은 전국구 헤로인 밀매상들과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어 1988년에 마약 유통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지만# 상술했듯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빈센트 카파로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벨로모에게 불리한 증언을 철회하면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93년 4월 리보리오 벨로모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으로서 감비노 패밀리 두목 대행 존 고티 주니어와 중요한 담판을 가졌다. 당시 고티 주니어는 감비노 패밀리 정규조직원(Made member) 바르톨로뮤 보리엘로 살인사건의 배후에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프레스톤 가리타노가 있다고 믿어 벨로모에게 그를 살해하라고 요구하며 만약 제노비스 패밀리가 행동에 옮기지 않을 시 자신들이 직접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고티 주니어는 갑작스러운 분노 표출과 존 고티의 아들이자 후계자라는 오만함으로 유명했는데, 이러한 성향을 가진 그는 침착하고 노련한 벨로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제노비스 패밀리가 가리타노를 처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비노 패밀리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1994년 리보리오 벨로모는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를 대신해 마피아 위원회 회합에 참석했다. 그 회합의 또 다른 참석자였던 보난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비탈레는 훗날 "당대 위원회는 제노비스 패밀리, 특히 벨로모가 지배했다."라고 회상한다. 그 회합에서 벨로모를 위시로 한 마피아 지도자들은 제3차 콜롬보 항쟁을 종결시키자는 결론을 내렸다. 같은 해 6000만 달러 규모의 연금 사취사건에서 벨로모의 처남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으로 알려진 제럴드 피오리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벨로모는 1993년 1월부터 1994년 6월까지 제럴드 피오리노의 형제인 앤서니 피오리노를 375번이나 호출했다고 한다. 한 수사관이 결론 내렸듯 이 통신은 '친척 간의 우발적인 접촉을 넘어선 것'이었지만 사취사건과 벨로모와의 연관성을 입증시키지는 못했다.

1995년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에서 승리하여 조직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쥔 조셉 멀리노는 루케시 패밀리의 인정을 받지 못해 마피아 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보리오 벨로모의 제노비스 패밀리가 멀리노의 지위를 인정했고 그는 필라델피아 마피아의 최고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4]

1996년 약 20년 넘게 교도소 내부를 보지 않으며 암흑가에서 승승장구하던 39세의 리보리오 벨로모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으로 지목되어 마피아를 겨냥해 제정된 RICO 법으로 기소되었다. 벨로모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FBI의 브리핑 영상. 제노비스 패밀리의 1인자로 빈센트 지간테를, 2인자로 벨로모를 소개하는 뉴스 영상. 벨로모는 1988년에 뒷마당에서 총에 맞아 살해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안토니오 디로렌조와 1991년에 차량 트렁크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된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랄프 데시몬에 대한 살인교사 및 방대한 공갈 혐의를 받았다. 당시 연방정부는 제노비스 패밀리가 살해된 피해자들을 밀고자 혹은 잠재적 밀고자로 의심하여 처형한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디로렌조는 과거 중남미에서 마약 관련 사업을 하다 파나마 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출소 후 공공연하게 마약과 범죄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다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리보리오 벨로모는 마이클 잭슨을 변호했던 벤자민 브리프만 변호사를 선임했고 살인교사 혐의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통과하는 등 법정싸움을 벌인 끝에 2건의 살인교사 혐의를 취하시켰고 갈취 혐의를 인정하여 징역 10년과 몰수 25만 달러를 선고받았다.[5] 이후 벨로모가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통과하기 위해 연방구치소 내에 특정 약물을 반입하여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명확히 입증되지는 않았다. 한편, 연방교도소에 수감된 벨로모는 이미 거리에서 확립된 그의 명성과 더불어 다른 수용자들에게 해준 각종 법률 조언 덕분에 '민중영웅(Folk Hero)' 대우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리보리오 벨로모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부두목 대행 마이클 제네로소와 상담역(Consigliere) 제임스 아이다를 비롯한 다수의 조직원들과 함께 기소되어 상술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아이다는 벨로모와 제네로소가 혐의를 인정하여 각각 징역 10년과 징역 18~21개월이라는 감형된 형량을 선고받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아이다는 사법기관에 유죄인정을 하여 형량을 감형 받는 효율적인 전략조차 치욕으로 여긴 구식 마피아였기 때문이다.[6] 보도에 따르면 아이다는 구속 기소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빈센트 지간테와 접촉해 벨로모 살인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일찍이 자신의 후계자로 벨로모를 지명했던 지간테가 아이다의 요청을 거부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아이다는 유죄인정시 징역 15년이라는 연방정부의 제안을 거부하며 공판절차에 돌입했고 결국 유죄판결을 받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조지 바론은 자신이 1990년대에 플로리다 항구에서 패밀리 사업을 전개하며 당시 조직의 두목 대행이었던 리보리오 벨로모를 위한 수표 현금화 회사를 설립하고 벨로모 애인의 남동생에게 연봉 16만 달러짜리 운송회사 사무원 자리를 주선했다는 비화를 밝혔다. 같은 해 벨로모는 국제항만노동자협회(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와 관련된 돈세탁 혐의로 1년의 형량이 추가되었다. 당시 벨로모가 법원에서 마주친 자신의 두목 빈센트 지간테에게 윙크를 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2004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보난노 패밀리 두목 조셉 마시노에 의하면 1990년대에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가 자신을 살해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리보리오 벨로모를 통해 들었다고 한다.#

