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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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려 진창이 된 아자즈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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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리아 아자즈.jpg
내전 이전 시내의 모스크
2012년 1차 전투 직후, 반파된 모스크 앞의 T-72A 전차[1]
1. 개요
2. 역사
2.1. 중세
2.1.1. 아자즈 전투 (1030년)
2.1.2. 아자즈 전투 (1125년)
2.2. 십자군 이후
2.3. 시리아 내전
3. 갤러리
3.1. 키로스


1. 개요[편집]


아랍어 أَعْزَاز
영어 Azaz

시리아 북부의 도시. 알레포에서 북쪽으로 30km, 아프린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국경 도시로, 동북쪽 5km 지점에 터키-시리아 국경이 있다. 국경에서 8km 더 가면 나오는 터키의 국경도시 킬리스와 마주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 이전 인구는 약 3만 2천명이었다. 역사적으로 알레포의 북쪽 관문 도시로, 중세 기독교 vs 이슬람 세력 간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시내에는 천년 이상 성채로 활용된 텔 아자즈 유적이 있지만 방치되어 있다. 인근 관광지로 서북쪽 14km 지점 아프린 강 서안의 키로스 유적이 있고, 동쪽 16km 지점에는 쿠란에서 인류 최후의 전장으로 묘사된 다비크 마을이 있다. 해발 56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여름에 40도 이하고 겨울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선선한 기후를 지닌다.

시리아 북부에서 아랍인이 주를 이루는 몇 안되는 도시 중 하나로, 내전 초기부터 시리아 반군이 점령한 후 2013-14년 겨울 다에시의 강점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반군 수중에 있다. 다만 북부의 폭풍 여단, 알 누스라 전선 등 반군 내 이슬람주의 파벌들이 지배하며 혼란이 이어졌다. 2016년 시리아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터키군이 처음으로 점령한 도시로, 2017년부터는 친터키 괴뢰국인 시리아 과도 정부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다. 내전을 거치며 심하게 파괴된 시가지의 복구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전선과 매우 가까워 안정적이지는 않다. 당장 남쪽 4km의 메나그 공군 기지가 정부군 소유이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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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후루스) 유적의 로마 극장 유구

서북쪽의 유적 키로스는 기원전 300년경 셀레우코스 1세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지명은 마케도니아의 도시 키로스 (Κύρρος)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83년 일대는 아르메니아 왕국티그라네스 대왕에게 점령되었다가 기원전 69년 폼페이우스의 원정 후 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로마 시기 키로스는 안티오크와 유프라테스 도하처인 제우그마 사이의 교통, 상업, 군사 요충지였고 제10 프레텐시스 군단이 주둔했으며 자체적인 주화를 주조할 정도로 번영하였다. 3세기 이래로 사산 제국에 의해 수 차례 점령된 도시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요새화되었고, 동시에 독립된 대주교구로 격상되었다. 다만 637년 이슬람 제국군에 점령된 후 쇠퇴하였고, 중세 시기에는 후루스 (حوروس) 네비 후리 (نبي هوري) 혹은 코로쉬로 불렸다. 십자군은 주교구를 복원하고 코르키에 (Coricié)라 불렀으나 1150년 누르 앗 딘에게 점령되었고, 13세기 무렵에는 거대한 유적지로 변모해 있었다.

2.1. 중세[편집]


키로스의 쇠퇴라는 배경 하에 9세기를 전후로 일대의 중심 도시로 부상한 곳이 바로 아자즈이다. 고대 시기 아람어로 하즈, 후르리어로 아자주나, 아시리아 시기 하자주, 중세 그리스어로는 아자지온 (Αζάζιον)이라 불렸다. 이슬람 정복 후 아자즈라 불렸고, 아바스 왕조 시기 음악가 이샤크 알 마우실리에 의해 언급되었다. 10세기 후반 함단 왕조 시기 아자즈의 언덕에는 사각꼴의 벽돌 성채가 세워졌다.

2.1.1. 아자즈 전투 (103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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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년 아자즈 전투

11세기 들어 일대는 미르다스 왕조령이 되었고,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 도시였다. 그러던 1029년, 미르다스 군주 살리흐가 파티마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사하고 시리아 중부를 상실하자 동로마령 안티오크 총독 미카일이 알레포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3세가 2만 대군과 함께 친정에 나섰다. 살리흐의 후계자 나스르는 대군이 집결한 안티오크에 사절을 보내어 동로마 조에 복속하고 조공할 것을 약속했으나 로마노스는 참모들의 조언[2]에도 이를 거부하였다. 1030년 7월 말엽, 안티오크에서 동북쪽으로 진군한 동로마 군은 아자즈 인근 툽발 평원에 요새화된 진영을 세웠다. 한편 지하드를 선포한 나스르는 동생 티말에게 알레포를 맡기고 1천의 경기병을 이끌고 게릴라 전에 나섰다. 10여일간 나스르는 수차례 동로마 정찰대와 식량 조달을 위해 파견된 부대를 중심으로 매복해 격파하였고, 일부의 경우 전멸시켰다.

