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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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고조부가 정성왕후의 아버지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이다.
2. 생애[편집]
영조 말기 1774년에 문과에 급제해서[3] 정조, 순조시대에 주로 활동했다.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1819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1년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4년 뒤에 사망하였다.
최연소 우의정이었던 이덕형에는 못 미치지만 이쪽도 승진이 빨라서 44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다만 후술하는 아버지 문제로 고향에 칩거해 있다가 영의정을 한참 늦게 달았고 이것 때문에 공백기간이 길어서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사임하였다.
3. 여담[편집]
- 정조 초기에 정약용과 같이 일했는데, 1794년 경기도 관찰사 시절에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가서 서용보의 비리를 고발하는 바람에 파직되어 사이가 틀어졌다는 썰이 있다. 실제로 1794년에 관찰사에서 물러난건 사실인데 실록에는 왜 물러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업무 보고가 늦어서 문책 받은 기록은 남아있는데 시점상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파견되기 몇달 전 이야기다.
- 일성록에는 좀 더 정확하게 나오는데, 정조 18년(1794년) 11월 16일 내용을 보면 이 시기에 경기도에 암행어사를 여러명을 풀었는데,[4] 아래 수령들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 여담으로 경기도 관찰사에서 물러난 다음 관직이 정조의 화성행차 관련 업무를 맡던 정리사(整理使)였다.
- 경기도 관찰사 시절에 정조의 명으로 시흥로(현 경수대로의 전신)를 추진한 적이 있다. 본래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참배를 위해서는 남태령으로 가야 하는데 남태령이 많이 험해서 우회로를 만든 것이 지금의 서울-안양-수원 루트의 길이다. 하지만 본인 재임 중에는 완성을 못했는데, 위의 정약용 건과 관련하여 이석우 전 남양주 시장이 잡설을 푼적이 있다.
-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서용보는 순조 초기에 우의정으로 고속승진을 했으나 졸기에 따르면 우의정에서 영의정까지의 공백기간이 14년이나 된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서용보의 아버지인 서유녕이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인 김귀주를 모함해서 귀양보냈다는 의혹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서용보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게 김귀주 숙청의 배후는 다름아닌 정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순왕후도 "배후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 겁먹지 말고 복직하라"는 전교를 계속 내렸다.
-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9회에서 정약용의 라이벌로 조명되었다. 사실 라이벌이라고 해준 것도 아주 좋게 보인 것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그냥 정약용을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악역 영식(...) A 포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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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2세 보(輔) 항렬[2] 동생 서응보(徐應輔)의 아들[3] 당시 한국나이로 18에 과거 시험에서 소과와 대과를 1년만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다.[4] 암행어사 중에 정약용이 끼어 있다.[5] 정확히 따지면 서용보의 양아들이자 서응보의 친아들인 서대순의 손자가 서광범이므로, 서응보가 친증조부이겠지만 어쨌든 족보상으론 서용보가 증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