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제3기 (1415-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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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온 기사도의 시대 (1415~1422)
1.1.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5)
1.2. 아쟁쿠르 전투 (1415)
2. 부르주 왕국 (1422~1427)
3. 오를레앙의 처녀 (1428~1431)
4.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1~1436)
5. 오를레앙 칙령과 최후의 승자 (1436~1448)
6. 보르도에서 시작해 보르도에서 끝나다 (1449~1453)
6.1.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475)



1. 돌아온 기사도의 시대 (1415~1422)[편집]


파일:The Battle of Agincourt, 25 October 1415.jpg

"이 나라 사람들은 전쟁을 즐기지. 이들은 에드워드 왕과 웨일즈 공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전리품으로 돈더미에 앉기 위해 대담하게 싸움터에 뛰어들 거야. 우리에게 진짜 왕이 있다면, 프랑스인들에게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 싸우려는 왕이 있다면, 그는 함께 해협을 건너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10만 명의 궁수와 6천 명의 중장병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지금 우리 잉글랜드에는 그런 왕이 없다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1.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5)[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르플뢰르 공방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15년 3월 10일, 헨리 5세는 의회에서 프랑스 침공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 공격 목표가 가스코뉴인지 북부 프랑스인지는 의원들에게조차도 알리지 않았다.

4월, 왕세자 루이는 탄기 뒤 샤텔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도움으로 파리 시와 주요 정부 직위들을 장악했다. 그렇게 아르마냑파를 숙청한 왕세자는 부르고뉴 공작의 딸 마르그리트와의 이혼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이 부르고뉴파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났음을 알렸다.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정치적 양보 없이는 왕세자의 통치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6월, 프랑스의 외교 사절단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헨리 5세는 가스코뉴의 주권을 요구했지만 사절단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고, 결국 헨리는 왕세자 루이의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8월 초, 헨리 스크롭과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의 역모가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모두 체포된 뒤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고작 며칠 뒤인 8월 11일 원정군이 솔렌트에서 출항한다.

8월 14일, 셰프앙코에 상륙한 헨리는 곧바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뒤, 센강 하구와 레자르드강이 교차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소도시 아르플뢰르를 포위했다. 왕세자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을 견제하느라 파리에서 멀리 떠날 수 없었고, 잉글랜드군은 도시를 봉쇄한 채 방어선을 조금씩 점령해갔다.

9월 22일, 아르플뢰르 주둔군은 결국 항복한다. 이로써 프랑스는 전략적으로든 위신에서든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잉글랜드군도 질병과 전투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1.2. 아쟁쿠르 전투 (1415)[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쟁쿠르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후 헨리는 육로를 통해 칼레로 후퇴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우선적으로는 잉글랜드군의 힘을 과시하고 프랑스 왕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정치적 책략이었고, 아마도 방어가 취약한 상태인 아르플뢰르로부터 프랑스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수천 규모의 병력을 운송할 함대를 징발하느니 며칠 육로 행군을 하는 편이 비용 면에서도 저렴하기도 했다.

1415년 10월 8일,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헨리는 처음에는 증조부인 에드워드 3세가 한 것처럼 블랑슈타크라는 이름의 여울목을 통해 솜 강을 건널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샤를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길목을 미리 선점했다. 잉글랜드군은 청야전술로 황폐화된 강변의 마을들을 따라 4일을 더 행군했지만 도하 지점을 찾을 수 없었고, 남쪽으로 행군 방향을 틀어서 프랑스 수비군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다음 그 짧은 틈을 노려 도하 지점을 찾는다는 도박 같은 작전 끝에 결국 기적적으로 수비군을 따돌리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0월 24일, 강을 건너느라 낭비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한 4일간의 강행군 끝에 잉글랜드군이 마주한 것은 칼레로 향하는 좁은 계곡 너머의 도로와 평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메뚜기 무리 같은' 프랑스 군대였다. 프랑스군이 칼레로 향하는 길목의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잉글랜드군에는 전투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대승하고 프랑스는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

