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대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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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대수로
النهر الصناعي العظيم
Great Manmade River Project,GMR


국가
[[리비아|

리비아
display: none; display: 리비아"
행정구
]]

착공
1984년
현황
공사중
유형
수로 공사

1. 개요
2. 역사
3. 계획
3.1. 1단계 공사 시공
3.2. 2단계 공사 시공
4. 중단
5. 효과
6. 문제점



1. 개요[편집]


리비아 대수로는 남부 사하라 사막지하수를 끌어올려 리비아 북부 지중해 해안의 도시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다. 지름 4m, 길이 7.5m, 총길이 4,000km가 넘는 거대한 송수관을 사막을 가로질러 지하에 매설해서 하루에 물 650만t을 북부 지중해 연안을 공급하는 계획이다.

20세기 단일 토목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현재 공사중에 있으며, 본래 동아건설이 실행한 프로젝트이다. 회사가 살아있을 당시 이 공사는 동아건설의 단골 홍보 수단이었다.



2. 역사[편집]


1953년, 리비아 정부는 석유 매장 조사를 하다가 내륙부의 사하라 사막의 지하 깊은 곳에 1만 년 이전부터 축적된 대량의 지하수를 발견하게 되는데 발견된 지하수가 무려 35조 톤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1969년 군인이었던 무아마르 카다피 육군 중위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리비아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쿠데타로 집권을 한 만큼 반대세력 또한 존재했는데 이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으로 리비아 국토 대부분의 사막을 농지로 바꾸는 이른바 '녹색 혁명'을 세우게 된다.


3. 계획[편집]


파일:리비아 대수로 공사 개요도.png

1984년, 오래전 발견된 지하수를 퍼 올려 해안부의 트리폴리나 벵가지와 같은 대도시에 식수를 공급하고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같은 농경 지대에 사용될 물을 공급하는 관개 공사를 25년에 걸쳐 2009년 중 완성을 목표로 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무아마르 카다피 본인의 정치생명이 달린 일이었기에 이 공사에 그는 엄청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방대한 규모의 사막을 농지로 바꾸는 이 공사 계획의 규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사는 4기로 나뉘어 1기는 지하수가 가장 풍부한 동남쪽 쿠프라 일대로부터 지하수를 퍼 올려 벵가지시르테 등 중동부 해에 공급하고, 2기는 페잔(Fezzan)의 사브하 근처로부터 물을 퍼 올려 수도 트리폴리미스라타 등 서부 해안에 공급하며, 3기는 1기 수로에 쿠프라의 중심 도시인 알자우프 지선을 추가하고, 4기는 각각 서쪽에서는 가다메스 근처로부터 주와라-사브라타 지역으로, 동쪽에서는 자그붑에서 토브룩을 급수한다. 마지막 5기는 시르테-쿠프라간 1기 수로와, 트리폴리-사브하간 2기 수로를 연결할 계획이다.

수로의 총연장은 4,000 km에 달하며, 깊이 500m, 1,300개 이상의 우물로부터 하루 당 6,500,000 m[math(^3)]의 담수를 공급할 계획이다. 수로가 통과하는 거의 전역이 사막 지대이기 때문에, 직경 4m, 길이 7.5m, 무게는 1개당 75톤의 거대한 PCCP(Prestressed Concrete Cylinder Pipe)관을 지하에 매설해 해안 지역까지 송수한다. 총공사비는 250억 달러 정도이다.


3.1. 1단계 공사 시공[편집]



송수관(파이프) 운반

송수관 매설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였던 만큼 세계 유수의 건설사들이 수주를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1] 이중 동아건설이 최종 발탁되었다. 동아건설은 수주를 따내기 전 대수로 사업정보를 입수하고 관련 부서인 비밀전담반을 만들어 입찰 준비에 들어갔다. 동아 계열사 중 동아콘크리트는 수로 생산을, 대한통운[2]은 송수관 운반을, 동아건설은 송수관 매설 작업을 맡는 효율적인 역할분담으로 39억 달러에 계약하게 되었다.

앞에 적혀있듯이 이 공사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정치생명이 걸린 일이었기에 1단계 건설은 카다피가 민심을 얻기 위해 반대세력이 많은 벵가지 지역에 취수장이었던 사리르, 타저보 지역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각각 955km의 송수관을 연결하는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졌고, 이 1단계 공사에 연인원 1,100만 명과 중장비 550만 대가 투입되었다. 다만 환경이 사막이었던지라 작업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는데 모래와 바람 때문에 지형은 순식간에 바뀌었고, 건설장비의 유리도 시간만 지나면 금세 마모돼서 유리가 뿌옇게 변해 시야 확보가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건설에 필요한 자재들도 전부 아프리카 대륙 밖에서 얻어야 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 1단계 공사에서 무게만 최대 80t에 달하는 송수관이 24만 6,000개가 필요했다. 이로 인해 사리르 지역에 송수관을 만드는 공장을 건설하였는데 제작된 송수관을 공사지역까지 옮기는 규모도 장관이다. 60대의 차량으로 조직된 운반 팀이 차량간격을 500m씩 유지하며 이동하였는데 그 행렬의 길이가 30km에 달했다. 송수관을 매립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매립 후에는 물 한방울 세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엄격한 품질검사를 거쳤다.


