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이라 슌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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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슌이치 ||



파일:Matsudaira_Yoshinaga.jpg
松平春嶽
1828.10.10 - 1890.06.02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항목



1. 개요[편집]


에치젠 후쿠이번 16대 번주이자 막부 정사총재직.[1] 본명은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지만 슌가쿠(春嶽)라는 호(号)로 유명하다.[2] 소위 에도 막부 말기 4현후(四賢侯)[3]로도 꼽힌다.


2. 생애[편집]


분세이 11년 (1828) 음력 9월 2일 에도성 고산쿄(御三卿)[4] 타야스 도쿠가와(田安徳川) 저택에서 도쿠가와 나리마사(徳川斉匡)의 8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아명은 킨노죠(錦之丞)였고, 텐포 8년 (1837) 11월 25일, 이요 마츠야마 번주 마츠다이라 카츠요시(松平勝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듬해 텐포 9년 (1838), 에치젠 번주 마츠다이라 나리사와(松平斉善)가 18세의 나이로 요절한 뒤,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11세의 나이로 16대 후쿠이 번주로 즉위했다. 다만 이 가독상속이 그렇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는데, 전대 번주가 지나치게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슌가쿠를 나리사와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나리사와가 사망한 날짜를 날조하는 등 생쑈드라마 한편 찍었다고도 전해진다.[5] 동년 12월 11일에 성인식[6]을 치르고 쇼군 이에요시(徳川家慶)로부터 편휘를 받아 이름을 요시나가(松平慶永)로 개명했는데, 이것이 슌가쿠의 본명으로 쭉 이어졌다.

텐포 10년 (1839년) 2월부터, 히고 쿠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나리모리(細川斉護)의 딸 이사히메(勇姫, 1834년생)와의 혼담이 오고가기 시작했고, 5월에는 막부의 약혼 승락도 받아냈다. 이들은 카에이 2년 (1849)에 결혼했다.

카에이 2년은 막부 중앙에서는 시마즈 가문의 가독상속 소동이 벌어지던 해이기도 했다 (오유라 소동). 당시 시마즈 가문의 적장자였던 나리아키라는 아버지와 동생 파벌을 물리치고 가독을 뺏어오기 위해 문중 인사들[7]을 동원, 에도성에서 외교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익년 카에이 3년에는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22세의 나이로 남의 나라 왕위계승전에 참전한다. 바로 다음해 카에이 4년, 나리아키라는 쇼군을 동원해 아버지로부터 드디어 가독을 빼앗고 번주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때 친-나리아키라 파벌로 참전한 슌가쿠와 우와지마(宇和島) 번주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그리고 나리아키라 본인 등이 결성한 친목모임은 훗날 히토츠바시파로 이어지게 된다.

카에이 6년 (1853), 페리선이 내항할 즈음의 막부는 서양의 오랑캐(...)들에 맞서 개국론과 양이론으로 나뉘어 (최소) 둘로 쪼개져 있었고, 당시의 쇼군 이에사다는 병약해서 쪼개진 막부의 교통정리는커녕 진작부터 이에사다의 후계자 논의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오유라 소동 시절부터 이어진 슌가쿠와 친구들은 차기 쇼군으로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밀면서 히토츠바시파라는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조정-막부-제번의 관계에 관해서는 공무합체, 천황 및 외세 문제에 관해서는 존황양이를 내세웠다.[8] 이에 맞서는 두번째 당파로 마츠다이라 노리야스(松平乗全),[9] 마츠다이라 타다카타(松平忠固),[10] 그리고 이이 나오스케[11] 등이 개화론(개국론)을 내세우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차기 쇼군으로 고산케 키슈((紀州)번주 이에모치를 밀었는데, 키슈의 별명에서 따와 난키파(南紀派)라는 붕당을 형성해 히토츠바시파와 대립하고 있었다. 안세이 5년 (1858), 다이로 나오스케는 쇼군 이에모치의 죽음을 기점으로 히토츠바시파 숙청에 돌입하는데, 이때 히토츠바시파의 거물인사 중 하나였던 슌가쿠도 은퇴와 근신형에 처해진다. (안세이 대옥) 정계에서 숙청당한 뒤 지은 호(号)가 슌가쿠(春嶽)로, 이 별칭이 본명보다 유명세를 타면서 역사상에 남게 된다.

