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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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포에니 전쟁
First Punic Wa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irst_Punic_War_264_BC.png
[1]
시기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장소
시칠리아 섬, 북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파일:external/92d427a920cd1e7d61ba5978617b8514c354d8e7eba84637d62fea6d5b1ff9d4.png 시라쿠사
파일:attachment/mon_256_4.png 스파르타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스키피오 아시나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2]
파일:attachment/mon_256.png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파비우스 리키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한노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한니발 기스코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보도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하밀카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보스타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하스드루발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히밀코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아드헤르발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탈로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하밀카르 바르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로도스의 한니발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기스코
파일:external/92d427a920cd1e7d61ba5978617b8514c354d8e7eba84637d62fea6d5b1ff9d4.png 히에로 2세
파일:attachment/mon_256_4.png 크산티푸스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로마시칠리아 섬과 지중해 패권 장악

1. 개요
2. 배경
3. 전개
3.4. 카르타고의 일시적인 반격과 로마군의 지속적인 공세
3.5. 레굴루스의 북아프리카 원정
3.6. 로마의 끈질긴 공세
3.7. 로마군의 고전
3.8. 로마군의 최종 공세와 전쟁 종결
4. 결과
5. 주요 전투



1. 개요[편집]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사이에 로마 공화국카르타고 공화국이 벌인 첫 번째 포에니 전쟁이다. 로마 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시칠리아 섬과 지중해의 재해권을 장악했다.


2. 배경[편집]


로마 공화국카르타고는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만 해도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기원전 508년,[3] 양국은 서로의 주권에 간섭하지 말고, 서로의 적과 동맹을 맺지 않으며, 서로의 동맹을 공격하지 않고, 카르타고인은 로마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해상무역을 할 수 있는 등의 내용이 담긴 제1차 협약을 체결했다.

기원전 348년, 양국은 제2차 협약을 맺었다. 이 협정에는 첫 번째 협정에 티레, 우티카 등 카르타고에 종속되거나 동맹을 맺은 도시국가들과 로마와 동맹을 맺은 도시국가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내용을 추가했으며, 로마인은 배가 난파되어 수리해야 하는 부득이한 경우를 빼면 사르데냐 섬과 리비아에 머물어서는 안 되고, 카르타고인 역시 로마에 복속되지 않은 라티움의 어떤 도시라도 정복하면 도시를 로마에게 넘겨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아그리젠토의 실레노스에 따르면, 로마와 카르타고는 기원전 306년에 제3차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내용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로마는 시칠리아 섬에 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는 친 카르타고 성향인 실레노스가 시칠리아를 침공한 로마를 비난하기 위해 조작했으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19세기까지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후대의 로마 역사가들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조약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 점을 들며 조약이 실존했으며, 로마 당국이 나중에 조약 문서를 파기함으로써 포에니 전쟁의 책임을 회피했다고 본다.

기원전 278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제4차 협약을 체결했다. 당시 그리스 서부 에페이로스 왕국의 명장이었던 피로스 1세가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계 도시국가인 타라스(현재 이탈리아 타란토)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로마와 피로스 전쟁을 벌이다가 나중엔 시라쿠사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시칠리아 섬으로 진격해 카르타고를 시칠리아 서부에서 완전히 밀어버리려고 들었다. 이에 로마와 카르타고는 피로스 1세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 제4차 협약에서는 이전에 맺었던 조약을 재확인하고, 피로스 1세에 대응하기 위한 인력과 물자 지원을 상호 제공하면서, 상대방의 영역을 침공하거나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듯 로마와 카르타고는 수백년간 별다른 갈등 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로마는 전형적인 대륙국가였던 만큼 세력 영역이 이탈리아 반도 내로 국한되어 있는 한 해상국가인 카르타고와 이해관계가 충돌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위치한 시칠리아 섬에서 시라쿠사참주아가토클레스를 받들던 라틴인 용병 마메르티니[4]가 아가토클레스 왕이 승하한 후 그리스식민지인 메사나 시를 점령한 것이 대결의 발단이 되었다.

마메르티니 용병들은 이탈리아 반도 출신의 라틴계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처음에는 근거지가 없이 시칠리아 섬을 떠돌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들은 피로에 지쳐 메사나 시에 잠시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메사나 시민들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메르티니들에게 성내에 휴식처를 주고 식량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이 도시가 살기 좋은 것을 보고, 야밤에 시민들을 기습 공격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마메르티니들은 메사나 시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버리고, 여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 각 병사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했다. 이러한 만행은 시칠리아 섬에 있었던 그리스계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학살당한 메사나 시민들이 그리스계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 마메르티니인들은 메사나를 거점으로 하여 20년에 걸쳐 주변 도시들을 상대로 해적질과 약탈까지 벌였다.

그리스인들은 당연히 그들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고,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로 2세는 이들의 염원을 등에 업고 마메르티니와의 전쟁에 착수했다. 기원전 271년, 히에로 2세는 용병과 민병대를 포함한 시라쿠사군을 이끌고 메사나로 진격했다. 키아모소르 강 전투를 치렀을 때, 그는 용병들이 시라쿠사의 정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다른 경쟁자를 지원할 조짐을 보이는 걸 감지했다. 이에 일부러 용병들을 마메르티니군에게 노출시켜 몰살당하게 하고, 민병대는 안전한 곳으로 빼두었다. 그렇게 기존의 용병들을 죽게 만든 뒤 새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재개한 히에로 2세는 기원전 270년 시칠리아 북부 해안의 밀라, 틴다리다, 타우로메니움 시를 공략했고, 269년 롱가노 강 전투에서 마메르티니인을 물리치고 메사나를 포위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마메르티니는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카르타고 사령관 한니발 기스코의 함대가 메사나 함락 직전에 나타나 중재를 제안했다. 히에로 2세는 숙적인 카르타고와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이고 마메르티니와 화해하기로 했다. 이후 카르타고는 메사나를 도와준 대가로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마메르티니 사이에서는

"이러다간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를 받을지도 모른다."

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기원전 265년, 시라쿠사의 히에로 2세는 마메르티니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마메르티니 지도부는 카르타고에 다시 구원을 요청했고,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즉시 출격해 시라쿠사군을 물리치고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마메르티니의 상당수 인사들은 카르타고가 메사나를 완전히 지배하려 들 거라 여기고 이번에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많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마메르티니가 이전에 저지른 악행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패권을 쥐기 위한 긴 전쟁을 이제 막 완료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데 시칠리아 섬에 군대를 보내서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겼기에 이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부 지중해 최강국인 카르타고가 이탈리아 본토 코앞인 메사나를 장악한다면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원로원 내에서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메사나에 군대를 파견하는 안건은 민회에 회부되었다. 당해의 집정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이 기회에 군공을 세워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5]를 쌓고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평민들에게 풍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평민들은 이에 감화되어 마메르티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로마와 카르타고, 그리고 지중해 세계의 미래를 바꿀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3. 전개[편집]



3.1. 메사나 전투시라쿠사의 귀순 [편집]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유도한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메사나 맞은편의 해안도시인 레지아에 이르렀다. 그는 먼저 사촌이며 대대장을 맡고 있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소규모 분견대를 맡기고 해협을 건너도록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바다를 성공적으로 건넌 뒤 마메르티니가 내부에서 호응한 덕분에 메사나를 장악했고, 한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카르타고로 도주했다가 잔혹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시칠리아 섬을 양분하던 페니키아계 카르타고와 그리스계 시라쿠사 모두 라틴계인 로마가 메사나를 장악한 것에 분노와 위협을 동시에 느꼈다. 라이벌 관계였던 그들은 힘을 합쳐 공동의 적이 된 로마인들을 몰아내기로 하고 임시 동맹을 맺었다. 이후 폴리비오스가 "한니발의 아들"로 언급한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히에로 2세가 이끄는 시라쿠사군이 연합해 메사나를 포위했다. 또한 함대를 메사나와 레지아 사이의 바다에 배치해 로마군이 메사나에 추가로 오는 것을 막았다. 카우덱스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무조건 철수하라는 답변만 받을 뿐 별다른 성과가 없자, 야밤에 연합군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군대 전체를 수송선에 싣고 바다를 건넜다.

