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테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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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41년,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이끄는 로마 해군이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 해군과 아이가테스 제도 앞바다에서 맞붙은 해전으로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해전이다.


2. 상세[편집]


기원전 243년, 로마 정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10여 년간 이어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시칠리아의 카르타고 최후의 거점인 릴리바이움(마르셀라)을 공략하려는 로마군의 공세는 오랫동안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해상 보급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은 로마 해군은 드레파나 해전(249년)에서 완패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여기에 하밀카르 바르카가 시칠리아에 상륙한 이래 에릭스 산에서 로마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유린했으며,(에릭스 산 전투) 카르타고 함대는 종종 이탈리아 본토를 습격해 큰 피해를 안겼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로마 공화국이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17%에 달하는 장정을 상실했다고 추산한다. 아무리 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로마라고 해도, 이 손실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국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시칠리아 섬의 로마군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으며, 로마와 동맹을 맺은 뒤 지금까지 줄곧 인력과 물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리스계 도시국가인 시라쿠사 역시 이 이상의 원조는 힘들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적의 사정을 파악한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가 조만간 협상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원주민 반란과 누미디아 등의 침략에 대처하는데 투입했으며, 시칠리아 섬에는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 병력만 보내고,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대폭 감축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의했다.국고는 이미 바닥났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전쟁에서 승리하면 카르타고에게 부과될 배상금을 받아가는 조건으로 배 한 척을 건조할 자금을 대출받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부유한 시민들은 앞다퉈 사재를 털어 정부에 기부했으며, 돈을 낼 수 없는 시민들은 직접 함선 제작에 뛰어들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새로 건조될 배의 모델로는 지난날 로마 해군을 상대로 신속한 항해술을 선보이며 농락하다가 끝내 붙잡힌 로도스의 한니발의 기함으로 정했다. 그 결과 약 200척의 퀸퀘레메[1]가 건조되었다.

기원전 242년, 집정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새로 건설된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진군했다.[2] 카르타고 측이 시칠리아 섬에 주둔했던 함대를 대거 철수시켰기 때문에, 카툴루스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의 해상 봉쇄를 순조롭게 달성했다. 그는 날씨가 허락할 때마다 함선들을 띄워서 카르타고 선박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하고, 선원들에게 항해술과 해상 전술을 훈련시켰다. 또한 선원들에게 적절한 식단을 포함한 좋은 대우를 해주어,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원로원은 카툴루스의 임페리움을 1년 더 연장해 카르타고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게 했다.

한편,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 측이 200척이 넘는 대함대를 새로 건조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봉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칵 뒤집혔다. 그들은 서둘러 함대를 건조하거나 소환하고 수송선을 준비했으며, 보급품을 모으고, 선원과 해병을 서둘러 끌어모았다. 그 결과 250척의 전선과 150 ~ 350척의 수송선을 9개월 안에 마련했지만, 급히 모집한 터라 전투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들을 이끌 지휘관으로는 한노라는 인물이 선임되었다.[3]

한노는 아이가테스 제도의 서쪽에 있는 히에라 섬에 집결한 뒤, 바람이 유리한 쪽으로 불 때 릴리바이움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로마 해군이 저지하기 전에 도착해 수비대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기원전 241년 3월 초에 히에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로마 척후선이 이를 확인한 뒤 카툴루스에게 보고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봉쇄를 풀고 200척의 갤리선을 이끌며 시칠리아 섬에서 16km 떨어진 에구사 섬에 정박했다.

기원전 241년 3월 10일 아침, 서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고 해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르자, 한노는 즉시 릴리바이움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로마 선박에서 돛대, 돛 및 기타 불필요한 장비를 제거해 거친 풍랑에서 배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카툴루스 본인은 이전 교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부관이었던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그를 대신해 전투에 임했다.

로마 함대는 적과 마주치자마자 한 줄의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에 맞서 노를 저으며 적 함대에 접근했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돛을 내린 뒤 적과 교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 함대에는 주로 곡물이 담긴 짐이 가득 실려 있었던 반면 로마인들의 선박에는 최소한의 필수품만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카르타고 함선들이 느릿느릿 이동한 데 비해, 로도스의 한니발이 탔던 기함을 본뜬 로마 함대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 해군은 해상 훈련을 착실하게 수행했던 것에 비해, 카르타고 측은 급히 모아서 서둘러 출발한 터라 훈련이 부족했다.

뒤이은 접전에서, 로마 해군은 기동성을 잘 살려서 적 함대의 측면을 충각전술을 통해 파괴하는 전법으로 압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50척이 침몰하고 70척이 나포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카르타고 전함 117척이 침몰했고, 로마 전함은 30척이 침몰했으며 50척이 손상을 입었다고 했다. 두 역사가는 당시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빠진 많은 카르타고인이 익사했기에 로마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카르타고 함대는 본국으로 퇴각했고, 지휘관이었던 한노는 참패의 책임을 물은 카르타고 당국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카르타고 당국은 로마와는 달리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함대를 새로 건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가면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인력 손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인데다가 설령 함대를 일으켜서 싸운들 승산은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 정부와 평화협약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밀카르 바르카는 아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가 버티고 있으니 새 함대를 일으킨다면 이길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에 분개해 협상을 이끌기를 거부했고, 히밀코를 대신해서 릴리바이움의 수비를 맡았던 기스코가 하밀카르를 대신해 협상에 임했다. 그 결과 양국은 루타티우스 협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2. 카르타고는 전쟁 중에 생포한 모든 로마 병사를 돌려보내며, 로마가 생포한 카르타고 병사를 데려오고 싶으면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3. 카르타고는 20년 동안 2,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이 협약이 로마 민회에 상정되었지만,

"겨우 이 정도만 받아내려고 전쟁을 지속했느냐"

는 반발을 사는 바람에 부결되었다. 이에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이었던 카툴루스의 형제이며, 차기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를 대표로 삼은 10인 사절단을 시칠리아 섬으로 파견해 추가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기스코는 추가 요구를 즉시 받아들였고, 협약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 가까운 여러 섬도 양도한다. 단, 양도해야 하는 섬은 차후에 정한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협약이 맺어지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종식되었고, 카툴루스와 팔토는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카툴루스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에 분수, 우물, 샘의 여신인 유투르나(Juturna) 여신의 신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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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2] 본래 동료 집정관이었던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도 함께 출진할 예정이었으나, 폰티펙스 막시무스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알비누스는 마르스 신의 플라멘(flamen)으로서 로마 시 내부에서 마르스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군대를 맡기 위해 신전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여 결국 출진하지 못했다.[3] 드레파나 해전에서 값진 승전을 거뒀던 아드헤르발이 선임되지 않은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