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여대생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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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島女子短大生焼殺事件[1]

1. 개요
2. 사건 경위
3. 범행 동기
4. 범인에 관하여
5. 재판과 그 이후
6. 판결이 화제가 된 이유
7. 유사 사건



1. 개요[편집]


2002년 1월 23일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잔혹한 범행 수법으로 인해 1983년 '나가야마 기준[2]'이 제정된 이래 범인에게 동종 전과가 없고 피해자가 단 한 명임에도 이례적으로 사형이 선고된 사례로 화제가 되었다.


2. 사건 경위[편집]


2002년 1월 23일 오전 2시 35분경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의 한 도로 공사현장을 지나던 트럭 기사가 검은 덩어리 같은 것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갔다가 불길 속에서 사람의 발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미시마경찰서 수사관들은 현장에서 키 155~160cm 가량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시신은 웅크린 자세로 전신이 거의 탄화되다시피 새카맣게 불타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사건 현장 부근에 다툼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초기에는 자살과 타살 양 쪽 모두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갈색 후드점퍼의 소매에서 테이프로 양 손을 뒤로 결박한 흔적이 확인되었고 시신의 입가에도 테이프가 남아 있다는 점, 시신의 피부에서 화상으로 인해 생긴 물집 등의 생활반응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범인이 피해자에게 휘발유등유 같은 인화성 물질을 끼얹고 산 채로 불태워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살인사건 쪽에 무게를 두고 수사 방향을 선회했다.

수사본부 측은 하마마츠 의과대학에서 시신의 부검을 실시하는 한편 시신 발견 현장 인근을 중심으로 유류품 수색과 탐문 조사를 실시했다. 한편 미시마시에 거주하는 단기대[3]학생 야마네 사치코(山根佐知子, 당시 19세)의 부모가 딸이 전날 밤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며 수사본부에 신고했고, 이에 사치코가 평소에 사용하던 학용품에서 지문을 채취하여 시신의 지문과 대조한 결과, 시신의 신원이 실종된 사치코로 밝혀졌다.

범행 수법이 워낙 잔인했던 탓에 수사본부 측은 당초에는 원한에 의한 범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치코의 대인 관계를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문제는 없었다. 이 때문에 두 번째로 묻지마 범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수사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사치코의 소지품(휴대전화, 지갑, 가방 등)이 전부 사라진데다 그녀가 사건 당시 타고 있었다는 자전거도 어째서인지 시신 발견 현장 주변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사본부는 범인이 피해자의 소지품을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행방을 추적했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수사 결과 범행에 등유가 사용되었음을 밝혀내고 이 등유를 분석하여 구매처를 밝혀내려 했지만 미시마 시내의 주유소 중 2곳에서 판매하는 것과 성분이 유사하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 정확한 구매처는 밝혀내지 못했다.

이렇게 한동안 수사가 난항에 빠져 있던 중, 각종 증거물 분석을 통해 지역 내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핫토리 준야(범행 당시 29세)라는 남성이 사건으로부터 약 6개월이 지난 2002년 7월부터 수사선상에 오르게 된다. 그는 주변 지리에 밝았으며, 당시는 뺑소니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누마즈 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2002년 7월 11일 수사본부 소속 수사관이 누마즈 형무소를 방문, 핫토리에게 야마네 사치코 살해 혐의가 있음을 고지하고 그의 타액을 채취하여 유전자 감식을 실시했다. 그 결과 현장의 유류품에 남아 있던 DNA와 핫토리의 타액 DNA가 일치하였고, 이에 수사본부는 핫토리를 중요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 후 납치 및 감금, 강도 등의 혐의로 7월 23일에 그를 체포했다. 핫토리는 당초에 사건 당일 밤 피해자를 편의점에서 만났다고 진술했으나 피해자와 합의 하에 성행위를 한 것이라며 강간과 살해 혐의는 계속 부인했다. 다음날 핫토리는 납치 감금 혐의는 인정했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함께 있었던 외국인이 했다며 여전히 부인했고, 7월 25일 수사본부 측은 핫토리를 시즈오카지방검찰청 누마즈 지부로 송검했다.

한편 수사본부는 핫토리의 차에 증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이 차의 행방을 찾았지만 차는 이미 사건 직후 폐차된 뒤였다. 그러나 계속된 추적 끝에 차의 타이어를 회수하는 데 성공, 현장 인근에 남은 스키드마크와 대조 작업을 실시했다. 또한 여기에 더해 핫토리가 사치코를 납치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테이프, 플라스틱제 말통, 그리고 시신 발견 현장에서 찾지 못했던 사치코의 자전거 등의 물증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후 핫토리는 지금까지 범행을 부인하던 진술을 번복, 결국 살인 혐의를 인정하는 한편 사치코에게 등유를 끼얹고 산 채로 불태웠다는 등 범행에 관해 구체적인 진술을 하기 시작했다.

