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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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방글라데시의 국부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방글라데시 정부의 설립자이며, 前 총리 셰이크 하시나의 아버지. 존칭은 봉고본두.[1]이 투쟁은 우리의 자유를 위한 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입니다! 벵골에 승리가 있으리![* 벵골에 승리가 있으리!는 현재 방글라데시의 국가표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구가 라흐만의 연설에서 처음 쓰인 것은 아니고, 방글라데시의 국민 시인인 카지 나즈룰 이슬람이 1922년 쓴 시에서 처음 등장했다.]
3월 7일 연설 中.
2. 상세[편집]
방글라데시 제1·4대 대통령, 제2대 총리를 역임했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대통령의 자서전과 정부 공식 평전이 한국에 출간되었다. #, #
방글라데시 타카 권종의 모델이기도 하며 BBC 방글라 선정 위대한 벵골인 1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방가반두'라 불리며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사실상 방글라데시의 마하트마 간디.
허나 독립 후 한국의 친일파와 비슷한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으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여[2]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 식민지 시기를 찬양하고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는 정당이었고 현재와 달리 아와미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운동 연합체에 가까웠으므로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운동 연합체인 아와미연맹 중심의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군부 내부에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식민지 부역자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장교들이 8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숙군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식민지 부역자가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였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다. 그러나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뤄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졌기 때문에, 군부가 실권을 쥐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과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둘로 갈라졌다.
때문에 1975년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칼레다 지아 전 총리의 남편)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특히나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다. 이는 마치 한국이 해방 후에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군대를 장악하고 집권한 정부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하고자 하니 쿠데타를 벌인 것과 같다.
결국 1975년 8월 15일 새벽 5시경 봉고본두가 거주하는 사저[3] 에 침입한 쿠데타군에 의해 당시 유럽 유학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의 일가족 전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심지어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살(1964년 10월 18일~1975년 8월 15일)이던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도 있었다.
그러나 봉고본두 살해의 성공과는 별개로 독립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은 군부도 감히 어찌 하지 못해 존속되었고, 1990년 민주화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가 총리가 된다. 그리고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은 이때까지도 방글라데시 내에서 이런저런 공직들을 맡으며 나름대로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가 집권하면서 잔혹한 살해에 가담한 군인을 처벌하지 못하는 기막힌 법률을 폐지하자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된다. 그리고 사건 발생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도피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6명은 그 사이에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3. 평가[편집]
'그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의 비범한 영웅적 면모는 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지역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
'나는 히말라야 산맥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셰이크 무집은 본 적이 있다. 강건한 성격과 용기를 지닌 그를 히말라야라고 하고 싶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총리
'무지부르의 강점은 타협하지 않는 소신과 따듯한 통솔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자국민의 존엄성과 인권증진 위해 열렬히 투쟁에 앞선 선구자다. 그에게 부여된 봉고본두라는 호칭은 조국의 민중들에게 가졌던 남다른 사랑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민중의 수호자이며 그들에게 봉사함에 있어 궁극적인 희생을 보여주었다.'
프라나브 무케르지, 인도 대통령
'국가적으로는 최악의 참사이자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비극이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민족의 권리와 존엄을 위해 싸운 위대한 정치가였고, 독립과 국가적인 의무에 변함없이 헌신했다.'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업적과 사상은 방글라데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벵골인들에게 자유의 상징이다.'
모하마드 하산인 하이칼, 이집트 저널리스트
'파드마, 메그나, 자무나, 구리강이 흐르는 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그대는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다.'
안나다 샨카 레이, 시인 겸 수필가
'이렇게 폭력적이고 비겁한 방식으로 방글라데시 국민들로부터 훌륭하고 용기 있는 국부를 빼앗아 간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러나 오늘날 방글라데시는 원대한 비전과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그의 딸의 리더십 안에서 한걸음 더 성장하고 있다. 미국은 방글라데시의 강력한 지원군이자 친구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4. 여담[편집]
- 큰딸인 셰이크 하시나의 국가유공자 자녀 공무원 할당제[5] 에 반대해 발생한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에 의해 졸지에 자기 동상이 참수되고, 다카에 있는 봉고본두 기념관도 불태워진 후 약탈당했다(...) 동상 참수 모습 불태워진 기념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