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토 로드리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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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토 로드리게즈
Sixto Diaz Rodrigu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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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2년 7월 10일
미국 미시건디트로이트
사망
2023년 8월 8일 (향년 81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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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가수
데뷔
1970년

1. 개요
2. 생애
2.1. 남아공에서의 인기
2.2. 영화 서칭 포 슈가맨
2.3. 호주에서의 인기
2.4. 이후 활동
2.5. 사망
3. 음반
4. 여담



1. 개요[편집]


슈가맨으로 유명한 미국의 가수이다.


2. 생애[편집]


1942년 7월 10일 미시건디트로이트히스패닉 가정에서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이름이 식스토인 이유도 그 때문. 웨인 주립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에 임금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술집에서 노래를 하던 그를 모타운 산하의 서섹스 레코드에서 발굴하여[1] 가수로 데뷔한다.

파일:external/sugarman.org/rodriguez_march_1970.jpg

많은 기대를 받은 그의 앨범은 당대의 유명 프로듀서에 의해 제작되면서 1집 Cold Fact(1970)와 2집 Coming from Reality(1971)를 발매했다. 하지만 1집 Cold Fact의 미국 내 매상 매수는 단 여섯장에 그쳤는데, 그마저도 3~4장은 가족과 프로듀서가 산 것이다.[2] 음반을 제작한 프로듀서는 결과에 안타까워 했다. 노래는 완벽했는데,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결국 로드리게즈는 음반사와의 계약이 해지되었고 그렇게 잊힌 가수가 되면서 사라지는 듯 했다.


2.1. 남아공에서의 인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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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안되는 Cold Fact 앨범 구매자 중 한 명인 미국인 여성이 남아공에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때 가져가면서, 남아공에 그의 노래가 전파된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로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내외부적으로 암울한 상황인 남아공에서 Sugar Man의 가사는 큰 반향을 일으켜 시대를 이겨내는 민중들의 주제가가 된다.

남아공에서는 롤링 스톤즈를 능가하는 폭발적 인기와 더불어 로드리게즈란 가수에 대한 호기심도 커져갔는데, 워낙 알려진 것이 없었기에 공연 중 무대 위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는 둥, 분신자살을 했다는 둥 소문만 무성히 퍼져나갔다.


2.2. 영화 서칭 포 슈가맨[편집]





이후 몇 십년의 시간이 흐르자 그는 실체가 없는 전설 속 인물이 되어 모두가 당연히 세상을 떠난 인물이라 생각했다. 지미 핸드릭스가 고인인 게 당연하듯이 로드리게즈가 세상을 떠난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졌다고 한다.[3]

그래서 이 여정은 '그는 어디있는가?'가 아니라 '그는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했다. 두 명의 열성팬인 중고 음악상 스테판 시거맨과 음악 평론가 크레이그 바솔로뮤가 의기투합해 로드리게즈의 흔적을 찾아나서기로 하는데 단서가 거의 없어 매우 고생했다.[4]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단서는 로드리게즈가 쓴 노래 가사인데, 노래 'Inner City Blues'의 가사 "Meta girl from Dearborn Early six o'clock this morning"에서 '디어본'이라는 지명이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디어본은 디트로이트 내의 지명인데, 이것이 꼬리의 꼬리를 물어 Cold Fact 앨범의 프로듀서 마이크 티어도어로 이어진다.[5]

바솔로뮤는 티어도어에게 전화를 걸어 (로드리게즈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과 함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묻자 돌아온 답변은 당연히 "...로드리게즈 잘 살아있는데?" 이에 죽은 사람을 찾기 위한 여정은 결국 산 사람을 발견함으로 끝났으며 바솔로뮤는 이 여정을 '로드리게즈를 발견! 죽은 가수를 찾은 지 3년'이라는 기사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기사는 인터넷을 통해 대서양을 건너 로드리게즈의 장녀 에바에게 우연히 전해졌고, 시거맨, 바솔로뮤에게 로드리게즈의 연락이 직접 닿게 된 것이다. 이후 로드리게즈는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공을 방문, 1998년 3월 8일 콘서트를 열어 새로운 가수 인생을 시작한다.

위의 과정을 그린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가 바로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이다. 스웨덴, 영국 합작 영화로 말릭 벤젤룰[6]이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았다. 평단에서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으로, 2012년에 각종 상을 휩쓸고 2013년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장편 다큐멘터리상까지 수상했다.

로드리게즈는 이를 계기로 2013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도 참석했다.

2023년 8월 로드리게즈의 사망 후, 한국에서 2023년 10월 11일 개봉 11주년을 맞아 재개봉했다.

JTBC 음악 예능 프로그램 슈가맨 또한 이 영화에서 모티브와 이름을 따온 것이다.