해가 뜰 무렵 상륙을 완료한 로마군은 즉시 시라쿠사 진영을 공격했다. 시라쿠사군은 평원으로 나와서 회전을 벌였다가 보병대가 격파당하자 진영으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적 진영을 공략하려 했지만 시라쿠사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쉽사리 이루지 못했고, 그 사이 시라쿠사 기병대가 로마 기병대를 격파하고 후방을 위협하자 철수했다. 그 후 히에로 2세는 로마군이 바다를 완전히 건넌 것에 낙담한 데다가 시라쿠사 내부에서 변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시라쿠사로 철수했다. 다음날, 카우덱스는 카르타고군을 공격해 손쉽게 물리치고 메사나 포위를 풀었다. 전쟁을 촉진시킨 메사나의 마메르티니인들은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잊혀져 버렸는데, 수백 년 후에도 마메르티니 와인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로마 공화국의 세력에 종속된 이후 와인을 특산물로 양조하면서 제국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우덱스는 메사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시라쿠사를 침공해 에체틀라(Echetla) 요새를 함락한 뒤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시라쿠사를 완전 포위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고, 함대 없이는 바다를 봉쇄할 수 없었다. 결국 카우덱스는 많은 손실을 보고 메사나로 철수했다.[6] 기원전 263년 집정관이었던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가 카우덱스를 대신해 시칠리아 섬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67개의 도시가 귀순했다고 하고,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52개 도시가 귀순했다고 한다.

이후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압박해오자, 히에로 2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후, 두 집정관에게 로마와 동맹을 맺을 의향이 있으니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로마 측은 장차 카르타고를 상대로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을 이어가려면 시라쿠사의 협조가 필요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시라쿠사가 지불해야 할 배상금 규모는 25달란트, 100달란트, 또는 200달란트로 기록마다 다르게 서술되었다. 나중에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대가로 배상금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시라쿠사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양자가 확보한 포로를 무상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3.2. 아그리젠툼 전투[편집]


로마 원로원은 시라쿠사와 손을 잡으면서 시칠리아 동부의 패권을 확립한 것에 만족해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하고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4개 군단을 2개 군단으로 축소시키고, 카르타고 정부에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로마의 팽창주의적인 행보를 예의주시했던 카르타고 정부는 이대로 로마의 시칠리아 동부 지배를 허용한다면 장차 로마가 자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칠리아 서부마저 노릴 거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로마인들을 시칠리아 섬에서 몰아내기 위해 누미디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리구리아 등지에서 용병대를 대규모로 모집했다.

원로원은 카르타고 측이 용병을 대규모로 모집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기원전 262년에 4개 군단을 추가로 파견하기로 했다. 40,000명 가량의 로마군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의 지휘하에 시칠리아로 진입한 뒤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의 핵심 거점인 아그리젠툼으로 진격해 그 해 6월에 도착했다. 한편, 아그리젠툼의 사령관이었던 한니발 기스코는 로마군의 포위를 예상하고 아그리젠툼 주변의 많은 주민을 성내로 들여보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아그리젠툼의 인구는 50,000명으로 늘어났지만 수비대 자체의 규모는 적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두 집정관은 성벽 1마일 앞에 숙영지를 세운 뒤 일부 병력만 숙영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사들에게 아그리젠툼 주변 밭에 널린 곡식을 수확하도록 했다. 이는 실로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지난날 카르타고군이 메사나 전투에서 완패하고, 로마의 시칠리아 동부 지배를 허용하는 등 야전에서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으니 감히 성벽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니발 기스코는 로마군이 경계를 소홀히하고, 경작물을 챙기느라 바쁜 틈을 타 기습했다.

한창 수확하느라 비무장 상태였던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급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카르타고군은 여세를 몰아 로마군의 숙영지를 급습했지만, 소규모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한니발 기스코는 병력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손실을 크게 보면 좋지 않다고 여기고 아그리젠툼 성내로 철수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카르타고군이 예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파견한 병사들이 무장을 확실히 갖추고 경계를 늦추지 않게 했으며, 숙영지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 한니발 기스코는 로마군의 방비가 예전보다 강해진 걸 눈치채고 두 번 다시 습격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로마군은 아그리젠툼 같은 대도시를 무력으로 공략한 적이 없었기에 공성기술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를 봉쇄해 보급을 끊어버려서 카르타고군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게 만들려고 했다. 로마군은 아그리젠툼을 도랑으로 둘러싸고 일정한 간격을 두며 여러 요새를 세웠다. 아그리젠툼은 바다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고원에 위치했고 항구가 없었기에, 로마군이 갖추지 못한 해군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5개월간 포위전이 이어진 끝에 식량이 바닥나자, 한니발 기스코는 본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카르타고 당국은 한노에게 대규모 병력을 맡겨 아그리젠툼을 구하도록 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노가 이끌고 온 군대에는 50마리의 코끼리, 누미디아 기병, 리구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용병대가 있었다고 했으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보병 50,000명, 기병 6,000명, 코끼리 60마리였다. 한편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보병 30,000명, 기병 1,500명, 코끼리 30마리였다고 한다. 한노는 먼저 아그리젠툼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진출한 뒤 로마의 공급 기지인 헤르베소스를 점령하고 로마군 보급물자들을 모조리 탈취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 장병들이 굶주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염병이 창궐했다.

한노는 로마군이 조속히 전투를 벌이고 싶어할 거라 예상하고 누미디아 기병에게 로마군 진영에 접근해 도발하라고 지시했다. 로마 기병이 진영 밖으로 뛰쳐나오자, 누미디아 기병들은 일부러 그들 앞에서 퇴각했다. 로마 기병들이 그들을 뛰쫓다가 카르타고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누미디아 기병들이 돌아서서 로마 기병들을 공격했고 다른 카르타고군도 가세했다. 로마 기병들은 이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이 승리에 고무된 한노는 아그리젠툼의 로마 진영에서 1.5마일 떨어진 토로스 언덕에 새 숙영지를 세우고 로마군을 압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아가 창궐하고 탈영병이 속출하자, 두 집정관은 이대로 가다간 끝장이라고 여기고 평원에 전투 대형을 갖춘 뒤 카르타고군에게 회전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노는 이대로 끌고 가면 로마군이 알아서 무너질 거라 여겼기에 거부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양국의 군대는 2개월 동안 서로 가까이 있었고 투창을 몇 차례 교환한 것 외에는 별다른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한니발 기스코는 아그리젠툼 성내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져 수비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속히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봉화를 올렸다. 한노는 이걸 보고 그제야 회전을 벌이기로 했고, 로마군 역시 기꺼이 응했다.

카르타고군은 전면에 보병대를 배치하고, 양측면에 기병대를 편성했으며, 후방에 코끼리와 경보병대를 편성했다. 로마군은 관례에 따라 벨리테스-하스타티-프린키페스-트리아리 형태로 보병대를 편성하고, 양측면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이후의 전투 양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양측 보병대가 장기간 격전을 벌인 끝에 로마군이 적의 전열을 뚫는 데 성공하자 나머지 카르타고군이 패주하면서 로마군이 승리했다는 내용은 전해진다. 카르타고군은 코끼리들을 후방에 배치해두기만 했는데, 코끼리들은 가만히 대기하고 있다가 로마군이 전열을 뚫은 뒤 투창을 퍼붓자 미친듯이 날뛰며 카르타고군 장병들을 짓밟았다. 카르타고군이 코끼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카르타고 기병대가 앞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로마 기병대를 격파했다는 내용도 없는 것을 볼 때, 이들 역시 전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던 듯하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보병 3,000명과 기병 200명이 전사하고 포로는 4,000명이었으며, 코끼리 8마리가 죽고 33마리가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한편 로마군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폴리비오스는 패주하는 카르타고군을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한니발 기스코는 아군이 패배하자 전투 다음날 밤 용병들과 함께 도랑을 짚으로 채워 넣은 뒤 아그리젠툼에서 도주했다.[7] 다음날 아침 카르타고군이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된 로마군은 한니발 기스코를 추격했지만 뒤쳐진 적병 몇 명을 사살하거나 붙잡았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그리젠툼으로 돌아와 이렇다할 저항없이 도시를 점령했다.

