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기와 가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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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기와 가쓰사부로
山極 勝三郎


파일:Yamagiwa Katsusaburo.jpg

이름
야마기와 가쓰사부로 (山極 勝三郎)
출생
1863년 4월 10일
사망
1930년 3월 2일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직업
병리학자, 생리학자
학력
도쿄대학 예비문
도쿄대학(제국대학)[1] 의학부 (학사)
문부성 의학박사

1. 개요
2. 생애
3. 업적
4. 노벨상 탈락
4.1. 논란
4.1.1. 기생충설에 대한 반증
4.1.2. 야마기와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이유
5. 매체에서




1. 개요[편집]


山極 勝三郎, 1863.04.10 - 1930.03.02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는 일본의 병리학자이다.


2. 생애[편집]


에도 시대 때인 1863년 시나노노쿠니의 우에다 번(현 나가노 현 우에다시)에서 야마모토 마사츠네(山本 政策)의 3남으로 태어났으나, 후에 같은 고향의 의사 야마기와 요시야(山極 吉哉)의 딸인 카네코의 사위 양자로서 들어가게 됐고, 의사인 양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의사의 꿈을 기르게 된다.

1885년 도쿄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1891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 조교수로, 1895년에는 교수로 취임한다.

1930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3. 업적[편집]


야마기와가 살던 시기에는 의 발병 원인이나 기전에 대해서는 해명된 바가 없었다. 암의 발병 원인 가설로는 당시에는 '자극설', '소인설(素因説)' 등이 거론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야마기와는 암 발생의 원인에 대해 연구를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러던 중 야마기와는 굴뚝 청소부들에게서 유독 피부암 환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암 발생 원인으로 '자극설'을 채택한 뒤 특별연구생이었던 이치카와 고이치(市川 厚一, 1888-1948)와 함께 토끼 귀에 콜타르를 꾸준히 바르는 화학적 자극을 가하여 인공적으로 암 발생을 유도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3년 뒤 1915년에 그의 예측대로 토끼의 귀에서 암 조직이 실제로 발생한 것을 확인하여 자극설을 입증해내기에 이르렀고, 이 내용을 논문으로 작성하여 세계 암 학계의 관심을 이끌게 된다.

현대 암 연구에서는 야마기와의 방법이 암의 인공적 유도법의 기반이 되었을 정도로 각광을 받고 있는 연구 성과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훌륭한 공적이다. 그러나 하술할 안타까운 노벨상 탈락 사건으로 인해 그의 연구는 그가 살아 있을 당시 주류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됐다.


4. 노벨상 탈락[편집]


덴마크의 병리학자 요하네스 피비게르(Johannes Fibiger)는 "암은 기생충에 의해 발생한다"는 별개의 이론을 내세웠고, 그 근거로 기생충에 감염된 바퀴벌레를 섭취한 쥐의 에서 암이 발생한 자신의 관찰 기록을 내세웠다.

1926년 노벨심사위는 노벨생리의학상에서 발암 원인에 대한 건으로 심사를 진행 중이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두 후보군이 서로 대립했는데, 야마기와&이치카와와 피비게르였다. 피비게르의 기생충설을 지지하는 심사위원들이 대다수였으나, 야마기와측의 자극설을 지지하는 쪽도 소수지만 있었다. 피비게르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분위기가 기울어지자 야마기와 지지자들은 피비게르의 이론이 검증된 바가 없다며 반대 의견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피비게르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1926년 노벨생리의학상은 결국 야마기와와 이치카와는 탈락하고 피비게르가 타게 됐다. 그후로 야마기와와 이치카와가 노벨상 후보로 다시 내세워지는 일은 없었다.


4.1. 논란[편집]



4.1.1. 기생충설에 대한 반증[편집]


그러나 피비게르의 기생충설은 현재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

피비게르의 이론은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으며, F. D. Bullock, G. L. Rohdenburg 등과 같은 병리학자들이 그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피비게르가 발견한 병변은 그저 상피세포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비암성 종양(non-cancerous tumour)의 일종이라는 것. 그러나 피비게르 본인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고, 이들의 비판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묻혔다.

