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서(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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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군인.

2. 생애[편집]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을 하다가 해방 후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통일부는 1929년 출생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북한에서 발표한 부고의 나이를 보면 계산이 안맞다. 1925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전후 조선인민군 건설에 큰 공을 세웠다 카더라. 김일성의 고종사촌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풍문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는 등 이미 이 시기부터 중요한 군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후보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어느 시점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공화국영웅 칭호도 받았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820전차군단장에 임명되었고 1989년 11월 군 상장으로 진급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92년 4월에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음으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태병렬, 조명선, 김룡연, 리종산, 리하일, 리병욱, 리봉원, 리동춘, 장성우, 조명록, 김일철, 김영춘, 김봉을, 전재선, 김리창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을 지냈다. 통일부는 그가 1995년 3월,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6년 10월, 평양방어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97년 2월, 최광김광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7년 4월 1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88호에 따라 김일철, 전재선, 리종산과 함께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했으며, 1998년 9월에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선 탈락했으며 2005년에 전진수에게 평양방어사령관을 물려주고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령으로 인한 은퇴로 보인다.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333호 선거구 선거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2010년 1월 4일 20시,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해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인민무력부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그는 조선로동당의 선군혁명령도를 높이 받들고 인민군대를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튼튼히 준비된 무적필승의 혁명강군으로 강화발전시키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박기서는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 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령도에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그의 생애를 기렸다. 통일부는 그가 사망 시에 중앙군사위원이었다고 파악하고 있지만 북한의 부고에는 중앙위원회 위원 직함만 언급하였다. 김정일이 애도를 표하며 화환도 보내주었다.

2022년 8월 25일,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혁명무력의 핵심골간을 키운 위대한 동지애의 품"란 기사를 통해 전재선, 최형관, 김성규와 함께 박기서를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고 조국의 천리방선을 지켜 부대의 싸움준비와 전투력강화에 기여한 대련합부대장'으로 언급하였다.

3.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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