2006년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속 변호사 피터 펠루소는 자신의 비위행위가 발각되자 정부 측 증인이 되었다. 그는 1998년에 리보리오 벨로모의 교도소 접견을 간 어느 날 그로부터 부하 조직원 랄프 코폴라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패밀리 측에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아 본인이 수행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코폴라는 같은 해 실종되어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그의 처형 사유로는 수감된 벨로모에 대한 무례한 태도라는 설과 패밀리 수뇌부의 돈을 횡령했다는 두 가지 설이 공존한다. 당시 사법당국에서는 코폴라의 시신이 다른 마피아들에 대한 경고 차원으로 눈에 보이는 장소에 버려지지 않고 증발해버린 것이 의외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암흑가 소식통은 "그들이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 대상은 전체 대중이 아니다. 그 남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마피아 그 자체가 대상이다.(The people they're looking to send a message to is not the entire public. It's the mob itself, which totally understands that the guy is gone.)"라고 설명했다. 이후 벨로모는 코폴라 살인교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이번에도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 다만 함께 진행한 우편 사기 혐의는 인정되어 1년의 형량이 추가되었다. 한편, 코폴라 살인교사 혐의 입증에 실패한 이 재판은 연방정부가 제노비스 패밀리와의 싸움에서 당한 가장 큰 패배로 여겨진다. 당시 공소제기를 담당한 연방검사 미리암 로카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삼키기에는 쓰라린 알약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7]

2008년 약 12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리보리오 벨로모는 2005년에 두목 빈센트 지간테가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사망한 뒤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던 패밀리 내에서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당시 제노비스 패밀리는 21세기를 맞아 노동 공갈 같은 기존의 전통적인 범죄 사업을 유지함과 동시에 새로운 범죄 수법들을 도입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카라스포츠 배팅 같은 도박업의 영역을 해외 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공간으로 확장시켰고 기존에 시칠리아 마피아와 함께하던 국제 마약 사업을 은드랑게타 같은 본토 조직과의 연계로 대체했으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잘 알려진 신종 모기지저당증권 사기도 적극 활용했다. 여기에 도시의 일부 지역에서 새롭게 생겨난 대마초 시장을 통제했고 펌프 앤드 덤프(Pump and Dump) 주가 조작도 감행했다. 몇 년 뒤 변화된 암흑가에서 입지를 다진 벨로모는 정당성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이 되었다.

2016년 익명의 수사기관 관계자가 "지금의 우리로서는 리보리오 벨로모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인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브루클린브롱크스의 주요 조직범죄 인사들이 맨해튼 남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다."라고 밝혔다.#

역대 제노비스 패밀리의 다른 두목들처럼, 리보리오 벨로모 역시 상담역(Consigliere) 피터 디키아라 같은 부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배후에 남는 전략을 사용한다고 알려졌다.[8] 수사기관에 의하면 다니엘 파가노 같은 패밀리 지부장들이 벨로모에게 정보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기 위해 디키아라를 찾아간다고 한다. 디키아라와 부하 조직원들이 포착된 2010년대 중반 FBI 감시 사진.