로마군은 오래도록 공성전을 치르느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린 것에 울분을 품고 있었기에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아그리젠툼의 주민 25,000명을 노예로 팔았다. 이 잔혹행위는 그때까지 로마가 카르타고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려 온 것이라고 여기고 지지했던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로마에게 반감을 품고, 카르타고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아그리젠툼은 함락시켰지만 카르타고군 자체를 섬멸하는 데엔 실패했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로마 정부는 아그리젠툼 함락 후 비로소 시칠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기로 뜻을 굳히고 전쟁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3.3. 밀레 해전[편집]


로마 공화국은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승리한 뒤 시칠리아 전체를 공략하기로 결의하고 군대를 대거 파견했다. 그러나 제대로 갖춰진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해안 도시들의 항구를 봉쇄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카르타고 측은 우수한 방어시설을 갖춘 해안 요새에 틀어박힌 채 해상 보급을 받으면서 로마군이 스스로 소진된 끝에 평화협상을 제의하기를 기다렸다. 기원전 260년, 로마 정부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함대를 신설하기로 결의했다. 때마침 이탈리아 해안가에 카르타고의 퀸퀘레메[8]가 난파되었는데, 로마인들은 이를 모델로 삼고 전함 120척을 건설한 뒤 당해의 집정관이었던 스키피오 아시나를 함대 지휘관으로 세웠다. 함대는 시칠리아로 향하기 전에 타렌툼 항구에서 그리스계 선원들의 지도하에 해상 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메사나 해협으로 출진한 스키피오 아시나는 리파리 제도의 수비대가 로마 편으로 귀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리파리 제도는 시칠리아 섬 북동쪽의 작은 섬들로, 이탈리아 본토와 매우 인접했기 때문에 그곳에 주둔한 카르타고군은 로마 공화국의 안보를 항시 위협할 수 있었다. 선원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했고 새로 건조된 선박들은 물이 새거나 지나치게 무거워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노출했지만, 스키피오는 전투없이 리파리 제도를 접수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며 전함 17척을 차출해 그 곳으로 향했다.

로마군은 리파리 항구에 도착한 뒤 그 곳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날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분전했고, 현재 리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한 함대를 이끌던 한니발 기스코는 즉시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보도에게 20척의 전선을 맡겨 리파리로 파견했다. 그들은 밤에 도착한 뒤 항구를 봉쇄한 후 다음날 아침 로마 함대를 향해 불화살을 퍼부을 준비를 했다. 해상 경험이 전혀 없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품고 있었던 로마인들은 이 상황에 크게 놀랐다. 일부는 공포에 질려 내륙으로 도망쳤고, 스키피오는 나머지 병사들 및 많은 로마 고위 관리들과 함께 생포되었다.(리파리 해전) 그 후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어 로마에 귀환한 그는 당나귀를 뜻하는 아그노멘인 '아시나'(Asina)로 불리며 로마 시민들의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스키피오가 맥없이 사로잡힌 뒤, 당초 육군을 지휘하기로 예정되었던 가이우스 두일리우스가 해군 지휘권까지 맡았다. 그는 로마인들이 바다에서 전투를 한 경험이 없었고 장기간 바다에서 배를 이끈 경험도 없었기 떄문에, 오랜 바다 생활에 단련된 카르타고 함대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코르부스를 제작했다. 코르부스가 적 선반의 갑판으로 떨어져서 쇠못을 박으면, 병사들이 이를 통해 적선으로 건너가서 닥치는 대로 도륙한다는 작전이었다. 이윽고 카르타고 해군이 시칠리아의 도시 밀레 인근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일리우스는 즉시 함대를 이끌고 밀레로 진격했다.

당시 카르타고의 해군 지휘관이었던 한니발 기스코는 로마군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을 갑판 위에 단 채 천천히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전투 진형 편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채 로마군을 향해 항해했다. 그 바람에 카르타고 함대는 일부만 전투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뒤쳐졌다. 로마군은 그 사이에 코르부스를 활용해 적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 뒤 배 위로 뛰어들어가 살육했다. 이 해전에서 카르카고 해군은 50척의 선박을 잃고 도주했다. 밀레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뒤 육지로 돌아온 두일리우스는 에게스타를 9일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후, 여름이 끝날 무렵 로마로 돌아와서 로마 역사상 최초로 바다에서 승리한 사령관으로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의 승리를 찬미하기 위해 밀레 해전에서 노획한 선박의 뱃머리로 장식된 '주둥이 기둥'[9]포로 로마노에 세워졌다.


3.4. 카르타고의 일시적인 반격과 로마군의 지속적인 공세[편집]


밀레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지중해의 재해권을 확보한 로마는 이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기원전 259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각각 2개 군단을 이끌고 공세를 개시했다. 스키피오는 코르시카 섬에 상륙해 알레리아 시를 초토화한 뒤 섬 전체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장악했다. 이후 사르데냐 섬으로 건너가 올비아 시를 포위했다.(올비아 포위전)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스키피오가 코르시카 뿐만 아니라 사르데냐에서도 성공적으로 싸웠다고 밝혔고, 발레리우스 막시무스플로루스는 그가 올비아를 공략하고 육지와 바다에서 카르타고인들을 제거해서 아프리카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도록 만들었다고 밝혔다.[10]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그가 올비아를 포위했지만 강력한 카르타고 함대의 등장으로 승산이 없어지자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공략되었다는 올비아가 이후 기록에도 카르타고의 영역으로 나온 것을 볼 때 올비아는 이 시기에 로마군에게 공략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그 후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동료인 스키피오가 이렇듯 큰 성공을 거두자, 플로루스 역시 시칠리아 섬에서 카르타고군을 모조리 몰아내서 군사적인 영광을 얻고 싶어했다. 그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한 부대에게는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다가 밀레 해전 이후 로마의 편에 섰고, 현재 카르타고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마켈라 시를 구원하는 임무를 맡겼고, 다른 부대에게는 테르마에 시로 진격하도록 했다. 한편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하고 있었던 하밀카르는 마켈라와 테르마에 중 어느 쪽을 도울 지 고심한 끝에 테르마에로 향했다.

하밀카르가 테르마에 인근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이 이미 테르마에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군대를 매복시켜 놓고 정탐꾼을 풀어서 로마군의 정보를 파악했다. 얼마 후,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다. 보조 군단으로서 로마군과 함께 하던 이탈리아 동맹군이 전쟁이 끝난 뒤 전리품을 어찌 분배할 지를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파로포스와 테르마에 사이에 숙영지를 따로 세우고 로마군과 교류를 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하밀카르는 즉시 이탈리아 동맹군을 급습했다. 이탈리아 동맹군은 카르타고군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4,000 내지 6,000명이 궤멸되었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테르마에를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었던 로마군은 동맹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철수했다.(테르마에 전투)

그 후 테르마에에서 겨울을 보낸 하밀카르는 기원전 258년 봄, 가까운 곳부터 되찾으려 들 거라는 로마군의 예상과는 달리 시칠리아 섬의 중심부인 엔나를 급습해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가볍게 함락시켰다. 하밀카르는 여세를 몰아 시라쿠사 남동쪽의 해안 도시인 카마리나로 진격해 역시 손쉽게 공략했다. 카마리나는 전쟁 발발때 카르타고와 연합해 로마를 대적했다가 로마의 편으로 돌아선 시라쿠사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아마도 시라쿠사를 압박해 카르타고와 손잡게 하려고 카마리나를 공략했던 것으로 보이나, 시라쿠사의 참주였던 히에로 2세는 끝까지 로마를 지지했다.

