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크사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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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329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야크사르 강(현재 시르다리야 강)에서 사카족을 대파한 전투. 전투 장소는 지금의 타슈켄트 서남쪽과 후잔트 동북쪽 사이였다.


2. 상세[편집]


기원전 329년, 알렉산드로스 3세다리우스 3세를 살해하고 샤한샤를 자칭한 베소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잡기 위해 히르카니아, 마드리아, 아리아, 박트리아를 종횡했다. 베소스가 옥수스 강(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도주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를 평정한 뒤 옥수스 강을 건너려 했지만 베소스가 땟목을 만들 나무를 모조리 태워버려서 배를 만들 수 없었다. 이에 가죽에 짚을 채운 배를 제작하여 강을 건너 베소스를 계속 추격했다. 결국 베소스의 부하 스피타메네스와 다타페르네스가 베소스를 잡아서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겼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살해한 이유를 추궁하자, 베소스는 "나는 공모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며, 당신에게 호의를 얻고 싶어서 그랬다."라고 변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에 분노해 베수스를 가차없이 채찍질하고 박트리아에 보냈다.

얼마 후, 타나이스 강 유역에서 식량을 구하러 갔던 병사들이 그 지역 유목 부족에게 습격당해 처참하게 죽은 사건이 벌어지자,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하여 가장 기동성이 뛰어난 병사들을 이끌고 사방이 절벽으로 이뤄진 가파른 산속의 진지로 숨어든 그들을 공격했다. 적이 투척 무기를 퍼부으면서 많은 병사가 다쳤고, 알렉산드로스도 다리에 화살을 맞아 종아리뼈가 부러졌지만, 그는 끝까지 밀어붙여 진지를 점령해 수많은 이를 죽였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부족민 3만 명 중 살아서 도망친 이는 8,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타나이스 강 유역에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라는 뜻의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현재 후잔트)를 건설하여 스키타이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거점으로 삼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행보에 위협을 느낀 타나이스 강 유역의 부족들은 자기 도시에 주둔한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살해하며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베수스를 붙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줬던 스피타메네스가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라고 선동하자, 소그디아나인 대부분과 일부 박트리아인까지 마케도니아군에 저항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반란을 진압하기로 하고, 소그드인들이 피신한 7개 도시를 잇따라 공략했다. 그 중 가장 큰 도시인 키로폴리스를 공격하던 중(키로폴리스 공방전) 머리와 목에 돌을 맞기도 했으나, 반란 평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얼마 후, 스키타이의 일족인 사카족이 야크샤르 강변에 이르렀다. 그들은 소그드인과 동맹을 맺고 알렉산드로스와 적대하기로 했다. 한편 마라칸다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스피타메네스에게 봉쇄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안드로마쿠스, 메네데무스, 카라누스에게 헤타이로이 60명, 카라누스의 용병 기병 800명, 용병 보병 1500명을 맡겨 마라칸다 요새로 파견했다. 이후 20일간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건설할 부지의 방비를 강화하고, 그리스 용병들과 주변 부족들, 그리고 현역 복무가 어려운 마케도니아 병사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한편 사카족은 아크샤르 강변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물 속으로 화살을 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면서 알렉산드로스를 모욕했다. 그러면서 만약 그가 공격한다면, 우리가 아시아의 야만족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무찌르기로 마음먹고, 강을 건너기 위한 가죽 도구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출발 전에 올리는 제사에서 좋지 않은 징조가 나타나자,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공격 계획을 취소했다. 이후 사카족의 도발이 계속되자 다시 제사를 올렸는데, 예언자 아리스탄데르는 이번에도 위험한 징조가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답했다.

