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2세(그라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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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ثاني
영어 Muhammad II of Granada

재위 1273년 1월 22일 ~ 1302년 4월 8일
생애 1235년 ~ 1302년 4월 8일 (향년 67세)

1. 개요
2. 생애
2.1. 재위
2.2. 카스티야와의 전쟁
2.3. 평가와 의의


1. 개요[편집]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2대 군주. 부왕 대부터 지속되던 바누 아쉬킬라를 축출하고, 마린 왕조에게서 알헤시라스를 돌려받았다. 또한 카스티야 왕국과 전면전을 벌여 몇몇 도시를 점령하는 등 그라나다의 영토 확장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내치 역시 30여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하여 그라나다 왕국의 대표적인 수성 군주로 평가된다.

2. 생애[편집]



2.1. 재위[편집]


무함마드 1세의 아들로, 30여년간 왕세자로 활약하다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치세 초엽 말라가의 바누 아쉬킬룰라에 대항하기 위해 카스티야알폰소 10세에 연공을 바쳤으나 도움을 주지 않자 마린 왕조아부 유수프 야쿱에 서남부 영토를 할양하며 개입을 청하였다. 마린-그라나다 군대는 카스티야를 공격해 연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야쿱과 무함마드 2세가 알헤시라스를 두고 충돌하였고, 야쿱의 묵인 하에 카스티야 왕자 산초 (미래의 산초 4세)가 침공해오자 무함마드 2세는 1280년 모슬린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였다. 이듬해 알폰소 10세는 그라나다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무함마드 2세는 마린 조에서 이탈한 지하드 전사단 (الغزاة المجاهدين)을 수용하고 아라곤 왕국페드로 3세와 동맹하여 카스티야-마린 조의 공세에 맞섰다. 1284년 알폰소 10세, 1286년 야쿱이 사망한 후 그 후계자들이 내부 안정에 치중하자 무함마드 2세 역시 과디시를 압박하여 1288년 마침내 바누 아쉬킬룰라를 마그레브로 추굴하였다. 1292년 무함마드 2세는 카스티야의 산초 4세와 함께 마린령 타리파를 점령했는데, 후자가 약속과 달리 도시를 넘기지 않자 마린 술탄 아부 야쿱 유수프와 동맹하였다. 1294년 유수프는 타리파를 공격했지만 본토의 반란으로 철수하였고, 이듬해 알헤시라스와 론다를 그라나다 측에 넘기며 안달루스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2.2. 카스티야와의 전쟁[편집]


1295년 산초 4세가 사망한 후 어린 페르난도 4세가 계승하여 혼란이 일자, 무함마드 2세는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이즈나요즈 전투에서 승리하고 퀘사다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무함마드 2세는 아라곤의 하이메 2세[1]와 대카스티야 동맹을 맺었다. 카스티야는 타리파 할양으로 그라나다를 달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2] 같은해 무함마드 2세는 아르조나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을 격파하였다.[3] 1299년 봄, 그라나다 군은 마린 조가 보내준 원군 덕에 세비야 근처에서 카스티야 군을 재차 격파하였다.[4]

다만 타리파 포위는 재차 실패하였고, 무함마드 2세는 알카우데테 점령과 하엔 습격으로 만족해야 했다. 1301년 9월 무함마드 2세는 하이메 2세와 공동 원정에 합의하였다. 둘은 이듬해 출정하기로 했으나 진군하기 직전 67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무산되었다. (1302년 4월) 사후 (독살 의혹이 있는) 아들 무함마드 3세가 즉위하였다.


2.3. 평가와 의의[편집]


29년 간의 치세 동안 무함마드 2세는 왕국을 통합하고 공고히 하였다. 내부 통치 체계 역시 정비되었고, 와지르 (재상)의 권력이 증대되었다. 카스티야에 대한 활발한 반격과 함께 현실론였던 그는 요새들을 세워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고, 이는 그라나다가 2세기 가량 더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제노바, 피사 상인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학자들과 시인들을 후원했던 무함마드 2세는 법에 정통하다는 뜻인 '알 파키흐' 칭호를 얻었다. 또한 기존의 성채였던 알함브라는 그의 치세부터 왕궁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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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시칠리아 왕도 겸임.[2] 1294년 포위를 이겨낸 성주 알폰소 페레즈 데 구즈만이 거부[3] 이때 카스티야 섭정이자 페르난도 3세의 작은 할아버지 엔히크의 말이 사로잡혔다.[4] 이때 카스티야는 또다시 타리파 할양에 나섰으나 역시 성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