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안 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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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Careme.jpg

1. 개요
2. 생애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마리앙투안 카렘
Marie-Antoine Carême
(1784년 6월 8일 ~ 1833년 1월 12일)

프랑스요리사. 19세기에 '요리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프랑스 요리의 형식을 완성한 인물이다. 또한, 카렘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각국 최고 권력자들의 요리를 담당함으로써 유럽 내에서의 음식 문화 교류의 선구자가 되었다.

오늘날 사용되는 요리사 모자의 형태도 카렘이 고안해낸 것이다. 그리고 반죽이나 생크림 등을 담아 금속처리된 구멍으로 짜내는 짤주머니와 깍지도 그가 고안했다.

2. 생애[편집]


1784년 파리 센 강의 음습한 빈민가, 그곳의 허름한 목재 저장소 오두막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존경심을 지니고 있어[1] 16번째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마리 앙투안 카렘이라고 지었다. 하필이면 16번째

1792년 가을, 매일 단두대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려나가던 공포의 프랑스 혁명기의 어느 날,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밖으로 나와 버려지고 말았다. 겨우 10살의 나이에 아이는 광적으로 흥분하는 군중 속에 버려진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말했다.

“가거라, 얘야! 신께서 네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이렇게 버려진 앙투안 카렘은 먹고살길을 찾다가 허름한 식당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일하게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요식업에 종사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을 쌓았고, 1798년도에 이직하는 과정에서 제빵 기술을 배워 17세에 일급 요리사가 되었고 1803년도에 자신의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카렘의 식당이 맛집으로 유명해지게 되면서 1804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궁중 요리사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음식에 큰 돈을 들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외교관계에 있어서 음식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지했고, 이후 외교관 탈레랑의 전속 요리사가 되어 유럽 전역의 왕족, 상류층들이 찾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아 응용한 예술적인 모양의 디저트들로 명성을 얻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고된 뒤에도 그 명성은 여전해서 외국 명사들을 상대로 요리를 해주었고, 1824년부터 1829년까지 로스차일드가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다. 이후 젊은 시절부터 연탄가스를 흡인한 결과로 호홉기 질환에 시달리다가 48세로 파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카렘은 궁중요리뿐만 아니라 당시까지만 해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요리법들을 수집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고, 각종 제빵술, 과자만드는 법등도 적극적으로 수집, 정형화된 요리법을 남기면서 오늘날까지 프랑스 요리사들에게 중요한 참고자료를 남기게 되었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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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의 프랑스 혁명을 어처구니없어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별장에서 농사일을 짓는 것을 즐기는 등 나름대로 소박한 면이 있던 인물이었으니, 진상을 알았다면 존경할 만도 하다. 다만 문제점이라면 마리 앙투아네트나 루이 16세나 당대 프랑스의 위기를 극복할만한 정치, 행정적인 능력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고, 이것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