2002년 8월 15일 수사본부는 핫토리를 살인 혐의로 추가송검했으며, 시즈오카지검 누마즈 지부는 살인 및 납치감금 등의 혐의로 그를 시즈오카 지방재판소 누마즈 지부에 기소했다. 이 때 핫토리는 범행을 전적으로 인정한 데 더해 반성하는 말을 남겼다고 하나, 진의는 알 수 없다. 보통 살인범들이 말하는 '반성'이란 감형을 노린 퍼포먼스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많았던 만큼, 당시 핫토리의 '반성하는 말'도 형식적인 사죄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후술될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 측이 핫토리에게 갱생 의욕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을 보면 재판부 입장에서도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태도라고 보기는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범행 동기[편집]


핫토리의 범행 동기는 어처구니없게도 헌팅마약이었다. 그는 사건 당일인 2002년 1월 22일 밤 11시경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치코를 보고 차 안에서 말을 걸었지만, 사치코는 그를 전혀 상대하지 않고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핫토리는 그녀를 보고 어떻게든 관계를 가져 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치코를 앞질러가서 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치코의 자전거 앞을 가로막고 그녀에게 접근하여 집요하게 작업을 걸어댔으나, 사치코가 심하게 저항하자 그녀를 강간하기로 마음먹고 그대로 차에 태워 타가타군 칸나미정의 인적이 드문 산속 도로변으로 끌고 가 강간한 뒤, "경찰에 신고하면 강간 사실을 퍼뜨리겠다"라며 협박했다.

그리고 다시 사치코를 차 뒷좌석에 감금한 채 미시마 시내로 돌아왔다. 그는 당초에는 사치코를 적당히 인적이 뜸한 장소에 내려놓고 그대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평소 핫토리와 함께 자주 마약을 하던 동료가 그에게 주사기를 갖다 달라며 연락을 했고, 그 전화를 받은 그는 자신도 마약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사치코를 풀어 줬다가는 신고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불안을 느꼈고, 그는 결국 사치코를 공사현장으로 끌고 가 그녀를 결박한 뒤 전신에 등유를 끼얹고 불을 지른 뒤 그대로 방치하고 도주했다. 그 와중에도 핫토리는 빨리 피해자를 없애고 동료들과 함께 마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4] 시신 발견 현장에서 그녀의 소지품들이 사라진 것도 경찰의 예상대로 핫토리가 가져갔기 때문으로, 그는 사건 다음날 평소처럼 자신이 근무하는 건설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 후에 사치코의 자전거를 누마즈시 카노강에 버리고, 그 외의 소지품들도 누마즈 시내의 편의점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친구 집에서 불태우는 등의 방식으로 증거 인멸을 시도했던 것이다.


4. 범인에 관하여[편집]


핫토리 준야는 1972년생으로,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시즈오카현 미시마시로 이주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절도 혐의로[5] 초등소년원에 수감되어 수감 상태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소년원에서 가출소한 이후에는 철근공 등의 일을 하며 살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17세 때 비행을 저질러 중등소년원에 다시 수감되었다. 중등소년원 가출소 이후 누나가 사는 오키나와로 건너가 약 1년 동안 일을 하며 지내다가 후에 미시마시로 돌아와 스낵바 종업원 등으로 일했지만 절도 등의 혐의로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20세가 된 1990년에는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지만, 동년 12월 마약단속법 위반 및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보호관찰 포함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집행유예 기간이던 1995년 4월에 공범과 함께 슨토군의 한 노상에서 강도사건을 일으켜 체포, 강도치상과 공갈, 절도죄로 징역 4년 6개월[6]이 선고되었다. 결국 핫토리는 집행유예가 취소되면서 기존 혐의까지 더해 형이 집행되었고, 2001년 4월 가석방되었으나 복역 기간 중이던 1999년 1월 이혼했다.

핫토리는 가석방된 이후 운송회사에서 일하는 한편 이혼한 전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2001년 10월경부터 한때 일했던 미시마시의 한 건설회사에 다시 취직, 전처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5. 재판과 그 이후[편집]


2004년 1월 15일 시즈오카지법은 1심에서 핫토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 측이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 피고인 핫토리 측도 마찬가지로 양형부당으로 항소를 제기했다.