그러나 피비게르 사후에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연구 결과에 대한 반증 시도가 이루어졌다. 1935년 피비게르가 관찰한 표본에서 나타난 편평상피 세포인 S. carcinoma가 쥐에게서 암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Richard Douglas Passey, A. Léese, J. C. Knox 등에 의해 발표되면서 피비게르의 연구 결과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W. Cramer 등은 피비게르가 관찰한 표본이 비암성 종양이라고 검증해내기에 이른다.

결국 비타민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인 1952년에는 피비게르의 연구 결과는 확실하게 틀렸다고 판명나기에 이른다. 미국의 Claude R. Hitchcock과 E. T. Bell은 피비게르가 주장하는 기생충-암 기원설은 비타민A 결핍증에 걸린 쥐에게 기생충이 감염됐을 때 만성 염증이 발생하는 것일 뿐이라며 그 발병 기전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했고, 그렇게 피비게르의 노벨상 수상은 노벨위원회의 흑역사가 되었다.


4.1.2. 야마기와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이유[편집]


결론적으로 피비게르의 기생충설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판명났고, 이에 따라 1926년의 노벨생리의학상 수상 건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어났다. 검증되지도 않은 이론에 상을 줘서 결국 틀린 것으로 판명난 점은 고사하고, 야마기와의 연구 결과가 상을 받지 못한 건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노벨 위원회원이었던 폴케 헨셴(Folke Henschen)이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그는 1966년 도쿄에서 열린 국제암회의 때 참석하여 “야마기와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일본 국민에게 전적으로 죄송하다”는 심경을 밝히면서 그렇게 된 데에는 “동양인에게는 노벨상이 아직 이르다”는 발언이 오가는 등 당시 노벨위원회원들의 인종차별적인 인식이 작용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증언하여[2] 일본 내에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노벨위원회의 일본인 차별설에 관한 실체가 내부 고발로 마침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벨위원회의 일본인(또는 동양인) 차별설은 1940년대 말까지 일본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떠돌던 주제였다. 실제로 구레 겐, 나가오카 한타로[3], 기타사토 시바사부로[4], 하타 사하치로[5], 데라다 도라히코[6] 등과 같이 세계적인 업적을 남긴 일본인 과학자들이 유력 수상 후보에 오르고도 떨어진 사례는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러한 소리가 나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 때문에 야마기와는 노벨위원회의 인종/민족차별 관행의 희생양 중 한 명으로써 거론되기도 하며, 안타깝게 노벨상 수상을 놓친 일본인 과학자의 예시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증언만으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의 연구 성과가 현대 암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연구가 바탕이 되어 다른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들이 많이 나왔다는 점으로 봤을 때, 그의 업적은 노벨상을 충분히 받고도 남았으리라고 사료되고 있다. 만약 1926년에 그가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더라면,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됐을 것이고, 한국과는 노벨상 최초 수상 년도로 74년이나 격차가 더 벌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5. 매체에서[편집]


2016년 일본 영화 『토끼를 쫓아〜야마기와 가쓰사부로의 이야기 (うさぎ追いし―山極勝三郎物語―)』에서 그의 67년 간의 생애를 그렸다. 어릴 때 양자로 들어간 일화부터 임공 암 유도 실험을 성공해내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일까지도 다루고 있다. Filmarks 기준으로 평점도 4.0 대로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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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학 당시에는 제국대학으로 개편되지 않았으며, 입학하고 1년 후에 제국대학으로 편성되었다.[2] 朝日新聞社編 『100人の20世紀(上)』 朝日文庫 p237-「山極勝三郎」[3] 러더퍼드에 앞서 먼저 원자핵 가설을 주창했으나 러더퍼드에게만 수상되었다.[4] 파상풍, 디프테리아 등의 질병의 치료법 개발[5] 살바르산 606호 개발. 같이 개발한 파울 에를리히만 상을 받고 하타는 받지 못했다.[6] X선을 이용한 결정 구조 규명. 동일한 연구 성과를 놓고 1915년 영국의 브레그 부자는 노벨상을 받았는데 데라다는 못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