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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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Bavarian Soviet Republic
Münchner Räterepublik

파일:적기.svg
국기
1919년 4월 6일 ~ 1919년 5월 3일
표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가
인터내셔널가
수도
뮌헨
정치체제
사회주의
언어
독일어
통화
파피어마르크 (ℳ)
역사
• 건국: 1919년 4월 6일
• 멸망: 1919년 5월 3일

지도
파일:Map-WR-Bavaria.svg
파일:낫과 망치.svg

1. 개요
2.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한 건국
3. 멸망


1. 개요[편집]


독일 11월 혁명 당시 세워진 바이에른 인민국의 뒤를 이어 설립된 공화국.

2.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한 건국[편집]


공화국의 뿌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 제국의 패배로 인해 사회적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 결과로 독일 11월 혁명이 발생했고,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러시아 혁명 1주년인 11월 7일 쿠르트 아이스너는 6만명의 군중들 앞에서 즉각적 평화, 일당 8시간의 노동, 실업수당 지급의 내용을 담은 연설을 했고, 군중들은 병사들의 막사로 몰려가, 대부분의 군인들을 혁명에 가담시키는 데 성공했다.
바이에른 왕국루트비히 3세는 궁전에서 도망쳤고,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정치인 쿠르트 아이스너바이에른 자유주의 수상이 되었다.

쿠르트 아이스너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주장했지만, 정부가 재산권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하며 볼셰비키와 거리를 뒀다. 새 정부가 기본적인 정책을 제공하지 못하자, 1919년 1월 선거에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은 6위로 패배했다. 1919년 2월 21일 그는 사임 선언을 하기 위해 의회에 가던 중 우익 민족주의자(안톤 아르코팔라이 백작)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다수파사민당의 요하네스 호프만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대체하여 연립 정부를 세우지만, 정치적 지지를 받는 데는 실패한다.

그 이후에는 에른스트 톨러가 정권을 잡고,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를 통치기구로 하는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외교부 의원이라는 작자가 스위스에 전동 기관차의 대여를 요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스위스에 전쟁하겠다고 으름장을 내놓는다던가, 방이 세개 이상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만들어내는등 실책을 반복하면서 결국 실각한다.

1919년 4월 12, 오이겐 레바인이 정권을 잡았고,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러시아의 붉은 군대를 본딴 붉은 군대의 창설, 정부의 식량 공급 독점, 노숙자에게 고급 주택 불하, 공장의 소유를 노동자에게 배분하는 정책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레비네는 레닌의 지령에 따라,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을 체포해 인질로 삼았다. 레비네는 화폐 폐지, 교육 혁신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식량 부족과 그에 대한 망언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실제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오이겐 레바인의 정권때는 식량 부족 문제가 매우 심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우유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이에대해 대중들이 정권을 비판하자 정부에서 한 대응이 가관이였는데, 우유는 있어봤자 어차피 대부분 부르주아들에게 갈건데 부르주아들이 죽는게 뭐가 문제냐? 같은 태도로 나왔다고 한다.



3. 멸망[편집]


얼마 후인 1919년 5월 3일, 약 9천여 명의 국가방위군과 3만여 명의 민방위대가 공산주의자들과의 격렬한 시가전 끝에 뮌헨에 입성하였다. 시가전 중 약 100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죽었으며, 700여 명의 남녀가 체포되어 바이마르 공화국 군인들에 의해 즉결처형되었다.

뮌헨 함락과 함께 바이에른에 독립적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던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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