1860년에 정적이었던 다이로 나오스케대낮에 암살당하고, 1862년에 이르러서는 히토츠바시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시마즈 가문이 거병해 교토로 쳐들어가자 슌가쿠의 근신형도 풀리게 된다. (분큐의 개혁) 이때 정사총재[12]라는 관직으로 정계에 복귀한 슌가쿠는 이후 요시노부 정권에서 핵심 인사로 활동한다. 다만 이때 같이 복귀한 요시노부는 토자마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이 막부내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걸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츠마 번주 시마즈 히사미츠와 사사건건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슌가쿠는 두 거물 정치인을 화해시키기 위해 개고생을 하기 시작한다.[13][14] 분큐의 개혁 이후 슌가쿠의 활동은 상당 부분이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겹치는데[15] 자세한 사항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생애 문서의 <공무합체파 정권의 수반으로> 이후의 내용을 참조. 당시 사츠마번도 요시노부도 자강두천에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에, 오랜기간 요시노부의 맹우[16]로 활동했던 슌가쿠도 지쳐서 요시노부를 두고 "100가지 재주와 꾀가 있으나 단 한 가지의 담력도 없다(百の才能や智略があるが、ただ一つの胆力もない)"라고 투덜대기도 했다고 한다.

위 시기의 몇 가지 주요 사항만 언급하자면: 사후회의에 일원으로 참석하고, 토사 번의 대정봉환에 동참하였고, 신정부의 의정(議定)에 임명되었다. 왕정복고 후 사츠마의 막부 토벌 운동에는 찬성하지 않았고, 보신 전쟁 때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측 세력과 신정부군 사이의 중재역을 자청하기도 했다. 막부와 조정을 설득하여 겐지(元治) 연호를 도입했으며, 메이지(明治) 연호를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내국사무총독(内国事務総督) 등의 관직을 역임하지만 가신이었던 나카네 유키에(中根雪江), 유리 키미마사(由利公正), 사카이 쥬노죠(酒井十之丞) 등이 정계를 떠나자 1870년 정계에서 은퇴하고, 이후 1879년까지 <이츠지시호(逸事史補)>를 포함해 이런저런 사료집과 저서를 남긴다. 1890년 폐부종으로 세상을 떠난다.


3. 여담[편집]


<조쿠사이무키지(続再夢紀事)>[17], <코메이 천황기(孝明天皇紀)>, 그리고 <이츠지시호(逸事史補)> 등의 사료들은 슌가쿠가 겐지(元治: 1864-1865)의 연호를 정할 때의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당시 조정과 천황은 <레이토쿠(令徳)>라는 연호를 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명백하게도 "도쿠가와에게 명령한다(川に命する)"는 의미가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도쿠가와) 막부측 신료들과 히토츠바시 요시노부(훗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거품을 물고 슌가쿠에게 불만을 표출했는데, 슌가쿠의 첫 반응은 (조정의 발언권 강화에 관심이 많은 공무합체 성향의 정치인답게) "애초부터 세상에서 최고로 존엄한 곳은 (천황이 계신) 조정이다"[18]라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무합체파 정치인으로 조정과 막부의 연대를 중요시하던) 슌가쿠는 곧바로 이어서 말하길

령(令)이라는 글자를 연호에 사용한 전례는 없다

『令』という文字を年号に使った先例はない

--

에도막부 정사총재 슌가쿠

라는 핑계를 대며 레이토쿠(令徳)를 기각하고, 왕정복고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훨씬 덜 자극적인 후보였던 겐지(元治)[19]를 타협점으로 밀어붙여서 통과시켰다. 슌가쿠도 기각한 이 령(令)이라는 글자를 일본의 연호에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먼 훗날 레이와(令和) 때의 일이다. 재미있는 점은, 150년 전에도 후에도 일본인들은 이 글자(令)의 첫 인상을 당연하게도 "명령"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반면 메이지(明治)의 연호는 높으신 분들과 학자들로부터 여러개의 추천안을 받은 뒤, 슌가쿠의 눈에 예뻐보이는 글자(佳号)로 2-3개 후보군을 추려서,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고 전해진다.[20]


4. 대중매체에서[편집]


막부 말기를 다루는 역사물에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21세기로만 한정해봐도, 신센구미!(2004)를 제외한 이후의 모든 NHK 대하드라마 막부말기물에 출장했다. 주로 안세이 대옥 때 갈려나가고, 분큐의 개혁(1862)으로 복권한 뒤, 요시노부 정권에서 사후회의 멤버로 활약하다가, 대정봉환과 이어지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영향력 있는 만년 조연으로 출연한다. 슌가쿠가 손대는 역사 이벤트들이 너무 굵직굵직해서 웬만하면 등장하는 것 같다. 역대 NHK 대하드라마 출연 기록만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작품명 (연도) - 배우명 순서)