이렇듯 하밀카르의 역습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로마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기원전 258년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의 지휘 아래 반격에 착수했다. 카이아티누스는 하밀카르가 거점으로 삼은 파노르무스에 접근한 뒤 카르타고군을 성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도발했지만 별다른 응답이 없자 히파냐, 미티스트라티온, 엔나를 공격해 모조리 함락시켰다. 특히 기원전 259년 로마군의 공성을 7개월간 버텨냈던 미티스트라티온은 이번에도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수비대가 야밤에 빠져나가자 항복했다. 그러나 철저하게 로마군에게 약탈당하고 불태워진 뒤 주민 전원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미티스트라티온 포위전) 이후 카이아티누스는 카마리나로 이동하던 중 매복 공격을 받아 죽을 뻔했지만, 대대장이었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플라마가 분견대를 이끌고 카르타고군의 주의를 산만하게 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뒤이어 카마리나를 포위한 뒤 시라쿠사에서 보낸 공성 무기 덕분에 공략에 성공했다.

한편, 카이아티누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는 함대를 조직한 뒤 사르데냐 섬으로 항해했다.[11] 그는 사르데냐 섬을 약탈하던 중 한니발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가 접근해오자 함대를 이끌고 출격해 맞섰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쌍방간에 손실을 입히고 철수했다. 이후 카르타고군이 술키 항구에 정박한 사이, 로마군은 안개가 짙게 깔린 틈을 타 안개 속으로 진격해 카르타고 함대를 기습했다. 이로 인해 40척의 함대를 속절없이 상실한 한니발 기스코는 본국으로 패주한 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12] 로마군은 술키 해전에서 승리한 덕분에 올비아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르데냐 섬 일대를 복속시켰다. 그러나 올비아에 자리를 잡은 카르타고군이 거세게 저항했기 때문에 올비아 탈환에는 실패했다.

술키 해전에서 승리하여 샤르데냐 섬의 해상권을 확보한 뒤, 로마군은 시칠리아 섬 북동쪽에 있는 소도시 틴다리스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 기원전 257년,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가 이끄는 로마 육군 및 해군은 틴다리스를 육지와 해상에서 협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로마 함대가 틴다리스 만에 정박하고 있을 때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가 전투 대형을 펼치지 않은 채 인근 해역을 지나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레굴루스는 즉시 출격 명령을 내렸지만, 먼저 준비가 된 10척의 배만 이끌고 적을 향해 진격했다.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군이 자신들을 향해 뛰쳐나온 것을 보고 일순간 당황해 후퇴하려 했지만, 곧 적의 공세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당시 로마의 대다수 함대는 선원들의 탑승이 완료되지 않아서 육지에 정박해 있었고, 레굴루스의 기함은 사실상 단독으로 카르타고 함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즉시 뱃머리를 돌려 무모하게 돌진하고 있는 로마군의 군선들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9척의 로마 함선들이 카르타고군의 충각전술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지만, 레굴루스의 기함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빠른 항해"와 "훌륭한 선원" 덕분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나머지 로마 함대가 전장에 도착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카르타고군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서둘러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10척이 나포되고 8척이 침몰되었다. 나머지 함대는 리파리 섬으로 피신했다. 그 후 틴다리스는 로마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함락되었다.(틴다리스 해전)


3.5. 레굴루스의 북아프리카 원정[편집]


로마군은 포에니 전쟁을 개시한 이래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지상전과 해전 모두 연파하면서 시칠리아 섬의 패권을 거의 확보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과 이들에 협조하는 시칠리아 주민들은 탄탄한 방어력을 갖춘 해안 요새들에 틀어박혀 농성을 이어나갔고, 카르타고 정부는 그들에 대한 원조를 이어가며 해군을 파견해 이탈리아 해안을 종종 습격하는 등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전쟁이 길어지자 로마인들은 피로감을 느꼈고, 결정적인 한방으로 승부를 내자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256년 초, 집정관 퀸투스 카이디키우스가 급사한 뒤 보결 집정관에 오른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지금까지 건조한 모든 전함을 끌어모아 북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하자고 주장했다. 원로원과 민중은 삼니움족을 무찌르고 브룬디시움 공략에 성공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춘 그라면 카르타고를 굴복시켜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 믿고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이리하여 북아프리카에 대한 임페리움을 확보한 레굴루스는 동료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와 함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 흩어져 있었던 함대들에게 에크노무스 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에크노무스 항에 모인 로마 함대의 규모는 무려 330척에 달했다.

한편, 카르타고 정부는 각지에서 수집한 첩보를 통해 로마의 함대가 에크노무스 항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시칠리아 섬의 남쪽 끝자락이며 카르타고의 본토인 북아프리카 해안에 인접한 에크노무스에 로마군의 대함대가 집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에 지난날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던 한노테르마에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고, 한 때 시칠리아 중부의 엔나와 시라쿠사 인근의 카마리나까지 공략했던 하밀카르에게 로마군의 함대가 북아프리카로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두 장군은 즉시 에크노무스에서 5마일 가량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카르타고 함대를 집결시켰는데, 그 수가 무려 350척에 달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 함대에 140,000명의 선원, 노 젓는 사람, 군단병이 있었으며, 카르타고 함대에는 150,000명이 탑승했다고 밝혔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과장이라고 간주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해전인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이리하여 벌어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레굴루스와 불소는 가장 크고 강력한 함대를 전방과 중앙에 배치하고, 각각의 측면과 후방에 2개의 편대를 추가로 편성했다. 이 4개의 함대는 집정관 본인이 탑승한 기함을 중심으로 쐐기 진형을 형성했고, 후방에는 2개의 예비 편대가 일렬로 배치되어 수송선들을 보호했다. 카르타고 함대는 이에 맞서 전체의 3/4을 우익이 바다를 향해 뻗은 형태로서 일렬로 나란히 배치했다. 나머지 1/4은 카르타고 전선의 약간 앞쪽에 비스듬히 배치된 좌익을 형성했다. 좌익과 중앙은 하밀카르가 지휘했고, 나머지 부대는 한노가 지휘했다.

레굴루스와 불소는 쐐기 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어서 카르타고 함대가 우수한 항해술을 발휘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로마 함대가 전방을 향해 진격하자, 하밀카르는 중앙의 카르타고 전함들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적이 뱃머리를 돌려 물러나자, 로마 병사들은 카르타고군이 겁을 집어먹으며 달아나고 있다고 여겨 추격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로마의 선두 편대가 후방의 편대에서 분리되었다.

한편, 한노는 우익의 속도가 빠른 선박들을 이끌고 로마 쐐기 대형의 후방에 있는 4번째 편대를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하밀카르도 좌익 편대를 이끌고 로마의 3번째 편대를 급습했다. 또한 일부 카르타고 함대는 후방에 동떨어진 로마군의 수송선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3번째와 4번째 편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해안쪽으로 밀렸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가까이 오는 카르타고 함선에 코르부스를 내리 꽂아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적선에 승선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한편, 레굴루스와 불소가 이끄는 선두 편대는 후퇴하는 카르타고군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포획했다. 그러던 중 후방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추격을 중단한 뒤 뱃머리를 돌려 로마군 함대를 공격하고 있는 카르타고군 함대의 배후를 찔렀다. 불소는 해안 근처에 좌초될 위기에 몰린 3번째 편대를 구했고, 레굴루스는 4번째 편대를 구조했다. 이에 하밀카르와 한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카르타고로 퇴각했다.