2.3. 호주에서의 인기[편집]


사실 로드리게즈는 1970년대 말(1979년 경 라이브 앨범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주에서도 남아공에서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잠시 인기를 얻었다. 호주 역시 백호주의 등으로 당시 굉장히 보수적인 환경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Holger Brockman이라는 호주의 라디오 DJ가 시드니에서 그의 노래 Sugar Man을 자주 틀었다고 하며, 이후 투어도 두 번이나 했으며 첫 공연은 무려 1만 5천석 규모로 진행했다고 한다. 호주 투어 당시 10대인 두 딸과 함께 여행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로커 로드 스튜어트 급의 대우를 받았으며 호주의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선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나 빌리 조엘과 함께 필청해야 할 가수로 여겨졌다고 한다.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보면 로드리게즈가 굉장히 담담하게 남아공 공연을 치르는 것도 이러한 이전의 일화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지금도 로드리게즈는 인생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느낀 순간으로 남아공이 아닌[7] 호주 공연을 꼽는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이 호주에서의 그의 위상을 생략한 것과 관련해 만들어진 신화라고 평가 절하하였다.[8]


2.4. 이후 활동[편집]


호주와 남아공에서의 인기로 로드리게즈가 벌어들인 돈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라 정기적인 콘서트 수입만으로도 자체 충당이 가능하게 되었다.[9] 거기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유럽권에서도 로드리게즈의 인기가 올라갔고, 로드리게즈를 다룬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이 오스카 수상을 하면서 로드리게즈의 가치는 그야말로 천정부지에 이르게 되었다. 로드리게즈가 북미권에서 작게 한 콘서트들만 봐도 몇천석 규모에 공연비도 많이 받았다고 하며 2013년에 진행한 남아공 투어만으로 70만 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번째 앨범 Coming from Reality(1971)의 커버 사진을 찍은 디트로이트 시내의 빈민가에 자리잡은 허름한 집에서 컴퓨터나 TV도 없이 살았는데 4820 Avery St, Detroit, MI 48208 로드리게즈의 말로는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 있으면 더 필요한 것이 없다고 발언했다. 수입 대다수를 성공하기 전에 신세진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줬는데, 자신을 위해 쓰라고 해도 핸드폰 하나 안 샀다고 한다. 다큐멘터리가 오스카에서 수상할 당시, 수상을 한 것도 모르고 자다 딸에게 전화를 받고 일어나서야 알았다고 할 정도다.

생전 로드리게즈의 공연 일정이 빡빡해, 오랜 육체 노동과 건강 악화에 노화로 가족들이 많이 걱정한다고 한다.


2.5. 사망[편집]


2023년 2월부터 앓은 뇌졸중으로 인해 8월 8일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3. 음반[편집]



정규 앨범은 단 두 장으로 남아공에는 LP와 CD 등을 거쳐 40년간 국민 가요로 꾸준히 팔렸다.

그의 앨범은 수십만장 이상이 팔렸다고는 하나[10] 판매량은 단지 추정만 될 뿐이다. 이는 음반 대부분이 불법 복사본이기 때문으로 로드리게즈는 음반 판매로 인한 어떠한 금전적 이득도 볼 수 없었다.

거기다 남아공 내의 몇몇 메이저 레코드사가 로열티를 지불하고 정식 음반을 발매했는데, 당시 서섹스 레코드 사장 클라렌스 아벤트는 로열티를 지불받았음을 부정했다.[11] 현재 미국/영국 판권은 라이트 인 더 애틱이라는 재발매 전문 레이블에 있으며, 2008~09년에 재발매했다.

2집의 실패로 물거품이 된 3집 작업을 끝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4. 여담[편집]


2018년 투어를 마지막으로 음악 활동을 그만 뒀으며, 오랫동안 앓은 녹내장으로 인해 거의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의외로 로드리게즈처럼 한 두 장 앨범을 낸 뒤 실패해 사라졌다 재발굴되는 뮤지션들이 많다. 주디 씰이나 바시티 버넌이 대표적. 다만 이 둘은 비교적 조용하게[12] 평단과 후배 뮤지션에게 재발굴된 반면 로드리게즈는 워낙 극적인데다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히트해 유명해진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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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다 레코드를 만든 업계 큰 손 클레런스 아벤트가 설립한 레이블. 소속 가수들이 나름 쟁쟁했고 이 중 빌 위더스가 히트를 치긴 했지만, 별로 빛을 보지 못한 채 해산했다.[2] <서칭 포 슈가맨>에서 서섹스 레코드 사장이 말했다. 후술하겠지만 사장은 남아공 레코드사가 지불한 로열티의 행방을 묻자 급발진하며 증거 있냐고 되묻는 등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 단 여섯장만 팔렸다고 한 말의 신뢰도가 떨어진다.[3] 비슷한 경우로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있다. 주세페는 21세기 들어서도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마이클 베이보다 고작 열 살 정도 더 많고 스티븐 스필버그보다 열 살 더 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4] 바솔로뮤는 이제 여기서 그만 두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5] 디어본 → 디트로이트 → 모타운의 고향 →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 마이크 티어도어.[6] 2014년 5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7] 남아공 투어 첫 공연은 약 2만 석이었다고 한다.[8]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주 무대인 남아공에서는 말 그대로 신화나 다름없었다. 정부의 검열 때문에 로드리게즈가 호주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9] 사실 뮤지션 수입 중에서 공연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반 이상이다. 소닉 유스가 음반은 대단히 많이 팔리지 않음에도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공연 수익이 받쳐준 덕분이다.[10] 100만장 이상으로 보기도 한다.[11] 영화 '서칭 포 슈가맨'에서 클라렌스 아벤트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있는데, 로열티의 행방에 대해 묻자마자 엄청나게 정색하는 아벤트를 볼 수 있다.[12] 주디 씰은 은퇴 후 사망했고, 바시티 버넌은 로드리게즈 같은 인기를 누린 가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