"나는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 다리우스가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런데 고작 스키타이 무리의 웃음거리가 되란 말이냐? 차라리 최악의 위험에 맞서겠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아리스탄데르는 다른 말을 듣고 싶어하는 알렉산드로스 앞에서 신의 예언을 왜곡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아리스탄데르는 예언을 바꾸어 징조가 그 어느 때보다 좋다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출정을 감행하기로 한 알렉산드로스는 강을 건널 때 사용할 가죽을 수레에 실은 채 6천 장병을 이끌고 출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강 건너편에 주둔한 샤카족의 수가 15,000명 정도인걸 확인한 뒤, 적을 향해 투석기로 무기를 발사하게 했다. 투석기의 공격으로 여러 적병이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 샤카족은 투석기의 위력에 놀라 강에서 조금 떨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적이 당황한 걸 확인하고 나팔을 울리도록 한뒤, 앞장서서 강을 건너면서 부하들에게 뒤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먼저 도착한 궁병과 투석병들에게는 기병대가 강을 건널 때까지 활과 돌을 계속 퍼부어서 적이 보병 본대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모든 병사가 건너편 강둑에 집결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용병 기병 연대와 4개의 창기병 대대에게 적을 향해 공격하도록 했다. 사카족은 수적으로 열세한 기병대가 자신들을 향해 돌격해오자, 그들을 포위해서 섬멸한 뒤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이 아군 기병대를 포위하느라 바쁜 틈을 타 예비 기병대, 궁수들, 아그리아니아군, 발라르쿠스가 지휘하는 나머지 경보병들로 구성된 혼성부대에게 진군을 명령했다. 이윽고 공격 가능 거리에 이르자,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본인은 예비 기병대의 선두에서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사카족은 소수의 적 기병대를 포위 섬멸하려 했다가 느닷없이 적 예비 기병대와 경보병대의 공격을 받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패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1,000명을 사살하고 15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 1,800여 마리를 포획했다. 그러나 폭염 속에서 전력을 다해 추격하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기진맥진했고,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알렉산드로스도 물 웅덩이가 나타날 때면 물을 마셨는데, 물이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사병에 걸렸다. 상태가 심각해 운신조차 어려울 지경에 처해 막사에 옮겨져서 온종일 누워 있어야 했다.

전투 후 사카족 왕이 사절을 보내 "지난 전투는 도적 떼의 우발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었을 뿐 우리의 공식적인 결정이 아니었다."라며 앞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밝혔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기가 설사병에 걸려버리고 장병들이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원정을 계속하긴 어려웠기에 해명을 받아들이고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안드로마쿠스, 메네데무스, 카라누스가 이끄는 보병 2,000명과 기병 300명이 마라칸다 요새를 구한 뒤 스피타메네스를 추격했다가 스키타이 기병 600명의 지원을 받은 스피타메네스의 매복 공격으로 전멸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헤타리오리의 절반, 근위대 전체, 아그리아니아군, 궁수, 그리고 보병대 중 가장 민첩한 병사들을 이끌고 마라칸다 요새를 다시 포위한 스피타메네스에게 달려갔다.

알렉산드로스가 달려오자, 스피타메네스는 즉시 요새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피타메네스에게 죽은 장병들의 유해를 매장한 뒤 적을 추격했으나 끝내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 마라칸다 요새에 피신해 있던 많은 주민이 마케도니아군 공격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고 격노해 마라칸다 요새를 포함한 폴리티메투스 강(지금의 자라프샨 강)이 흐르는 지역 전체를 초토화시키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 후 박트리아로 돌아가서 베소스의 코와 귀를 자른 뒤 엑바타나로 데리고 가서 동포인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 앞에서 공개 처형하게 했다. 이후 기원전 329/328년 겨울을 박트리아에서 보냈다.[1]

기원전 328년, 스피타메네스에 호응한 박트리아 주민들을 토벌한 뒤 다시 소그다니아로 진군하여 스피타메네스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스피타메네스는 유격전을 전개해 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분전했으나, 알렉산드로스가 자기들의 영역까지 쳐들어오는 것에 압박감을 느낀 마사케타이 족에 의해 피살되어 수급이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내졌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소그디아나의 저항군이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바위 산으로 진군해 소그디안 바위 요새 공방전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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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기에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했던 클레이토스 장군이 연회 석상에서 페르시아의 관습을 따라하는 것에 비난하자 만취한 알렉산드로스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 종군 역사가 칼리스테네스가 시종들의 알렉산드로스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