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카르나소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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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이후



1. 개요[편집]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과 로도스의 멤논이 이끄는 아케메네스군이 할리카르나소스 시를 놓고 맞붙은 공방전.


2. 배경[편집]


기원전 334년 5월, 알렉산드로스 3세아케메네스 왕조의 소아시아 사트라프들을 상대로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몇 주 동안 다시켈리온, 사르디스, 에페소스를 별다른 전투 없이 공략했다. 밀레투스로 진군했을 때 수비대가 강력한 아케메네스 함대의 도움에 의존하여 저항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밀레투스 공방전에서 가볍게 제압했고 400척의 아케메네스 함대 역시 별다른 힘을 못 쓰고 퇴각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유지비가 너무 비싼 함대를 해산시키고, 단지 20척의 아테네 함대만 남겨 해안에서 전쟁 물자를 운송하게 했다. 그 대신, 그는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해 적 함대를 무력화시키기로 했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대표적인 소아시아 항구 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였다. 이곳에는 향토병과 용병으로 구성된 상당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총사령관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용병대장인 로도스의 멤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도시로 진군하면서 중간에 거친 모든 도시를 저항 없이 접수했다. 하지만 도시에 도착한 뒤,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도시에서 800미터 이상 떨어진 지점에 진을 쳤다.

당시 멤논은 다리우스 3세로부터 남부 아시아를 통할하고 함대 전체를 지휘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도시에는 아케메네스 병사들과 용병으로 이뤄진 강력한 군대가 지키고 있었고, 항구에는 군함들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여차하면 해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공략하긴 어려웠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공성전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소아시아 원정에서 가장 힘겨운 전투였던 할리카르나소스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전개[편집]


공성 첫째 날, 알렉산드로스는 밀라사를 마주보는 요새 쪽으로 움직였다. 적군이 성문 쪽으로 다가가자, 수비대가 원거리 무기를 투척했다. 알렉산드로스군이 이를 막아내며 반격하자, 수비대는 성벽 안으로 철수했다. 며칠 뒤 알렉산드로스는 수비대와 헤타이로이, 그리고 아민타스, 페르디카스, 멜레아그로스가 지휘하는 아그리아니아인들과 궁수부대, 보병대대로 구성된 공격대를 편성하여 민두스를 마주한 요새 쪽으로 진군했다.[1] 당면 목표는 그 구역의 수비 상태를 정찰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면 그곳을 기습 점령해 할리카르나소스를 압박할 생각이었다. 또한 민두스 사람들로부터 어둠을 틈타 성문을 열어주겠다는 제안도 있었기에, 자정 무렵에 어둠을 틈타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민두스 쪽에서는 투항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상황이 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성문이 열릴 거라 기대해 포위 공격에 필요한 공성 망치나 공성 무기도 없었고, 사다리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보병들로 하여금 성벽 밑에 참호를 파서 무너뜨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병들은 보루 하나를 무너뜨렸지만 성벽의 수비는 뚫리지 않았다. 민두스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 도착한 할리카르나소스 증원군의 힘을 빌려 적의 기습을 저지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공격을 포기하고 본진에 돌아온 뒤 다시 할리카르나소스 포위 공격으로 관심을 돌렸다.

알렉산드로스는 도시 바깥에 파놓은 너비 14m, 깊이 7m가량의 참호를 메우고 공성 무기들을 적절한 곳에 배치했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자, 수비대가 몰래 잠입하여 충차를 포함한 공성 무기에 불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보초를 서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발각되었고, 싸우는 소리에 깨어난 다른 병사들의 협공으로 수비대는 성벽 안으로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수비대는 170명의 병사를 잃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아라바에우스의 아들이자 아민타스의 형제였던 네오프톨레모스가 다리우스 3세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반면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네오프톨레모스는 마케도니아 편에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측은 16명의 사망자와 3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가 비교적 많았던 이유는 방어하기 어려운 야간 기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페르디카스 대대에 소속된 마케도니아 보병 2명이 막사에서 술을 마시면서 무용담을 늘어놨다. 그러다 두 병사는 누가 더 용맹한지 증명하자며 밀라사를 마주보는 고지의 성벽으로 돌격했다. 이 기막한 광경을 본 수비대는 즉시 돌격했다. 두 마케도니아 병사는 가까이 접근한 적병들을 죽이고 멀리 있는 적을 향해 투척무기를 던지며 맹렬히 저항했다. 뒤늦게 동료가 위험에 빠진 걸 알게 된 페르디카스 부대의 병사들이 달려들었고, 수비대 역시 증원 부대를 보냈다.