지중해 서부 최대의 해전으로 간주되는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24척을 상실한 반면 카르타고 해군은 30척을 잃고 64척이 나포되었다. 인력 손실은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으나, 한 척 당 300명의 노 젓는 사람과 120명의 전투원이 탑승한다고 가정할 경우, 로마군은 적어도 10,000명을 잃었을 것이며, 카르타고 측은 12,500명을 상실하고 27,000명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로마보다 적은 시민을 보유한 카르타고로서는 실로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 후 로마군은 손상된 함선들을 수리한 뒤 북아프리카로 항해해 클루페아 해안에 상륙한 뒤 아스피스 시를 단시일에 포위해 공략했다.(아스피스 포위전)

레굴루스와 불소는 아스피스에 수비대를 배치한 뒤 원로원에 전령을 보내 향후 지침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불소에게 대다수 전선과 다수의 육군을 시칠리아 섬으로 돌려보내고, 레굴루스는 15,0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과 함께 북아프리카 현지에 남아서 점령지를 지키며 현지 보급에 힘쓰라고 지시했다. 이는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북아프리카에 주둔한 수만 명의 병력에게 물자를 지속적으로 대량 보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소는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시칠리아 섬으로 돌아갔지만, 레굴루스는 얌전히 점령지를 지키고 있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는 내년에 부임할 집정관에게 임페리움을 넘기느니 자기 선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굴복시켜서 군사적인 위업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에서 남동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아디스(현재 유티나) 시로 진격해 포위하고 주변의 시골을 약탈했다.(아디스 포위전) 카르타고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하밀카르, 하스드루발, 보스타르에게 로마군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하밀카르가 시칠리아 섬에서 북아프리카로 이끌고 온 5,0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을 포함해 로마군과 비슷한 전력을 규합한 뒤 아디스로 진군했다. 이후 아디스 인근의 바위 언덕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폴리비오스는 이들이 카르타고군의 주력인 전투 코끼리와 기병이 제 역량을 발휘하기 힘든 바위 언덕에 군대를 배치시킨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비판했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로마 군단병의 위력이 강한데다가 병력을 급하게 긁어모은 터라 신병이 많으니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으므로, 지형에 의지하여 방비한 것은 나쁜 선택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군이 아군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주둔한 것을 보고 병력을 둘로 나눠 새벽에 기습 공격했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이 기습하러 온 것을 사전에 눈치채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적진에 먼저 도착한 첫 번째 로마 부대는 카르타고군의 맹렬한 저항에 고전하다가 언덕 아래로 밀렸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의 상당수가 밀려나는 로마군을 쫓느라 전열을 이탈해 버렸고, 레굴루스는 두 번째 부대를 이끌고 그런 카르타고군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했다. 이에 카르타고군은 언덕에서 퇴각했고, 기병대와 전투 코끼리는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투입되지 않다가 퇴각했다. 로마 측의 기병은 고작 500명밖에 안 됐기에 섣불리 추격하지 않았고, 로마 보병들도 전투를 온종일 치르느라 지쳐서 퇴각하는 적을 쫓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카르타고군이 버리고 간 진영에 가서 마음껏 약탈했다.(아디스 전투)

아디스에서 승리를 거둔 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의 주변 지역을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부족과 도시들이 이때를 틈타 카르타고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카르타고 시내에 레굴루스를 피해 도망쳐 온 난민들로 북적여서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는 승산이 없다고 본 카르타고 정부는 레굴루스에게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의했다. 만약 레굴루스가 카르타고가 받아들일 만큼의 온건한 조건을 제시했다면,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이때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본 레굴루스는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 섬을 로마에 넘긴다.

2. 카르타고는 로마가 지금까지 치른 모든 전쟁 비용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3. 카르타고는 로마에 매년 경의를 표해야 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가없이 이웃 국가와 전쟁을 선포하거나 동맹을 맺을 수 없다.

5. 카르타고는 전선 1척 외에 함선을 갖출 수 없으며, 로마가 새로운 전쟁을 벌일 때 50척의 전선을 제공한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요구를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고 여기고 최후의 항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그리스에서 온 대규모 신병들이 카르타고에 도착했는데, 그들 중에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 지휘관인 크산티푸스가 있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 측의 병력과 기병, 전투 코끼리의 숫자를 점검한 뒤 동료들에게

"카르타고군은 충분히 로마군을 물리칠 전력을 갖췄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로마군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군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라고 밝혔다. 그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카르타고 정부는 크산티푸스를 소환했다. 크산티푸스는 자신에게 지휘권을 준다면 로마군을 물리쳐 주겠다고 약속했고, 어떻게든 로마군을 물리치고 싶었던 카르타고인들은 그를 믿어보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는 카르타고 당국이 처음부터 크산티푸스를 지휘관으로 초빙했다고 밝혔다.

크산티푸스는 겨울 동안 카르타고 군대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조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놓은 로마군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많은 카르타고인들이 처음에는 외국인이 최초로 자국군을 지휘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크산티푸스의 철저한 훈련 방식과 능수능란한 지휘력을 보고, 그라면 로마군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명령에 복종했다. 이윽고 기원전 255년 봄이 오자 카르타고군이 카르타고 시에서 출발해 로마군을 향해 접근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보병 12,000명, 기병 4,000명, 코끼리 100마리의 전력을 갖췄다고 한다. 레굴루스 역시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카르타고를 재기불능으로 만들기로 마음먹고 출진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크산티푸스는 중앙에 카르타고 시민들로 구성된 호플리테스를 배치했고, 좌익과 우익에 용병대와 시칠리아 베테랑들을 배치했으며, 양익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또한 최전방에는 1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배치했다. 이에 맞서는 레굴루스의 로마군은 최전방에 경무장 부대를 배치하고, 로마 군단병을 전통에 따라 하스타티-프린키페스-트리아리의 3개 대열로 편성했다. 다만 이전 전투들과는 달리 상당히 밀집된 형태를 취했는데, 이는 전투 코끼리들을 뚫고 전투력이 떨어지는 카르타고 시민병들을 제압해 승부를 보려는 것이었다. 500명의 로마 기병은 양 측면에 배치되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크산티푸스는 전투 코끼리들을 로마 군단병들에게 돌격시켰다. 로마 병사들은 칼로 방패를 연신 두들겨서 코끼리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들려고 했지만, 코끼리들은 이를 무시하고 빽빽히 모인 로마 병사들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일부 군단병들은 코끼리병들을 회피한 뒤 카르타고 시민병들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돌진한 터라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데다가 조국을 기필코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불사른 카르타고 시민병들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바람에 오히려 압도당했다. 한편 500명의 로마 기병들은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카르타고 기병들에게 금세 격파되었다.

이윽고 로마군의 거의 모든 전열이 무너졌고, 승기를 잡은 카르타고군에 의해 사방에서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오직 좌측면에서 카르타고의 용병대를 패퇴시킨 2,000명의 군단병만이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레굴루스 외 500명의 장병 및 장교들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나머지는 모조리 살육되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의 사상자는 800명 뿐이었다고 한다.

레굴루스의 참패 소식을 접한 로마 정부는 북아프리카 원정군의 패잔병들을 구출하기 위해 두 집정관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함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 해안으로 가도록 했다. 두 사람은 도중에 요격해 온 카르타고 함대를 헤르마이움 해전에서 격파한 뒤 아스피스에서 로마군 패잔병들을 모두 태우고 이탈리아 반도로 출항했다. 그러나 도중에 카마리나 인근 해상에서 폭풍에 휘말려 전함 384척과 300척의 수송선, 무려 100,000명 이상의 인력을 손실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카마리나 해상 사고)


3.6. 로마의 끈질긴 공세[편집]


카르타고는 바그라다스 전투와 카마리나 해상 사고로 로마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리비아인들과 이웃한 유목민족인 누미디아가 레굴루스의 북아프리카 원정을 계기로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카르타고는 로마와 달리 내부 결속력이 강하지 못했는데, 다양한 민족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 뿐 아니라 지배층 역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제해권 장악에 민감한 상인 세력 출신과 북아프리카의 대농장을 기반으로 하여 해외 진출에 무관심하던 대지주 출신이 사사건건 충돌하는 형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진압하는 데 전념해야 했고, 시칠리아 섬에는 현상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지원만 주어졌다.

반면에 특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래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준 로마는 시민들의 자원 입대가 이어지면서 금세 무너진 병력과 함대를 재건하고 다시 공세를 취했다. 기원전 254년, 지난날 리파리 해전에서 카르타고군에게 사로잡히는 수모를 당했던 스키피오 아시나는 220척의 함대를 이끌고 해상에서 파노르무스를 봉쇄했다. 여기에 동료 집정관이었던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가 육상에서 공세를 퍼부었다. 수개월에 걸친 공세 끝에 시라쿠사로부터 제공받은 공성무기를 앞세운 로마군이 외성을 뚫고 들어오고, 오랜 포위로 식량이 바닥나자 전의를 상실한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로마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14,000명의 파노르무스 주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지만, 그러지 못한 13,000명은 노예로 팔렸다.(파노르무스 포위전) 이에타스, 솔루스, 페트라, 틴다리스 등 여러 도시는 로마에게 복종하여 평화협약을 맺었다. 로마군은 연이어 공세를 개시해 기원전 252년 테르마에와 리파리를 점령했다.

