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파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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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60년 로마군고대 카르타고군이 처음으로 해상에서 맞붙은 해전.


2. 상세[편집]


기원전 262~261년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 공화국은 시칠리아 전체를 공략하기로 결의하고 군대를 대거 파견했다. 그러나 제대로 갖춰진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해안 도시들의 항구를 봉쇄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카르타고 측은 우수한 방어시설을 갖춘 해안 요새에 틀어박힌 채 해상 보급을 받으면서 적이 스스로 소진된 끝에 평화 협상을 제의하기를 기다렸다.

기원전 260년, 로마 정부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함대를 신설하기로 결의했다. 때마침 이탈리아 해안가에 카르타고 퀸퀘레메(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가 난파되었는데, 로마인들은 이를 모델로 삼고 전함 120척을 건설한 뒤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를 함대 지휘관으로 세웠다. 함대는 시칠리아로 향하기 전에 타렌툼 항구에서 그리스계 선원들의 지도하에 해상 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메사나 해협으로 출진한 스키피오는 리파리 제도 수비대가 로마 편으로 귀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리파리 제도는 시칠리아 북동쪽의 작은 섬들로, 이탈리아 본토와 매우 인접했기 때문에 그곳에 주둔한 카르타고군은 로마 공화국의 안보를 항시 위협할 수 있었다. 선원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했고 새로 건조된 선박들은 물이 새거나 지나치게 무거워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노출했지만, 그는 전투 없이 리파리 제도를 접수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고 전함 17척을 차출해 그곳으로 향했다.

로마군은 리파리 항구에 도착한 뒤 그곳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날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분전했고 현재 리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한 함대를 이끌던 한니발 기스코는 즉시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보도에게 20척의 전선을 맡겨 리파리로 파견했다. 그들은 밤에 도착한 뒤 항구를 봉쇄한 후 다음날 아침 적 함대를 향해 불화살을 퍼부을 준비를 했다.

해상 경험이 전혀 없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품고 있던 로마인들은 이 상황에 크게 놀랐다. 일부는 공포에 질려 내륙으로 도망쳤고, 스키피오는 나머지 병사들, 많은 로마 고위 관리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그 후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어 로마에 귀환한 그는 당나귀를 뜻하는 아그노멘 '아시나(Asina)'로 불리며 시민들의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절치부심해 기원전 254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뒤 파노르무스 공략에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스키피오가 무력하게 잡혀버린 뒤 본래 육군을 지휘하기로 했던 가이우스 두일리우스가 그를 대신해 해군을 이끌었다. 그는 한니발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를 상대로 밀레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카르타고에 큰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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