11월 23일, 헨리 5세는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왔다.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에드워드 3세 시대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한 의회와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고, 잉글랜드에서는 이제 누구도 랭커스터 왕조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


2. 부르주 왕국 (1422~1427)[편집]


파일:annonce_de_la_mort_de_Charles_VI_au_dauphin.jpg

하지만 잉글랜드는 아직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는 언플왕세자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고, 오를레앙 공작과의 스캔들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퍼트렸다. 그렇기에 트루아 조약이 성립이 가능했다는 논리였고, 또 오를레앙 공작의 땅에 있는 샤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도 매우 적절한 선전이었다.

거기에 잉글랜드는 또 하나의 정통성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랭스였다. 프랑스 왕은 대대로 파리가 아닌 대성당이 있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샤를이 정식으로 프랑스 왕권을 주장하려면 파리뿐만 아니라 랭스까지 회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덧붙이면 프랑스는 아비뇽 교회마저도 교황이 난립하는 반면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한 명의 로마 교황이 있었다. 오늘날 가톨릭에선 분열시대의 아비뇽 교황은 정통 교황이 아닌 대립 교황으로 본다.

부르고뉴파의 도움까지 얻은 잉글랜드군은 1424년 베르네유(Verneuil)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플레이트 아머vs장궁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일단 승리는 플레이트 아머. 근데 이탈리아 용병들은 잉글랜드군 측면을 공격한 게 아니라 본진을 털러 가다가 반격크리 먹고 달아나버렸다. 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의 지원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쐐기를 박기 위해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기어이 1428년에는 샤를의 본거지가 목전인 루아르 강까지 남하했다.


3. 오를레앙의 처녀 (1428~1431)[편집]


파일:Contemporaine_afb_jeanne_d_arc.jpg

여기저기서 흔히 보고되는 것처럼, 자신을 장느 라 퓌셀이라고 불렀던 그 여자는 거짓 예언자로서, 신의 섭리와 자신의 성별에 반하여 두 해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며 이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우리의 주적에게 가서 그의 당파에 속한 성직자, 귀족, 평민들과 함께 자신이 주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여러 번 주장하고, 오만하게도 성 미카엘과 천국의 많은 천사와 성인들, 그리고 성 카타리나와 성 마가렛과 자주 개인적이고 명백한 교제를 했다고 자랑했다. 또한 마치 기사와 향사들처럼 갑옷을 입고, 전투 깃발을 세우고, 매우 큰 악의와 자만과 오만으로 가장 고귀하고 우수한 프랑스 왕의 문장기를 요구하고 얻어내 많은 전투와 포위전에서 그것을 직접 휘둘렀고...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전장에 나가 군인들을 이끌고 큰 부대를 지휘하여 살상을 하고 광범위한 소요와 혼란을 일으켰으며, 그들을 위증과 반역과 거짓되고 미신적인 믿음으로 선동했고,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방해하고 죽음의 전쟁을 다시 일으켰으며, 많은 이들에게 성스러운 여성으로 숭배받고 존경받는 것을 즐겼고, 그밖에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저주받은 일들을 저질렀으며, 이는 많은 곳에서 거의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큰 불쾌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1431년 6월 잉글랜드 정부의 포고문


잉글랜드군의 다음 목표는 오를레앙이었다. 오를레앙은 앞서 말했듯 샤를을 돕는 마지막 대영주의 영지였으며, 중부 프랑스의 요충지로서 함락될 경우, 잉글랜드군이 루아르 강을 건너 왕세자 샤를의 본거지인 시농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오를레앙의 시민과 주둔군들은 오를레앙 공을 붙잡고 도시를 포위해 온 잉글랜드군에 분개하여 결사항전했다. 문제는 장기간의 포위와 프랑스군의 구원 실패로 인해 물자와 식량이 부족해지고 방어 능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잔 다르크. 잔 다르크와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농성이 아닌 야전으로 잉글랜드를 몰아내버렸다.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은 1429년 6월 파타이 전투에서 전설적인 명장 탈보트 경의 군대마저 격파했고 7월에는 심지어 트루아와 랭스#까지 항복하게 만들고 샤를을 정식 프랑스 왕 샤를 7세로 즉위시키면서 전장의 추를 프랑스 쪽으로 돌려놓는다.