이제 카르타고에 남은 도시는 릴리바이움, 셀리누스, 헤라클레아, 미노아 등 4개 도시 뿐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253년 로마 정부가 재건한 함대가 또다시 폭풍에 휘말려 300척 중 150척이 침몰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고,[13](파이누르 해상 사고) 전쟁을 금방이라도 끝낼 듯했던 로마군은 연이은 참사로 인해 기가 꺾여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그 사이 누미디아와의 전쟁을 끝낸 카르타고 정부는 기원전 252년 하스드루발 장군의 지휘 아래 새로운 군대를 시칠리아 섬으로 파견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은 30,000명의 군인과 14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보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로마군과 섣불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로마군 역시 바그라다스 전투의 악몽 때문에 회전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양측은 1년간 서로를 마주보기만 할 뿐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251년 늦여름, 하스드루발은 집정관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가 절반의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이야말로 전투를 벌일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파노르무스를 향해 진군하며 로마와 동맹을 맺은 여러 도시로 군대를 보내 농장을 황폐화시켰다.

카르타고군이 접근하자, 당시 시칠리아 섬에 남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흩어졌던 병사들을 서둘러 집결시킨 뒤 파노르무스 성채로 후퇴했다. 로마군이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자, 하스드루발은 적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겠다고 확신하며, 오레르토 계곡을 통과하여 여러 시골을 황폐화시킨 뒤 파노르무스 시 인근의 해안가에 당도했다. 이후 병사들을 쉬게 해주는 대신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당시 로마군 장병들은 140마리나 되는 코끼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했다. 이에 메텔루스는 병사들을 성내에 대기시킨 뒤 투창병과 경보병 만을 성벽 앞 해자에 매복시켰다. 이윽고 카르타고군의 코끼리 부대가 나타나자, 메텔루스는 코끼리들을 향해 투창을 퍼부으라고 명령했다. 투창 세례를 얻어맞은 코끼리들은 통제를 잃고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던 카르타고 보병대를 뚫고 도주했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이 혼란에 빠지자, 메텔루스는 즉시 군단병을 이끌고 적을 향해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카르타고군의 사상자는 전해지지 않으나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코끼리는 전투 첫날 10마리가 노획되었고, 나머지도 나중에 노획되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사상자 역시 전하지 않으나 미미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스드루발은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본국으로 소환되어 처형되었다. 반면 메텔루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기원전 250년 9월 7일 개선식을 치르면서 노획한 코끼리들을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서 도살했다. 이후 코끼리는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상징으로 채택되었고, 이 가문의 구성원들은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뀔 때까지 동전에 코끼리를 새겼다. 한편 카르타고 당국은 셀리누스, 헤라클레아, 미노아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후 군대와 주민들을 릴리바이움으로 철수시켰고, 자연히 로마의 관심은 시칠리아 섬 내 카르타고 세력의 최후 거점인 릴리바이움으로 향했다.


3.7. 로마군의 고전[편집]


시칠리아 섬에서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와 가장 가까운 해변에 자리잡은 릴리바이움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서부에 진출한 이래 가장 중요시하는 요충지였다. 이곳은 제조 상품의 서부 지중해 무역 중심지였으며,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 세력과 카르타고 본토 사이의 전략적인 항구 역할을 착실히 수행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중요한 곳을 지키기 위해 높이 10m, 두께 7m에 달하는 성벽을 건설하고, 첫 번째 벽에서 10m 떨어진 두 번째 벽을 추가로 세웠으며, 깊이 20m, 너미 30m에 달하는 해자를 여러 개 파고, 서로 연결된 항구 3개를 건설했다.

기원전 250년 로마는 두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에게 4개 로마 군단병과 4개 이탈리아 동맹시 보조 군단, 200척의 전선과 해군 분견대를 맡겨 릴리바이움을 공략하도록 했다. 이에 맞서는 히밀코 휘하의 릴리바이움 수비대는 7,000명의 보병과 700명의 기병이었으며, 대부분 그리스인과 켈트인으로 구성된 용병대였다.(릴리바이움 공방전)

로마군은 릴리바이움에 도착한 뒤 2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세운 후 투석기, 공성추 등 수많은 공성 병기를 제작하고 릴리바이움 요새의 남동쪽 측면을 공격하여 해자를 메우고 외벽의 탑 6개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카르타고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에 땅굴을 파서 성 내부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카르타고군이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땅굴을 파서 로마군의 공사를 훼방놓는 바람에 실패했다. 또한 로마군의 약탈과 학살을 피해 릴리바이움으로 도주한 민간인들은 매일 밤 성벽과 탑의 손상을 복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평원에서 맞붙었을 때 입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으며, 질병, 썩은 고기가 포함된 열악한 식량으로 인해 고통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군의 연이은 공세에 릴리바이움 수비대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용병들 사이에서

"이럴 바에 로마군에게 투항하자"

라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일부 갈리아 용병들은 아예 실천에 옮기려고 했지만, 알렉손(Ἀλέξων)이라는 이름의 그리스 용병이 이 사실을 히밀코에게 보고했고, 히밀코가 주모자들만 처형한 후 나머지 병사들에게는 급료를 두둑이 주며, 차후에 승리하면 더 많은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군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후 로마군의 공성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50척의 카르타고 전함이 아이가테스 제도에 집결했다. 그들은 해상을 봉쇄한 로마 전함들을 예의주시하다가 강한 서풍이 불자 적이 반응하기 전에 릴리바이움 항구로 빠르게 이동한 뒤, 수비대에게 대량의 보급품과 지원군을 전달했다. 이때 카르타고가 보낸 지원군의 규모는 4,000명에서 10,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히밀코는 야밤을 틈타 요새를 포위한 로마군을 습격해 공성 무기들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필사적인 전투를 치른 끝에, 카르타고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릴리바이움 요새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가 해상에서 추가 보급하지 못하도록 바위를 실은 배 15척을 항구 앞바다에 침몰시켰지만, 카르타고 해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상 보급을 꾸준히 이어갔다. 이에 로마군은 목재로 제방을 쌓아서 항구 입구를 막으려 했지만 풍랑이 심해서 이 역시 실패했다. 카르타고 해군은 작지만 빠른 배를 적절하게 활용해 로마군의 해상 봉쇄를 잘 피해갔는데, 특히 로도스의 한니발은 한 척의 작은 갤리선을 이끌고 덩치 큰 로마 함선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릴리바이움 수비대를 지원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인물은 넓은 바다로 나간 뒤 돌연 멈추고는 노를 들어올려 로마군에게 보였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니 어서 나를 잡아보라"

는 도발이었지만, 로마인 중 누구도 감히 로도스의 한니발을 쫓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잇따른 도발에 열받은 로마 해군이 철저하게 경비하는 바람에 결국 사로잡혔다.