이후 2005년 3월 29일 도쿄고등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한 1심 판결을 파기하고 검찰의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가 청소년기부터 비행을 저질러 2차례에 걸친 교정교육을 받고 성인이 된 후 징역형에 처해져 장기간 복역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석방을 거쳐 형기가 끝난 지 채 반 년이 못 된 시점에서 저지른 범행임을 언급하며 피고의 규범의식이 현저하게 희박하고 갱생 의욕이 부족하며, 범죄 성향이 뿌리깊고 범행의 죄질도 매우 악질적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피고가 반성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기는 하나 그것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참작될 사정[7]을 최대한으로 고려한다고 해도 잔인한 범행 수법과 갱생 의지가 결핍된 점 등을 고려할 때 피고의 범죄 책임이 지극히 중대하다고 밝혔다.

핫토리의 변호인은 판례 위반이라는 이유로 2005년 3월 30일자로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2008년 2월 29일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사형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변호인 측이 상고심 판결에 불복하여 판결 정정을 신청했으나 이마저도 3월 17일자로 기각되었다.

이후 핫토리는 도쿄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2012년 8월 3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40세.


6. 판결이 화제가 된 이유[편집]


'나가야마 기준'이 제정된 이후로는 거의 최초의 이례적 사형 사례로 큰 화제가 되었다.[8] 나가야마 기준은 범죄 동기, 성질 등의 9가지 기준 중 특히 피해자의 수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하여 양형을 결정하는데, 이에 따르면 무조건 사형은 피해자가 4명 이상인 사건일 경우에 해당된다.[9] 이 사건과 같이 살인 피해자가 1명인 경우는 '지나치게 명백한[10]' 가중사유가 없는 이상은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하게 되어 있고, 이에 따라 1명을 살해한 살인범에게 사형이 확정된 사례는 이 사건 이전까지 총 24명이었다. 이 중 23명은 금전적 이득 목적의 살인[11]이거나 범인에게 이미 살인 전과가 있는 경우로 국한되어 있었고, 유일한 예외 사례는 범인 스스로가 사형을 희망했던[12] 나라 초1 유괴 살인사건뿐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처럼 금전적 사리사욕 목적이나 살인 전과가 모두 없는[13] 피고인에게 하급심의 사형 판결이 최고재판소에서 그대로 유지된 것은 기준 제정 이후로 유례가 없는 사례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술된 2심 재판부의 양형 사유(잔인한 범행 수법, 갱생 의지 부족 등)가 크게 작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7. 유사 사건[편집]


  • 나고야 드럼통 살인사건
2004년 4월 나고야시에서 2명의 여성이 6명의 남성들에게 납치당해 불태워져 살해된 강도살인 사건. 주범격인 2명은 2009년에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나머지 4명 중 2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2명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며 2021년 시점에서는 만기출소한 것으로 추정.

  • 오카야마 토막살인 사건
2011년 9월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서 스미타 코이치(住田紘一)라는 남성이 자신과 교제중이던 여성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그 분풀이를 하겠다는 이유로 자신이 근무하던 직장에서 파견사원으로 일하던 여성을 강간, 살해하고 금품을 절취한 사건. 이 사건도 미시마 여대생 살인사건과 마찬가지로 범인에게 살인 전과가 없고 피해자가 1명인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이 사건의 경우는 2009년 5월 재판원 제도가 도입된 이후 최초의 사형 판결이라는 의미가 있다.[14] 이후 스미타 본인이 항소를 취하함으로써 그대로 사형이 확정되었고, 2017년 7월에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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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시마 여자 단대생 소살(태워 죽임) 사건[2] 나가야마 노리오 사건의 상고심 판결을 계기로 제정된 살인범죄자의 사형에 관한 양형 기준. 이 기준은 범죄 동기와 성질 등의 9가지 항목, 그 중에서도 피해자의 수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판단한다.[3] 단기대학의 줄임말. 한국의 전문대학에 해당한다.[4] 그가 증언하기로는 마약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도 사치코를 살해한 동기였다고 한다.[5] 사실 핫토리는 그 전부터 도벽이 있었던 탓에 동네에서 문제아로 유명했다고 한다.[6] 검찰은 징역 7년 구형[7] 체포 후 10일째 되던 무렵 형에게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를 위해 분향을 해 달라고 부탁했고, 유족에게 사죄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8] 또한 시즈오카현에서 발생한 사건 중에서는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9] 다만 근래에는 무조건 사형은 아니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납득할 수 있는 동기가 있을 경우에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참고로 피해자가 2~3명인 경우는 '명백한 정상참작 사유'가 없을 경우 사형.[10] 즉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야 할 만한[11] 강도살인, 보험금 살인, 유괴살인 등[12]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뒤 항소를 취하했으며, 2013년에 형이 집행되었다.[13] 전술한 바와 같이 핫토리에게는 주로 도벽으로 인한 절도 전과 정도가 있었지 살인 같은 중범죄 전과는 없었다.[14] 재판원 제도 도입 이후 총 1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카야마 사건은 그 중에서도 피해자가 1명인 사건 중에서는 3번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