이로써 동로마 진영은 고립되었고, 부족한 식량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전염병까지 도지며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수뇌부는 8월 10일부터 철수에 나섰다. 아르메니아 용병이 배반하여 물자를 약탈하는 등의 악조건 속에서 나스르의 기병대가 기습 공격을 가하자 동로마 군은 붕괴하였다. 로마노스 역시 겨우 포로 신세를 피했을 정도로 동로마 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였다. 이후 황실 막사를 취한 미르다스 군대는 낙타 70마리 분의 보물을 얻었다고 한다.[3] 다만 여세를 몰아 텔루츠 (가지안테프)를 포위한 아랍군은 태수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에 의해 격퇴되었고, 후자는 역공에 나서 그해 12월 포위 끝에 아자즈를 점령하고 툽발을 불사르며 설욕한다. 이듬해 마니아케스는 에데사 (샨르우르파)를 점령하며 미르다스 조를 더욱 압박하였고, 동생 티말과 권력 다툼을 벌이던 나스르는 결국 군사 보호를 대가로 50만 디르함의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동로마 제국에 복속하였다.

2.1.2. 아자즈 전투 (1125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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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초중반 에데사 백국 최남단의 요새이던 아자즈

11세기 말엽 아자즈는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다만 십자군 전쟁기인 1118년 6월 11일, 안티오크 공국의 로제르가 점령하여 알레포를 위협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주민들의 아르투크 왕조의 일 가지를 초청하였고, 그는 이듬해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로제르를 전사시키며 알레포를 안정시켰다. 1122년 일가지가 사망한 후 알레포를 얻은 조카 발라크는 1123년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2세를 사로잡은데 이어 1124년 초엽 모술 총독 알 보르소키, 부리 왕조의 툭테긴과 함께 아자즈를 포위했으나 십자군 원군에 격퇴되었다. 같은해 발라크는 무슬림 도시인 만비즈를 포위하다 전사하였고, 그 후계자인 티무르타쉬에게 8만 디나르와 아자즈 등 알레포 근교 도시들의 할양을 약속하고 풀려난 보두앵 2세는 안티오크 대주교의 사면?으로 2만 디나르만 납부하고 남은 배상금 납부는 물론 약속한 도시들의 할양도 이행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알레포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민들은 알 보르소키를 초청하였고, 1125년 초엽 알레포를 장악한 그는 근교 도시들의 탈환에 나섰다. 안티오크 공국령 도시들을 수복한 그는 에데사 백국으로 이관된 아자즈를 다음 목적으로 정하고 다마스쿠스의 툭테긴, 홈스의 키르한 등으로 1만여 무슬림 연합군을 편성해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에 보두앵 2세, 에데사 백작 조슬랭 1세, 트리폴리 백작 퐁스, 아르메니아 국왕 레오 1세로 구성된 3천의 기독교 연합군이 구원에 나섰다. 십자군이 아자즈를 점령한지 정확히 7년째인 1125년 6월 11일, 도시 외곽에서 조우하였다. 이어진 전투에서 보두앵은 거짓 후퇴로 무슬림 연합군을 평원으로 끌어낸 후 기사들을 돌격시키는 고전적인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가 티레의 기욤에 의하면 단지 24명의 기사만이 사망하고 무슬림 측은 2천여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승리 후 보두앵은 무슬림 진영을 약탈하여 많은 전리품을 얻어고, 이를 통해 알레포에 수감된 인질들의 석방 협상에 냐셨댜.

십자군 귀족 포로들의 석방을 대가로 휴전을 맺은 알 보르소키는 더이상 대십자군 전선에 나서지 않다가 1126년 말에 암살되었다. 한편 그무렵 7년간 공석이던 안티오크 공작에 오른 보에몽 2세는 과거 로제르의 누이 마리아와 에데사 백작 조슬랭 간의 결혼 당시 지참금으로 에데사 측에 넘겨준 아자즈에 대해, 당시 로제르는 정식 공작이 아닌 섭정에 불과했음으로 지참금으로 영토를 내어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도시를 무력 접수하였다. (1127년 8월) 이에 분노한 조슬랭은 반환 요청이 거부되자 튀르크 용병을 동원하여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하였고, 알 보르소키의 죽음을 틈타 십자군 연합 부대가 알레포 원정에 나선다는 보두앵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양측의 갈등은 1128년 4월 조슬랭이 안티오크 대주교에게 파문당한 후, 보두앵이 친히 중재에 나서며 조슬랭이 보에몽에게 봉신 서약하는 형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아자즈는 에데사 백국에 속하게 되었다.[4]