한편, 드레파나에 주둔하고 있었던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 함대가 릴리바이움을 봉쇄한 틈을 타 시칠리아 섬 북부와 이탈리아 남부 연안을 약탈했고, 로도스의 한니발(Hannibal the Rhodian)이 이끄는 소규모 기병대가 로마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등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군량이 바닥난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에 의해 공성탑까지 모조리 전소되자 기원전 249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로마군이 릴리바이움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다시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되찾은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로마 함대의 절반이 시칠리아 섬 북동부의 카르타고 도시를 공격하는 작전에 동원된 탓에 풀케르는 130여 척의 함대 규모밖에 가지지 못했고, 회전식 부교인 코르부스(까마귀)는 두 번의 폭풍으로 인해 철거된 상태였기에 기동력으로 카르타고 함대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풀케르는 드레파나의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드레파나는 릴리바이움과 마찬가지로 육지쪽으로 패인 만 안쪽에 위치했고, 항구와 외해를 잇는 길은 병목처럼 좁은 수로 하나뿐이라 풀케르는 이 점을 노리기로 했다. 그는 카르타고군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도록 어둠을 틈타 릴리바이움에서부터 드레파나까지 출항했다. 사람의 주의가 가장 느슨해지는 새벽녘 무렵에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하려는 의도였지만 카르타고의 경험많고 뛰어난 해군 제독이었던 아드헤르발(Adherbal)은 해전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라 이러한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로마 함대의 접근을 알게 된 아드헤르발은 모든 카르타고 함대를 이끌고서 드레파나 항구를 비운 뒤 외해로 이동했고, 로마군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당황했지만 지휘관인 풀케르가 최후미에서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드레파나로 북상했다.

카르타고 함대는 외해로의 전진을 멈추고, 즉시 남쪽으로 선회하여 종렬로 북상하는 로마 함대의 측면을 기습했다. 그때까지도 카르타고 함대가 방심한 채 항구에 정박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한 풀케르는 자신이 있는 로마 함대의 최후미까지 카르타고 함대가 내려오고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뒤늦게 뱃머리를 카르타고 함대를 향해 돌리라고 했으나 좁은 수로에 있는 데다가 풀케르가 후미에 있었던 탓에 선두로 나아가던 로마 함대는 명령을 받지 못하고 북상을 계속했다. 결국 해안가로 밀려가던 로마 함대는 차례대로 암초에 충돌하거나 카르타고 함대의 충각 전술에 격침되었고, 릴리바이움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로마 함대는 풀케르의 기함을 비롯한 최후미의 30여 척에 불과했다.(드레파나 해전)

풀케르는 전투 이전에도 경솔한 행동을 했다. 당시 로마군은 전투를 하기 전 에게 모이를 먹여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닭이 좀처럼 모이를 먹지 않자,

"물이라면 먹겠느냐!"

라고 화를 내며 닭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해전에서의 참패 이후 로마 본국으로 소환되었을 때 이 부분도 지적을 받아서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고, 풀케르를 무능과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풀케르는 처음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120,000아세스라는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그 뒤에 곧 사망했다.

기원전 247년, 하밀카르 바르카는 시칠리아 섬에 소규모 용병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용병군으로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면 반드시 패배할 테고, 이 이상의 패전은 카르타고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유격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이탈리아 본토 최남부의 로크리와 브룬디시움을 기습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서 북서쪽으로 7마일 떨어진 헤렉테 산(오늘날 몬테 펠레그리노)에 강력한 요새를 세운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로마군 보급부대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로마군은 당연히 하밀카르 바르카의 존재를 거슬려 했고 헤렉테 산에 몇차례 파견했지만, 하밀카르는 로마군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쳤다.(헤렉테 산 전투) 그러나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료를 제공한 폴리비오스

"교전국 사이에서 매일 일어난 상호 매복, 공세, 및 공격의 모든 동기와 세부 사항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독자들도 지겨워할 게 분명하니 언급하지 않겠다"

라며 이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다른 역사가들도 하밀카르 바르카의 활약상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하밀카르와 로마군간의 전투 상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폴리비오스는 아래의 설명을 덧붙였다.

하밀카르는 상황과 장소에 따라 필요한 모든 군사적 속임수, 특별한 용기와 힘을 보여줬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결정적인 전투는 불가능했다. 로마군 진영 역시 그처럼 강력한 요새를 갖춰서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두 숙영지를 가로지르는 거리는 매우 짧았다. 소규모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면서도 승부를 낼 수 없었던 주된 이유이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투 자체에서 죽었고, 재빨리 퇴각한 모든 사람은 참호 뒤에 숨어 위험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밀카르는 헤렉테 산에서 로마군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치고 적의 보급로를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섬의 카타나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쿠마에까지 해상 공격을 벌였다. 비록 로마군에게 점거된 도시를 한 개도 탈환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상대로 계속 물고 늘어져서 로마군의 자원을 계속 소모시켰다.

그러던 기원전 244년, 하밀카르는 로마군에게 포위된 드레파나 인근의 에릭스(현재 몬테 산 줄리아노) 산에 은밀히 이동하여 그곳의 산비탈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에릭스 시는 기원전 249년 로마군에게 점령된 뒤 드레파나를 공격하는 로마군의 후방 보급 기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 뒷편의 에릭스 산 정상에는 소규모의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에릭스 시를 기습하여 공략한 뒤 그곳에 있었던 모든 식량과 무기 창고를 파괴한 후 산 정상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전해 카르타고군이 진영을 접수하는 것을 막아냈고, 그 사이에 드레파나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이 에릭스 산으로 달려오면서 이번에는 하밀카르의 카르타고군이 역포위될 위기에 몰렸다.

이에 하밀카르는 로마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형이 험준하면서도 해상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로마군과 대치했다. 양자는 3년간 소규모 전투를 연이어 치렀지만 승부를 쉽게 내지 못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한 번은 보도스토르라는 부하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는 하밀카르의 지시를 거부하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약탈하다가 로마군의 역습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하밀카르는 로마군 진영에 사절을 보내 아군 전사자들을 매장하고 싶으니 일시적인 휴전을 맺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집정관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가 냉소적으로 답하며 거부했다.

"너희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죽은 자가 아니라 너희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휴전을 요청해야 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이번에는 푼다니우스가 카르타고 진영에 사절을 보내 하밀카르와 같은 요청을 했고, 하밀카르는 이렇게 답하며 받아들였다.

"나는 오직 살아있는 자와 싸운다. 죽은 자들은 이미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로마군이 하밀카르를 상대로 피해만 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하밀카르의 군대 내부에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적지에서 고립된 것에 불안감과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1,000명의 켈트족 용병들이 아군 진영을 로마군에게 내주기 위해 로마군과 접촉했다가 하밀카르에게 발각되어 집단 처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밀카르는 용병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상당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해 군심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에릭스 산 전투)


3.8. 로마군의 최종 공세와 전쟁 종결[편집]


릴리바이움 공방전이 9년째 질질 끌 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데다가 드레파나 해전에서 해군이 궤멸되고, 하밀카르 바르카의 유격 전술로 인해 보급로가 자꾸 끊어지면서 병사들에게 지속적인 보급을 하기도 힘들어지자, 로마 공화국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 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고, 카르타고와 협상해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카르타고를 재기 불능으로 삼은 뒤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정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하밀카르 바르카를 제압하는 것은 수년간의 소모전이 보여주듯 요원했으니, 남은 길은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해안 도시인 두 요충지를 공략하려면 해상 봉쇄가 필수적이었고, 그러려면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여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쳐야만 했다.

당시 로마 해군은 기원전 255년의 카마리나 해상 사고와 기원전 253년의 파이누르 해상 사고로 인해 막대한 인력과 함대를 상실했고, 뒤이어 기원전 249년에 일어난 드레파나 해전에서의 참패와 카르타고 해군의 연이은 이탈리아 본토 습격으로 인해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전함이 얼마 되지 않았다. 로마의 이같은 사정을 파악한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가 조만간 협상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원주민 반란과 누미디아 등의 침략에 대처하는데 투입했으며, 시칠리아 섬에는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 병력만 보내고,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대폭 감축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국고는 이미 바닥났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전쟁에서 승리하면 카르타고에게 부과될 배상금을 받아가는 조건으로 배 한 척을 건조할 자금을 대출받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부유한 시민들은 앞다퉈 사재를 털어 정부에 기부했으며, 돈을 낼 수 없는 시민들은 직접 함선 제작에 뛰어들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새로 건조될 배의 모델로는 지난날 로마 해군을 상대로 신속한 항해술을 선보이며 농락하다가 끝내 붙잡힌 로도스의 한니발의 기함으로 정했다. 그 결과 약 200척의 퀸퀘레메[14]가 건조되었다.

