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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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신라와의 관계
2.2. 멸망 이후
2.3. 고분군
3. 여담


1. 개요[편집]


押督國

원삼국시대 진한(경상도) 지역의 소국들 중 하나.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일대에 위치했다. 압량소국(押梁小國)이라고도 불렸다. 고대 한국어에서는 '노독'이라는 음가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한자로 훈차(노독→押[1], 돌(독)→梁) 및 음차(독→督)한 것이 '압독' 또는 '압량'인 것이다.

2017년 11월 대규모 압독국 왕릉이 발굴되었다. #

2. 역사[편집]



2.1. 신라와의 관계[편집]


경산의 위치를 보면 경주 바로 근처인데, 파사 이사금 재위기인 초기 신라(사로국 = 경주시)가 북쪽의 음즙벌국을 점령할 때 지레 겁을 먹고 따라서 신라에 항복해버렸다. 이 때는 완전한 병합이라기보다는 종속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이후 40여년 뒤인 일성 이사금 13년(146년) 10월에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토벌당했고, 이 때 압독국 주민들도 지금의 경주시 남부 땅으로 강제 이주 당해 압독국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자립할 세력을 잃어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2.2. 멸망 이후[편집]


신라에 의해 압독주가 설치되었으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경주를 지키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 역할을 했다.[2]

이후 경덕왕 때 장산군(獐山郡)이 되었으며, 이 역시 압독/압량의 '압(押)'이 신라어로 '노독'이었던 것을 (노루 장)으로 훈차한 것이다.[3] 이후 장산(章山)으로 바뀌었다가, 1310년 고려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선왕의 이름인 장(璋)과 비슷한 글자인 장(章)을 피휘하기 위해 지금까지 쓰는 경산군(慶山郡)으로 고쳤다.

2.3. 고분군[편집]


영남대학교 정문 가까운 곳에서 고분군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식 명칭은 경산 임당 고분군으로 사적 통합 이전에는 임당동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 부적리 고분군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또 임당 토성을 비롯하여 많은 생활유적이 확인된 취락 유적이기도 하다.

위의 역사적 내용처럼 원삼국시대에 존재하였던 압독국이라는 소국의 양상과 신라에 사실상 종속되어 신라의 9시 멀티였던 시절, 김유신의 군사적 근거지였던 시절의 양상 등이 고분군과 그 인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적에서는 금동관 등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3. 여담[편집]


공무원 시험 최초로 역대급 난이도라 불리는 2019년 계리직 시험의 지엽적인 지문중 하나로 출제 되었다.

[1] 현대 국어의 '누르다'는 르 불규칙 활용 용언이며 중세 국어 시기에도 후두 유성마찰음 [ɦ\]을 나타내기 위해 ㅇ이 분철 표기되는 어휘였는데, 이러한 용언들은 본래 ㄱ 말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대 한국어에서 중세 한국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어중 및 어말의 ㄷ 음가가 ㄹ로 대거 약화된 것을 생각한다면 '독(督)'은 '누르다'의 고어형 '누독다' 또는 '노독다'의 둘째 음절을 첨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훈차자 뒤에 마지막 음절 또는 음소의 음차자가 뒤따르는 훈주음종 표기는 신라 후기의 향가에서도 등장하는 방식이다.[2] 압독주의 군사 사령관이 압독군주(軍主)이며 유명한 압독 군주로는 김유신이 있다.[3] 노루라는 단어 또한 앞서 언급한 '누르다'와 마찬가지로 모음 앞에서 ㅇ이 분철 표기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방언형으로 '놀구', '놀기', '놀갱이' 등이 남아있기에 본래 어형은 '노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이미 상당수의 ㄷ 음가가 ㄹ로 변화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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