꽃의 생애 (1963) - 야마구치 코세이
료마가 간다 (1968) - 와타나베 후미오
카츠 카이슈 (1974) - 이노우에 타카오
나는 듯이 (1990) - 이소베 츠토무
도쿠가와 요시노부 (1998) - 하야시 류조
신센구미! (2004) - 막말극 결근
아츠히메 (2008) - 야지마 켄이치
료마전 (2010) - 나츠야기 이사오
야에의 벚꽃 (2013) - 무라카미 히로아키
꽃 타오르다 (2015) - 이소자키 류이치
세고돈 (2018) - 츠다 칸지
청천을 찔러라 (2021) - 카나메 준


5. 관련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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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큐의 개혁(1862)으로 신설된 관직이다.[2] 일본 위키피디아 문서도 (본명인) 요시나가 대신 슌가쿠를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을 정도다.[3] 사츠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에치젠의 슌가쿠, 우와지마의 다테 무네나리, 토사의 야마우치 요도. 4현후라는 표현 자체가 단지 슌가쿠와 친한 다이묘들을 높여 부른 것뿐이었다고 보기도 한다.[4] 에도성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고산케와는 달리, 수도권에서 본가를 보필하는 도쿠가와 가문의 지류 방계가문. 고산쿄의 세 가문은 에도성 북쪽 타야스(田安)문, 시미즈(清水)문, 히토츠바시(一橋)문 근방에 저택을 짓고 해당 주소들에서 이름을 따왔다.[5] 참고로 슌가쿠를 후계자로 꽂은 인사들 중에는 전전대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나리츠구(松平斉承)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위키피디아 문서에 의하면 나리츠구가 히코네번과 영지문제를 벌여 사고를 친 적이 있는데, 두 번의 악연이 이어져 훗날 슌가쿠(에치젠)와 나오스케(히코네)가 정치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원흉으로도 꼽힌다고 한다.[6] 원복(元服)[7] 후쿠오카 번주 쿠로다 나가히로, 하치노헤 번주 난부 노부유키 등[8] 다만 막부 말기의 번주들이 의례 그렇듯, 양이(攘夷)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 슌가쿠도 뒤로는 (로쥬 야베에게) 개국론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9] 미카와 니시오번 4대 당주. 에도 막부에서 로주를 맡았다.[10] 시나노 우에다번 6대 당주. 에도 막부에서 로주를 맡았다.[11] 히코네 번주이자 막부의 다이로[12] 다이로에서 이름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다이로는 도쿠가와의 근본 가신집안인 후다이 다이묘 가문에서 배출되었는데, 슌가쿠는 후다이보다 격이 높은 신판 다이묘(마츠다이라도쿠가와의 원래 이름)였기 때문이었다고.[13] 쵸슈정벌 등의 문제에서 사츠마의 편을 들며 요시노부와 다투기도 하고 반대로 참예회의 사건때는 요시노부에게 욕을 한바가지 먹기도 하지만, 슌가쿠는 끝까지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우정/동맹을 포기하지 않은 듯 하다. 사실 슌가쿠도 막부 말기의 정치인답게 정치적 소신을 밥먹듯 바꿨기 때문에 콕 집어 누구 편이라고 말하긴 힘든 편.[14] 또한 이 시기에 와서는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가 기존의 히토츠바시파 다이묘들을 버리고 이치카이소(一會桑)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친위세력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 히토츠바시 파벌의 다이묘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던 시기였다.[15] 물론 활동 기간과 범위가 겹칠 뿐, 같은 주제를 두고 둘이서 싸우는 기간도 많다.[16] 요시노부와 척을 지고 토막의 길을 걸었던 사츠마번과 달리, 슌가쿠는 요시노부와의 우정을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지속했다고 한다.[17] 17대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모치아키(松平茂昭)가, 양부이자 전대 번주였던 슌가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후쿠이 번사였던 무라타 우지히사(村田氏寿)와 사사키 치히로(佐々木千尋)에게 시켜 집필한 역사서[18] もとより天下で最高位にあるのは朝廷である[19] (천황이 직접 통치하던 식으로) 원래대로 다스리다(元に治まる)라는 의미라고 한다[20] 출전: <메이지 천황기(明治天皇紀)>, <이와쿠라공 실기(岩倉公実記)>, <이츠지시호(逸事史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