기원전 242년, 집정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새로 건설된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으로 진군했다.[15] 카르타고 측이 시칠리아 섬에 주둔했던 함대를 대거 철수시켰기 때문에, 카툴루스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의 해상 봉쇄를 순조롭게 달성했다. 그는 날씨가 허락할 때마다 함선들을 띄워서 카르타고 선박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고 선원들에게 항해술과 해상 전술을 훈련시켰다. 또한 선원들에게 적절한 식단을 포함한 좋은 대우를 해주어,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원로원은 카툴루스의 임페리움을 1년 더 연장해 카르타고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게 했다.

한편,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 측이 200척이 넘는 대함대를 새로 건조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봉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칵 뒤집혔다. 그들은 서둘러 함대를 건조하거나 소환하고 수송선을 준비하며, 보급품을 모았고, 선원과 해병을 서둘러 끌어모았다. 그 결과 250척의 전선과 150 ~ 350척의 수송선을 9개월 안에 마련했지만, 급히 모집한 터라 전투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들을 이끌 지휘관으로는 한노라는 인물이 선임되었다.[16]

한노는 아이가테스 제도의 서쪽에 있는 히에라 섬에 집결한 뒤, 바람이 유리한 쪽으로 불 때 릴리바이움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로마 해군이 저지하기 전에 도착해 수비대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기원전 241년 3월 초에 히에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로마 척후선이 이를 확인한 뒤 카툴루스에게 보고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봉쇄를 풀고 20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에서 16km 떨어진 에구사 섬에 정박했다.

기원전 241년 3월 10일 아침, 서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고 해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르자, 한노는 즉시 릴리바이움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로마 선박에서 돛대, 돛 및 기타 불필요한 장비를 제거해 거친 풍랑에서 배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카툴루스 본인은 이전 교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부관이었던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그를 대신해 전투에 임했다.

로마 함대는 적과 마주치자마자 한 줄의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에 맞서 노를 저으며 적 함대에 접근했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돛을 내린 뒤 적과 교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 함대에는 주로 곡물이 담긴 짐이 가득 실려 있었던 반면 로마인들의 선박에는 최소한의 필수품만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카르타고 함선들이 느릿느릿 이동한 데 비해, 로도스의 한니발이 탔던 기함을 본뜬 로마 함대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 해군은 해상 훈련을 착실하게 수행했던 것에 비해, 카르타고 측은 급히 모아서 서둘러 출발한 터라 훈련이 부족했다.

뒤이은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기동성을 잘 살려서 적 함대의 측면을 충각전술을 통해 파괴하는 전법으로 압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50척이 침몰하고 70척이 나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카르타고 전함 117척이 침몰했고, 로마 전함은 30척이 침몰했으며 50척이 손상을 입었다고 했다. 두 역사가는 당시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빠진 많은 카르타고인이 익사했기에 로마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카르타고 함대는 본국으로 퇴각했고, 지휘관이었던 한노는 패배의 책임을 물은 카르타고 당국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카르타고 당국은 로마와는 달리,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함대를 새로 건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가면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인력 손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인데다가 설령 함대를 일으켜서 싸운들 승산은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 정부와 평화협약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밀카르 바르카는 아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가 버티고 있으니 새 함대를 일으킨다면 이길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에 분개해 협상을 이끌기를 거부했고, 히밀코를 대신해서 릴리바이움 수비를 맡았던 기스코가 하밀카르를 대신해 협상에 임했다.


4. 결과[편집]


기원전 241년,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공화국은 루타티우스 협약(Treaty of Lutatius)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2. 카르타고는 전쟁 중에 생포한 모든 로마 병사를 돌려보내며, 로마가 생포한 카르타고 병사를 데려오고 싶으면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3. 카르타고는 20년 동안 2,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이 협약이 로마의 민회에 상정되었지만,

"겨우 이 정도만 받아내려고 전쟁을 지속했느냐"

는 반발을 사는 바람에 부결되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인 카툴루스의 형제이며, 차기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를 대표로 삼은 10인 사절단을 시칠리아 섬으로 파견해 추가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기스코는 추가 요구를 즉시 받아들였고, 협약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 가까운 여러 섬도 양도한다. 단, 양도해야 하는 섬은 차후에 정한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기원전 240년, 카르타고가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자국에서 고용한 용병에게 돈을 제때 주지 못하자 이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용병 전쟁) 반란군은 2년간의 전쟁 끝에 카르타고 토벌대의 공세에 밀려 샤르데냐 섬으로 도주했다. 이들은 로마 정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후 사르데냐 주민들이 봉기해 반란군을 몰아내자, 그들은 로마로 망명한 뒤 사르데냐를 공격해달라고 재차 요청했다. 이에 로마 내에서 이참에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을 자국의 영역으로 삼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기원전 237년 이들의 의견이 관철되면서 로마군이 사르데냐에 진주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자국의 영역에 군대를 진주시킨 로마의 행위에 항의했지만, 로마 정부는 사르데냐인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이며 조약에 적시된 "추가로 양도해야 하는 섬"에 사르데냐가 들어갔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기원전 235년, 카르타고는 해군을 파견해 사르데냐를 탈환하려고 했다. 이에 당해 집정관이었던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카르타고 해군의 접근을 막고 사르데냐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가 자국의 정당한 영역을 침범하려 했다는 이유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용병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진해지면서 로마에 대적할 여력이 없었던 카르타고 정부는 결국 로마가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가지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1,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한때 지중해 최강의 해군국이었으며, 로마보다 더 오래된 역사와 선진문명을 자랑하던 카르타고였으나 전쟁에 패배하면서 로마에게 제해권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하고, 북아프리카에 고립되어 버렸다. 이제 카르타고는 두 번 다시 로마에 대적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5. 주요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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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8 23:14:33에 나무위키 제1차 포에니 전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제1차 포에니 전쟁 직전의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공화국의 영토 상황.[2] 함대를 폭풍으로 상실한 직후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분명하지 않다.[3] 폴리비오스는 이 조약이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로 진격하기 28년 전에 맺어졌다고 밝혔는데, 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80년 6월에 그리스로 쳐들어갔다.[4] 마메르티니(Mamertini)는 '마메르스(Mamers)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마메르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라틴족들이 군신 마르스를 부르던 이름이다. 끝이 i로 끝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복수형 명사이나, 이 용병대 전체를 싸잡아 마메르티니라고도 하기에 본 문서에서는 그냥 마메르티니인이라고만 서술한다.[5] 한 사람이 지닌 사회적 명예와 능력, 영적인 힘 등을 종합한 개념이다. 이것을 많이 쌓은 자들은 신들의 총애를 입어 가문 대대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졌기에 로마의 정치인 및 장군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6]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히에로 2세가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클라우디우스와 평화협약을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7]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한노는 사전에 한니발 기스코에게 자신이 로마군과 전투를 벌일 때 후방에서 로마군을 치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을 간파한 로마군은 매복병을 사전에 배치했다가 한노가 쳐들어왔을 때 전방과 후방에서 요격해 대파한 뒤 한니발 기스코 역시 격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8] 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9] columna rostrata, 콜룸나 로스트라타[10]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올비아를 점령했을 때 카르타고군의 사령관이었던 한노가 전사하자, 스키피오는 그의 유해를 수습한 뒤 명예롭게 묻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과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11] 일설에 따르면, 그는 본래 북아프리카를 치려고 했으나 바람 때문에 사르데냐 섬으로 밀려났다고 한다.[12] 일설에 따르면, 한니발 기스코는 함대를 잃고 육지로 도주한 뒤 그의 무능을 성토한 장병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13] 폴리비오스는 이 함대가 침몰한 장소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루키니아 지방의 서쪽 해안에 있는 파이누르 곶 앞바다라고 설명했다.[14] 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15] 본래 동료 집정관이었던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도 함께 출진할 예정이었으나, 폰티펙스 막시무스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알비누스는 마르스 신의 플라멘(flamen)으로서 로마 시 내부에서 마르스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군대를 맡기 위해 신전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여 결국 출진하지 못했다.[16] 드레파나 해전에서 값진 승전을 거뒀던 아드헤르발이 선임되지 않은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