3.2. 2단계 공사 시공[편집]


무아마르 카다피 정부는 동아건설이 1단계 공사 수주를 따냈는데도 2단계 공사를 국제경쟁 입찰에 다시 붙였다. 이는 새로 경쟁을 붙여 가격을 떨어트리려는 정부의 계획이었고 설령 이러한 계획 없이 2단계 공사를 동아건설에게 줬더라도 공사규모가 워낙 컸던지라 1단계 공사 수주에서 떨어진 다른 건설사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2단계 공사 수주전은 1985년 6월 25일에 시작하여 총 72개의 업체가 참여하였고 이중 동아건설과 인도의 컨티넨탈사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동아건설은 36억 달러를 제시했지만 컨티넨탈사는 36억 달러보다 더 낮은 27억 달러를 제시했고, 심지어 여기서 더 깎을 수 있다고 했다. 인도가 이렇게 나오자 오히려 리비아측이 당황해서 입찰 중단을 선언했는데 이에 인도 정부가 로비를 하며 "인도엔 핵기술이 있다"며 리비아를 설득했다. 당시 리비아팬암항공기 폭파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미국의 강한 경제제재를 받고 있었는데, 이에 카다피가 핵기술에 손을 쓰기 시작하였고 인도가 이를 눈치챈 것이었다. 사실상 인도가 수주를 낙찰받는 건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아건설은 2단계 공사 수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나오게 된다.


리비아 대수로 수통식 당시 환호하는 리비아 국민들

때마침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1989년 리비아 쿠데타[3] 20주년을 맞아 정식 수통식을 앞두고 정말 물이 나오는가 시험가동을 위해 예비 수통식이 열렸는데 결과는 성공했고 당시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은 그날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막 한 가운데 지표면 저 아래서 나온 샘물이 장장 400km, 높이 10m, 저수량 400만 t의 아즈다비아 저수조에서 콸콸 쏟아지니까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리비아인들은 물 없는 사막에서 물이 곧 신이었습니다.-최원석 회장의 회고-


당시 리비아 정부와 동아건설 직원들도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한 동아건설 직원은 대수로 공사 관리청의 수석위원인 '시알라'라는 사람으로부터 "동아가 최고다. 인도는 물론이고, 다른 회사는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상급자에게 전했고 최회장이 그 소식을 보고받았다. 1989년 8월 15일 리비아 측은 "1987년 4월 6일 실시한 대수로 2차 공사 국제입찰을 무효로 한다."며 국제경쟁 입찰을 없던 일로 만들고 수의계약 입찰로 바꾸었다. 1989년 8월 31일 동아건설은 2단계 공사의 가조인을 체결했다. 공사 규모가 무려 53억 1000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1990년 2월 4일 동아건설은 2단계 공사에 관한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규모가 1단계 공사보다 더 커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과물은 훌륭했다.

2000년 초반 국내 한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최원석 회장은 이 공사로 카다피를 카선생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고 한다. 한국말인 회장님을 발음하여 카다피가 최회장을 헤잔님이라고 부르면서 둘이 웃으며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한다.

4. 중단[편집]


성수대교 붕괴 사고 등 여러 이유로 동아그룹은 파산했고 리비아도 내전을 거치며 3, 4, 5단계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5. 효과[편집]


대수로 공사 이전 리비아의 경작 가능 면적은 리비아 전체 국토의 1.4%에 불과했다. 그러나 1, 2단계 공사 후 경작 가능 면적은 한반도 면적의 6배 이상 넓어졌다고 분석된다. 극심한 물부족을 겪던 지역들은 상황이 크게 나아졌으며 중단됐던 도시개발 사업들도 재개되었다.

비록 3,4,5단계는 시공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1, 2단계만으로도 수도권인 트리폴리와 제2의 도시인 벵가지 일대의 물 공급을 안정화시켰기에 리비아 입장에서는 큰 성과로 여길 수밖에 없다. 2010년대 리비아 내전 중에도 (비슷하게 정치 불안을 겪는 다른 아랍 국가들과 달리) 크게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지 않는 것도 우선 생존에 필수적인 수자원 공급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큰 강들을 끼고 있는 이라크보다 물 공급이 더 잘 되고 있다.


6. 문제점[편집]


대수로를 통해 공급되는 물은 오래전부터 축적된 지하수이다. 그래서 현재의 기후조건에서 지하수량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인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하수 개발이 리비아 남부에 있는 오아시스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총공사비가 250억 달러에 달하는 반면 공사로 인한 이익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즉, 거액의 비용을 들여 공사를 했더라도 지하수가 고갈되면 대수로는 한순간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향후 50년동안 당초 계획한 수량이 공급될 것으로 예측되지만, 50년 이후의 지하수량을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에 더하여 현재 계획중인 대수로는 기술상의 문제나 수질의 문제, 건설비의 상승 등에 의해 착공이 지연되고 있으며 향후 전망도 유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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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주를 따내기 위해 참여한 건설사는 총 31개이다.[2] 현재 CJ 대한통운.[3] 카다피의 추종 세력들은 리비아 혁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당시엔 리비아 혁명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