불안이 이어지던 알레포는 1128년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지휘 하에 다시금 안정을 회복하였고, 그는 1144년 에데사를 함락하며 십자군에 일격을 날렸다. 사실상 와해된 에데사 백국을 대신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토론-바니아스 영주 옹프루아 2세가 아자즈에 60명의 기사를 보내어 수비를 보강하였다. 언제든 함락될 위기에 처한 아자즈는 1146년 장기가 암살되고 그 후계자 누르 앗 딘2차 십자군에 대처하며 한숨 돌렸지만 잠시 수명이 연장된 것에 불과하였다. 1149년 인근 이나브 평원에서 안티오크 공작 레몽을 전사시킨 누르 앗 딘은 1150년 6월, 아자즈를 점령하며 32년간 이어진 십자군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남은 에데사 백국의 옛 영토도 이듬해 무슬림 왕공들 사이에 분할 점령되었다. 아자즈가 회복되며 알레포는 십자군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하드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십자군 시기 아자즈는 두차례 이슬람 연합군의 포위를 버텨낸 천혜의 요새라는 명성을 쌓았다.

2.2. 십자군 이후[편집]


누르 앗 딘 사후 시리아 석권에 나선 살라흐 앗 딘은 장기 조에 충성하는 알레포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비즈에 이어 1176년 5월 15일, 아자즈를 포위하였다. 비록 도중 아사신의 암살 기도가 있었지만 6월 21일 도시는 점령되었다. 하틴 전투 이후 십자군 세력이 약화되며 아자즈의 군사적 중요성은 줄었지만, 13세기 들어 아이유브 왕조룸 셀주크 간의 경쟁이 심화되자 살라딘의 삼남이자 알레포의 아미르 앗 자히르 가지는 본래 벽돌로 축성되었던 아자즈 성채를 석조로 보수하였다. 1226년 역사가 야쿠트 알 하마위는 아자즈가 큰 도시이고 카프르 라타, 마나그, 야브린, 아르파드, 툽발, 이나브 등의 마을을 거느린 행정 치소라고 기록하였다. 맘루크 왕조에 이어 아자즈는 1516년 인근 다비크에서 벌어진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킬리스 산작에 속하였다. 1차 대전터키-시리아 국경이 그어지자 아자즈는 국경 도시가 되었으나 별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2.3. 시리아 내전[편집]


내전 발발 직후인 2012년 7월에 반군이 점령하였고,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양측 모두 250여명이 전사하였다. 이후 시리아 군은 남쪽의 메나그 공군 기지로부터 수차례 보복성 공습을 가하였다. 2013년 10월, 다에시 (ISIL)가 점령하였다. 다만 다른 점령지로부터 고립되자 2014년 2월 철수하였다. 이후 코바니 공세에 나선 다에시는 2015년 초엽 아자즈에 접근했으나 공격하지 못하고 철수하였고, 2016년 가을 알레포 주에서 완전히 격멸되었다. 다만 2017년 1월 다에시는 아자즈에 폭탄 테러를 가한다. 한편 다에시의 위협이 사라지자 반군 사이의 각축이 일었다.

2015년 10월 기준 아자즈는 알 누스라 전선자유 시리아군이 양분하였는데, 점차 터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쿠르드 로자바 연방이 아프린과 만비즈를 잇는 회랑을 조성할 것을 우려한 터키는 아자즈를 쿠르드 군이 넘지 말아야 할 '레드라인'으로 설정하였다. 그럼에도 쿠르드 군이 알바브와 아자즈를 점령하려 하자 결국 2016년 8월, 터키군은 유프라테스 방패 작전과 함께 개입하여 쿠르드 군을 몰아내고 아자즈 ~ 자라블루스 일대를 점령하였다. 아자즈는 터키군이 직접 점령한 첫 시리아 도시이다. 그리고 2017년 말엽, 아자즈는 터키군의 괴뢰 정권인 시리아 과도 정부의 수도가 되었다.

3.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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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즈 시타델 언덕

3.1. 키로스[편집]


파일:아프린 유적 시리아.jpg

파일:키루스 시리아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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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리아 키루스 2.jpg

파일:시리아 키루스 1.jpg

파일:키루스 시리아 6.jpg
파일:시리아 키루스 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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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리아 키루스 3.jpg
[키로스 기타 사진들]
파일:시리아 키루스 4.jpg

파일:키루스 시리아 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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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리아 아프린 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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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2] 시리아의 더운 여름에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중무장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3] 그중에는 당나귀 3백 마리가 짊어진 금화도 있었고, 테오도코스 성화를 제외한 보물 전부가 약탈되었다고 한다[4] 이후 보두앵은 외부 병력과 함께 장기 왕조에 속한 알레포 대신 툭테긴이 사망한 다마스쿠스 원정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