취재에 따르면, 리보리오 벨로모는 뉴욕 시 브롱크스뉴욕 주 교외 지역에 자신이 합법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수백만 달러 가치의 수많은 아파트로부터 매달 상당한 임대료를 받고 있으며 그의 공식적인 거주지는 뉴욕 주의 한 주택이지만 주로 뉴욕 시내에 위치한 자신 소유의 아파트 중 한곳에 머무른다고 한다. 또한 마이애미 해변가에 위치한 맨션도 소유 중이며 브롱크스를 기반으로 한 폐기물관리사를 운영하면서 여러 건설사와 사업•투자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제노비스 패밀리에 추종세력(Associate)으로 잠입해 수년간 위장수사를 펼친 익명의 FBI 요원은 뉴욕 마피아와 필라델피아 마피아 간 범죄 공모를 밝혀 총 46명을 기소하는 뛰어난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작전 기간 동안 "리보리오 벨로모는 단 한차례도 만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9]

2022년 1월 8일 리보리오 벨로모의 생일을 맞아 수뇌부가 포함된 제노비스 패밀리 고위 간부들의 회동이 포착되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벨로모는 FBI의 철저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석해 부하들과 사진을 찍었으며 회동이 열린 장소는 전설적인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 두목 빈센트 지간테의 조카가 운영하는 지간테 레스토랑 & 바였다고 한다. 회동 사진.[10]

3. 여담[편집]


  • 빈센트 지간테의 뒤를 이은 리보리오 벨로모의 풀 네임은 '리보리오 살바토레 벨로모'다. 그에겐 '리보리오 토마스 벨로모'라는 이름의 2살 어린 사촌동생이 있다. 둘 다 이름이 '리보리오 벨로모'로 같고 별명 역시 '바니(Barney)'로 똑같다. 제노비스 패밀리에 가담한 것조차 똑같다. 심지어 둘의 아버지는 형제고 어머니는 자매다. 연방정부에서조차 이 둘을 혼동해서 1997년에 동생 벨로모에게 제기해야 할 공소를 당시 수감되어 있던 형 벨로모에게 제기한 실수가 벌어졌다. 정부에서는 형 벨로모가 뉴욕 주 펠햄 마너와 플로리다 주에 주소지를 두고 있고 동생 벨로모는 뉴욕 시 퀸즈 베이 사이드에 주소지를 두고 있으며 동생 벨로모가 자신이 공소를 감당한다는 진술서를 작성해 성명 모용을 바로잡았다고 밝혔다.

  • 리보리오 벨로모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녀 사브리나 벨로모는 변호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약 12년의 수감 생활을 겪은 탓에 딸의 고등학교•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2007년 아버지의 재판 때 변호인단에 속해있던 딸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며 눈물의 변론을 했다. 벨로모 부녀의 관계는 2007년에 제작된 드라마 소프라노스의 마지막 시즌에서, 원래 의사를 지망하던 주인공의 딸이 아버지를 돕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대로 진학하는 설정에 영감을 제공했다고 보인다.

  • 2012년 어느 매체에서 세계의 15대 범죄지도자와 마약왕(Top 15 Crime Bosses and Drug Lords) 순위를 선정했는데, 이 매체는 리보리오 벨로모가 미국 마피아 최대 파벌의 지도자라는 점을 고려해 그를 6위로 선정했다.[11]

  • 2013년 리보리오 벨로모의 아내 카밀 피오리노가 암으로 사망했다.

  • 2018년 리보리오 벨로모를 보좌하던 상담역(Consigliere) 피터 디키아라가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공갈죄로 약 5년간 복역한 뒤 2007년에 출소한 바 있다. 생전에 그가 소유한 맨해튼 로어 이스트사이드 73번가의 회원 전용(Members Only)이라 적힌 사교클럽은 제노비스 패밀리의 아지트 중 한곳으로 여겨진다. 구글 스트리트 뷰로 찾은 클럽 외관.[12]

  • 2019년 마이클 라구사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거리 책임자(Street Boss)로 확인되었다. 그는 2001년 국제항만노동자협회(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 이하 ILA) 갈취 재판의 피고인 명단에서 이름이 확인된다. 당시 그의 패밀리 내 직책은 행동대원이었다. 마이클 라구사는 2005년에 출소했고 10년 넘게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으나 리보리오 벨로모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하나로 추정된다. 한편, 마이클 라구사의 형제 조셉 라구사는 대도시해양관리도급업자협회(Metropolitan Marine Maintenance Contractors Association 이하 MMMCA)의 협회장이 되었다. MMMCA는 1945년에 제노비스 패밀리와 감비노 패밀리가 20여 개의 항만하역사를 규합하여 만든 단체로, 항만노조인 ILA와 함께 모든 노사 간 단체협상을 담당하고 수억 달러에 달하는 항만노조원들의 임금과 연금을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알려져 있다.