잔 다르크 자신은 파리까지 수복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을 안정시키려던 온건파 샤를 7세와 기존 프랑스 귀족의 견제를 받다 파리 탈환의 기회를 놓쳐버린다. 더불어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혀 1431년 루앙에서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가 활약한 시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백년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지대하다.

잔 다르크의 승리 요인으론 역시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잉글랜드군 200명만 만나도 튈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성처녀라는 이미지에 스스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장 뷔로를 비롯한 유수의 대포 전문가의 활약도 들긴 하는데 대포가 활약하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4.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1~1436)[편집]


파일:Français_2691,_folio_085v3.jpg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그동안 앙숙이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가 프랑스 왕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 관계를 단절하면서 더이상 프랑스 내에서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샤를 7세는 마콘 백작령, 폰티우 백작령, 오세르 백작령 및 아미앵, 기타 도시의 영유권을 필리프 3세에게 양도하고, 프랑스 왕에 대한 종속의 예를 평생 면제하였다. 반면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 관계를 정식으로 파기하였으며, 그 결과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다년간에 걸친 항쟁에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동맹을 잃었기 때문에 백년전쟁 종결을 위한 조건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훗날 독립각을 잡던 부르고뉴는 용담공 샤를의 전사로 프랑스에게 합병당한다.

이후 프랑스군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 경과 라 이르 같은 장수들의 활약으로 1436년 파리를 수복하고 1437년 파리를 다시 프랑스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전세를 역전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잉글랜드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간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둘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는 게 장미전쟁이다.


5. 오를레앙 칙령과 최후의 승자 (1436~1448)[편집]


파일:Compagnies d'ordonnance2.jpg

아라스 조약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에서는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이 도적이 되는 현상이 다시 벌어졌다.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1439년부터 전쟁세가 다시 정기적인 조세로 정착되었다. 그렇게 쌓은 재정을 기반으로 1445년 샤를 7세는 상비군인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을 창설한다.


6. 보르도에서 시작해 보르도에서 끝나다 (1449~1453)[편집]


파일:Bataille_de_Castillon_1453.jpg

프랑스군은 1441년 상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 포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사실 대포 자체가 살상력이 어마어마했다기보다는 프랑스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언덕 위에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우세한 프랑스 병력과 기마대에 쳐발린 식이었다. 포미니 전투를 끝으로 노르망디마저 프랑스 손에 떨어졌으며 앙주 일대 멘까지 수복했다. 전통적으로 노르망디의 일부였던 채널 제도는 프랑스가 빼앗지 못해서 프랑스 본토 코앞에 있는 이곳은 영국의 영토로 확정된다. 조그만한 섬들이라 영국이 이곳까지 다스리긴 하지만 채널 제도는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고 있는 영국 왕실 영토이다.

뒤이어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으로 탈보트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분전을 분쇄하고, 보르도 시를 포함한 가스코뉴를 점령해,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버렸다. 116년 전 프랑스 왕이 가스코뉴 영지 몰수를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프랑스군에 의해 보르도가 함락되면서 끝났다.


6.1.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475)[편집]


나약한 헨리 6세가 칼레를 지키기 위해 잃어버린 노르망디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1475년) 잉글랜드는 더 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했고, 이것이 백년 전쟁의 끝이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칼레[1]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칼레는 잉글랜드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도 기능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잉글랜드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잉글랜드는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영국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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