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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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인. 방학세와 더불어 최후까지 생존한 유일한 고려인 출신이다.

2. 생애[편집]


1917년 12월 6일에 빈농의 아들로 출생했다. 북한의 공식적 주장에 따르면 그는 함경북도 단천시 출생이나 가족을 따라 소련으로 이주한 것이다. 박의완의 경우처럼 실제로 그런 케이스도 있으나 방학세의 경우처럼 북한에서 출신지를 조작하는 경우도 있어서 약간 미심쩍지만 일단 북한 공식 표기를 따른다.

소련에서 전연방공산당에 가입, 레닌그라드 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대 말에 소련군에 입대하여 포병장교가 되었다는 정보가 있다.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콜호즈 의장으로 있다가 실적이 나빠서 해임당하고 88여단에 파견되었으며 장교도 아니고 일개 병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1942년 11월에 88여단에 배치되어 김일성과 합류했다. 해방 후에 당연히 조선으로 파견되었으며 평안북도에 주둔했고 신의주 당위원장을 한 김일 밑에서 선전부장을 했는데 원래부터 인정이 많고 부대 규율을 잘 따르는 성격이라서 빨치산 1세대 수뇌부와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덕분에 나중까지 생존한 것으로 보인다. 안전참모학교 통역관, 소련군 특무장을 거쳐 1946년 9월, 조선인민군 상좌계급을 받고 1사단 포병부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47년에 소련공산당에서 북조선로동당으로 당적을 전환, 평남 개천보안간부학교 부교장, 1948년 북조선로동당 평안북도당 조직부장을 거쳐 1948년 9월 정부 수립 이후 민족보위성 포병지휘국 참모장에 임명되어 조선인민군 포병 건설의 기반을 닦았다. 1949년 2월 7일,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처음에는 북한에 남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슈티코프와의 면담에서 소련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펄쩍 뛰었다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제일 오래 북에 남게 되었다.

1950년 5월, 조선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등과 함께 소련고문단이 짜준 남침계획을 조선어로 번역하였으며, 6.25 전쟁 발발 이후 전선사령부 포병부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 최고사령부 포병사령관까지 진급했다. 1952년 4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받았다. 전후 1954년 8월, 포병사령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불어닥친 군부 내의 대숙청에서 김일성 우상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살아남았다.

1957년 9월, 2차 내각이 출범하면서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8년에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에 군사대표단으로 다녀왔으며 1960년 10월, 상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출신이라는게 문제가 되었는지 1961년 4차 당대회부터는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하여 한동안 선출되지 않았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재선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민족보위성이 인민무력부로 개편되자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유임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이후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극렬, 백학림, 김두남, 리을설, 주도일, 김광진, 리두익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6년 12월, 6기 12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87년 12월 3일, 칠순기념 공화국영웅 칭호, 금별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으며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4월 20일,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의 공동 정령에 따라 최광, 리을설, 주도일, 최인덕, 백학림, 리두익, 김광진과 함께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5년 7월 19일 오후 2시 30분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전후 무력기관에서 중요한 직책에서 오래동안 사업하면서 주체적인 군사로선을 관철하며 우리 인민군대를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모든 지혜와 정력을 바쳤다. 동지는 전군 주체사상화방침을 높이 받들고 인민군대를 우리 당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주체적인 군사과학기술을 소유한 무적필승의 혁명군대로 강화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동지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당의 군사로선과 방침을 관철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쳤다."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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