  • 2020년 뉴욕 시에 거주하는 스티비 웨스트사이드란 남자가 여자친구의 돈 2만 달러를 훔친 혐의로 그녀에게 고소당했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자신이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고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프랭크 칼리와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 입단 동기이며 코스타리카에 서버를 둔 온라인 도박 사업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매달 상납 받는다는 거짓말을 해왔다고 한다. 물론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은 리보리오 벨로모이며 고소 당한 남자는 마피아 조직원도 아니고 코스타리카의 온라인 도박 사업과도 일절 관계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남자는 불법 총기 소지•도박•스토킹 혐의로 입건되었다.

  • 2021년 리보리오 벨로모의 아들 살바토레 벨로모는 자신의 SNS에 구글 지도로 동네를 살펴보던 중 자신과 피자를 든 아버지가 함께 걷고 있는 위성 사진을 발견했다는 글을 게시했는데, 이후 이 이야기가 레딧 등지로 퍼져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4. 어록[편집]


저는 공개 연설가 같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I'm not a public speaker or anything.

변호사 딸이 눈물을 흘리며 변론을 마치자 그녀에게 한마디 하라는 연방판사의 권유에 대한 답변.#



5. 리보리오 벨로모에 대한 언사[편집]


30년 전 빈센트 '턱' 지간테는 그를 강력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으로 임명했습니다. 5년 전 그는 조직범죄계의 아이비리그의 공식적인 지도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리보리오 '바니' 벨로모는 마피아와 수사기관 관계자 모두에게 사실상 "보이지 않는 사람"인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 그는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두목이자 소위 조직범죄계의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지도자입니다.

Three decades ago, Vincent (Chin) Gigante tabbed him as acting boss of the powerful Genovese crime family. Five years ago, he is known to have taken over as the official leader of the so-called Ivy League of Organized Crime. Yet Liborio (Barney) Bellomo remains an enigma, a virtually “invisible man” both to wiseguys and to the law enforcement community. / He’s the most powerful Mafia boss in the country, the leader of the Genovese crime family, the so-called Ivy League of Organized Crime.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


그는 진짜 물건입니다.

He's the real deal.

연방검찰수사관 케네스 맥카베#


약 12건의 작업을 수행한 냉혈한 살인자.

Stone-cold killer with a dozen hits.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다니엘 프로벤자노#


바니는 똑똑하고 터프하며 이목을 끌지 않아 모두가 그를 존경한다.

Barney's smart, he's tough, he's low-key, and everybody respects him.

익명의 암흑가 소식통#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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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별하였다.[2] 별다른 뜻 없이 '벨로모'의 애칭이다.[3] 감비노 패밀리의 존 고티 역시 벨로모와 같은 해에 37세의 나이로 정규조직원이 되었다. 즉, 벨로모와 고티의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둘은 입단 동기인 셈이다. 단, 고티는 바로 지부장 대행이 되었다.[4] 벨로모가 멀리노를 후원했다는 사실은 2018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 존 페니시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아마 이러한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린 사람은 역시 벨로모의 상관인 빈센트 지간테였을 것이다.[5] 당시 벨로모가 수감되자 도미닉 시릴로나 프랭크 서피코 같은 인물들이 그의 빈자리를 채웠다.[6] 오늘날과 달리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피아 내부에 유죄인정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물론 유죄인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밀고자가 되어 동료들을 배신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처형 혹은 파문 사안이다.[7] 뉴욕주경찰청은 2018년에도 코폴라의 소재를 알고 있는 사람의 제보를 받고 있다.[8] 과거 필립 롬바르도토마스 에볼리프랭크 티에리를, 빈센트 지간테앤서니 살레르노와 벨로모를 전면에 내세웠다.[9] 당시 이 요원의 활약으로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조셉 멀리노가 2년형,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파스칼레 파레로가 7년형,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유진 오노프리오가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10] 좌측부터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마이클 라구사(Michael Ragusa), 미상, 지부장 파스칼레 팔세티(Pasquale Falcetti), 두목 벨로모, 지부장 랄프 발사모(Ralph Balsamo)[11] 1위는 러시아 레드 마피아셰묜 모길레비치, 2위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마피아의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 3위는 멕시코 시날로아 마약 카르텔의 호아킨 구스만 로에라다.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구미의 시노다 겐이치는 7위로 선정되었다. 물론 이런 흥미 위주 순위들이 다 그렇듯 큰 공신력이나 의미는 없다.[12] 여길 드나드는 사람들은 마피아 관련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