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시이 협곡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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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331년 12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협곡을 지나가려면 통행료를 내라고 요구한 욱시이 족을 토벌한 전투.


2. 상세[편집]


기원전 331년 10월 1일, 알렉산드로스 3세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샤한샤 다리우스 3세의 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적군이 바빌론에서 방어전을 준비하는 걸 우려했다. 바빌론의 성벽은 넓은 농경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켰기에, 포위되더라도 오랜 세월 버틸 수 있었다. 따라서 적이 농성을 준비하기 전에 서둘러 진군하기로 하고, 아르벨라에서 바빌론으로 진격했다.

바빌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사제, 행정관들과 시민들이 알렉산드로스에게 몰려와 온갖 선물을 바치면서 성채와 보물뿐만 아니라 도시를 넘기겠다고 했다. 이에 바빌론에 입성한 그는 시민들에게 크세르크세스 1세가 파괴했던 사원들, 특히 바빌로니아인들이 가장 경외하는 벨의 신전을 복구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가우가멜라 전투 때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다리우스 3세가 도주한 뒤 항복한 마자에우스를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하고 암피폴리스의 아폴로도루스에게 주둔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 사르디스의 내부 요새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쳤던 미트리네스는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수사로 진군해 20일 만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입성했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제물을 바치고 운동경기와 횃불 계주를 벌인 뒤, 아불리테스라는 페르시아인이 총독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하고, 헤타이로이 소속인 마자루스를 도시 수비대 지휘관으로 앉혔다. 또한 메네스를 시리아, 페니키아, 킬리키아의 총독으로 임명해 해안 지역으로 파견하면서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에게 은 3,000달란트를 보내게 했다.

이렇듯 바빌론과 수사를 접수하고 메소포타미아의 행정 체계를 개편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향해 진군했다. 파시티그리스 강을 건너 욱시이족의 영토로 들어가자, 평지에 거주하면서 페르시아 총독에게 충성했던 부족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곧바로 귀순했다. 그러나 산간지대의 부족들은 복종을 거부했다. 그들은 지난날 아케메네스 왕조 역대 샤한샤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자유를 누렸으며, 샤한샤가 그들의 땅을 지날 때마다 통행료를 받아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그들을 토벌하고자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했지만, 산세가 험준하고 길이 매우 비좁았고, 지리에 익숙한 욱시이 족의 맹렬한 반격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역시 페르시아로 가는 협곡을 통과하려면 통행료를 내야 한다고 여겼다.

알렉산드로스는 전령을 보내 요구를 들어줄 테니 협곡 길목에서 만나자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는 개인 경호대와 근위대 및 약 8,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부대와 수사에서 온 안내원들을 거느리고 어둠을 틈타 욱시이족의 영역으로 출발했다. 험준한 산길로 하루 만에 욱시이 산간마을에 도착한 그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그들을 제압하고 약탈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산으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욱시이인들이 통행료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협곡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크라테루스를 미리 보내 욱시이 병사들이 달아날 만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도록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욱시이군보다 먼저 고개를 차지한 뒤 전투 대형을 이루어 공격했다. 욱시이족은 마케도니아군의 기민한 공격에 번번이 밀리다가 가장 유리한 고지마저 빼앗기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일부는 도주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은 높은 산으로 피신했다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크라테루스의 공격으로 궤멸되었다. 생존자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해마다 공물을 바칠 테니 자신들의 영토를 소유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아리아노스가 인용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기록에 따르면, 다리우스 3세의 모친이 나서서 욱시이인들을 고향에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받아들였고, 욱시이인들은 매년 말 100마리, 노새 500마리, 양 3만 마리를 공물로 바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욱시이족을 굴복시킨 뒤,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에게 수사에서 페르세폴리스로 이어지는 왕의 길을 따라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자그로스 산맥을 통과하는 길로 진군해 마룬 강을 건너 야수즈의 북쪽 평원에 도착했다. 이후 마케도니아군은 야수즈 북동쪽에 있는 페르시아 관문(오늘날 탕어 메이란(Tang-e Meyran))을 통과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페르시아 샤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의 기습 공격을 받으면서, 페르시아 관문 전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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