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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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형호.jpg
성명
신형호(申衡浩)
이명
신창한(申昌漢)·신백원(申伯元)·신천아(申天兒)
본관
고령 신씨[1]
생몰
1891년 1월 14일 ~ 1961년[2]
출생지
충청도 문의현 동면 인차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3]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신규식·신건식 형제의 조카이며, 신순호신창희의 사촌 오빠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신형호는 1891년 1월 14일 충청도 문의현 동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생원 신정식(申廷植)[4]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태철(權泰哲)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5]

그는 관립한어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10월 미국으로 이주했고#, 1914년 미국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를 졸업하고 동 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했다. 1918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시카고 지방회에서 서기 및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듬해 5월 디트로이트 지방회 창립을 위해 대한인국민회에 청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만세보(萬歲報)' 주필이 되었고, 이듬해 12월 동지회(同志會)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 구미위원부 서기를 역임하고, 그해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에는 동지회 워싱턴 지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20년부터 1944년까지 대한인국민회, 구미위원부, 동지회에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고령 신씨 대동보에 따르면 1961년경 별세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신형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소안공파 26세 호(浩) 항렬.[2] 고령 신씨 대동보에 향년 70세라고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청용리·행정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신건식·신규식·신순호·신영호·신창희도 이 마을 출신이다.[4] 1868년 ~ 연도 미상 8월 5일. 자 공삼(公三), 호 삼당(三堂). 1885년 식년시 생원시에 3등 95위로 급제하였다.# 1893년 8월 20일 부사용(副司勇)#을 시작으로, 1893년 8월 26일 검서관(檢書官)#, 1894년 7월 28일 규장각 비서주사(秘書主事)#, 1895년 7월 14일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 1896년 3월 7일 탁지부 재무관#, 1897년 11월 18일 탁지부 회계국장#, 1899년 1월 12일 탁지부 참서관#, 1900년 9월 5일 시종원 분시종(侍從院分侍從)#, 1901년 4월 14일 덕천군수#, 1902년 5월 6일 자성군수#, 1903년 5월 12일 중추원의관# 등을 지냈다.[5] 아버지 신정식은 부인을 2명 두었는데, 그 중 안동 권씨는 첫째 부인으로 슬하에 신형호와 차남 신필호(申弼浩), 2녀를 두었으며, 둘째 부인 전주 최씨 최시용(崔時容)의 딸과의 사이에는 셋째 아들 신웅호(申雄浩)와 넷째 아들 신영호(申英浩), 뒤에 신건식에게 입양되는 다섯째 아들 신우호(申羽浩) 및 4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