이후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적을 성 안으로 내쫓았다. 당시엔 성벽 방어가 철저하지 않았고 두 개의 탑이 벽과 함께 무너져 있어서 전면적으로 공격했다면 쉽게 도시 안으로 진격할 수 있었지만, 마케도니아군이 손을 쓰기도 전에 멤논이 초승달 모양으로 벽돌을 쌓아 성벽의 틈을 메워버려서 실패로 돌아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장병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휴전을 요청했다. 부관들은 요청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제안했지만, 멤논은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인덕을 과시하고 아케메네스군의 비정함을 폭로하려고 이런 제안을 한 것임을 직감하고, 휴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이튿날, 알렉산드로스가 새로 쌓은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공성 무기들을 대동하여 공격하자, 도시 쪽에서는 바로 반격을 가했다. 이 출격을 이끈 인물은 그리스 용병 사령관 에피알테스였는데, 그는 테베에서 반란을 이끌었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진압된 뒤 아테네로 피신했다가 알렉산드로스의 요구를 받아들인 아테네에 의해 추방되어 아케메네스 왕조에 망명했다. 그는 1,000명의 호플리테스를 이끌고 정면에서 공격했고, 또다른 첫 명의 병사가 횃불을 들고 뒤따라 가서 공성 장비에 불을 붙이게 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한 차폐막의 일부와 목조탑 중 하나가 불태워졌지만, 나머지 공성 무기들은 필로타스와 헬라니코스의 병사들이 지켜냈다. 알렉산드로스가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달려오자, 공격대는 횃불을 떨어뜨리고 도시 안으로 도주했다.

며칠 뒤, 알렉산드로스는 도시 안쪽에서 새로 축조한 벽을 향해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는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공격을 이끌었다. 그러나 멤논은 예상외로 총력전에 나섰다. 수비대 1개 부대는 알렉산드로스가 위치한 무너진 벽 쪽에서 출격했고, 다른 부대는 마케도니아군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지점인 삼중문 쪽에서 불 붙인 나무를 공성 무기 쪽으로 던지거나 그 밖의 불에 잘 타는 것들을 함께 던져 불길이 번지도록 했다. 에피알테스가 이끄는 호플리테스는 적을 강하게 압박하여 한때는 마케도니아군 전열을 거의 무너뜨렸고, 멤논은 새로운 지원군을 투입해 그를 도왔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이 상황을 어찌 대처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한동안 고뇌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령으로 전투에서 면제된 참전용사들이 진영에서 뛰쳐나와 응전하면서 전열이 겨우 유지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정신을 가다듬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강하게 반격했다. 공성탑 위에 올려놓은 투석기로 무거운 돌을 쉴 새 없이 날리는 동시에 창을 연달아 던져서 수비대를 어렵지 않게 방어벽 안으로 후퇴시켰다. 많은 수비대가 패퇴하면서 적과 육탄전을 벌이다 죽거나 성벽의 부서진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한편, 삼중 문에서 진격했던 수비대는 마케도니아의 근위대장 프톨레마이오스[2]가 이끄는 아다에우스와 티만데르의 부대,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경보병대와 맞닥뜨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병사들은 수비대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물리쳤고, 수비대는 후퇴하는 과정에서 심한 타격을 입었다. 병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자 위에 놓인 좁은 다리를 통과할 때 과도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리가 무너진 것이다. 수많은 병사가 해자로 떨어져 죽거나 동료들에게 밟혀 죽거나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위에서 던진 무기에 맞아 죽었다. 또한 성문 쪽으로 달아났던 장병들은 성내 아군이 성문을 너무 빨리 닫아버리는 바람에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살육되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할리카르나소스는 약 1,000명의 병사를 잃었고, 마케도니아 측은 근위대장 프톨레마이오스, 궁수부대를 지휘하던 클레아르코스, 천부장 아다에우스를 포함하여 유명한 마케도니아 장교 40명을 잃었다고 한다. 일반 병사가 얼마나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사망자로 기록된 이들의 면면을 봤을 때 막대한 희생을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가 끝난 뒤, 알렉산드로스는 할리카르나소스 시민들에게 협상 기회를 주기 위해 공격을 중단했다. 수비대 지휘관 멤논은 아케메네스 장군 오론토바테스와 함께 앞으로 어찌할 지 논의했다. 일부 성벽은 이미 무너졌고, 다른 부분도 훼손이 상당했으며, 많은 병사가 죽거나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어서 더 이상 항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공격 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세웠던 목조탑과 무기고에 불을 질렀다. 탑과 무기고의 불길이 바람을 타고 다른 건물들로 번지는 동안, 그들은 성벽 근처의 가옥들에도 불을 지른 뒤 잔여 병력을 이끌고 아르코네스 섬의 요새와 살마키스 고지로 후퇴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에게 달려와 투항한 시민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듣고 병사들을 출동시켜 건물에 불을 지르는 자들을 죽이고 집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라고 명령했다. 날이 밝은 후 적군이 살마키스와 아르코네스 요새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는 두 요새를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많이 허비될 뿐더러 도시 자체를 수중에 넣은 마당에 그 요새들을 얻어봤자 별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야밤에 벌어진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묻어주고 공성 무기를 담당하는 병사들에게 기구들을 트랄레스로 옮기라고 지시한 뒤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고 이곳과 카리아의 나머지 지역을 지킬 3,000명의 보병과 약 200명의 기병을 프톨레마이오스의 지휘 아래 남겨두고 프리기아로 이동하기로 했다.


4. 이후[편집]


알렉산드로스는 프리기아로 가기 전 헤카톰노스의 딸 아다카리아사트라프로 임명했다. 아다는 이드리에우스의 누이이자 아내로, 이드리에우스는 죽기 전 아다에게 권좌를 물려줬다. 훗날 픽소다로스가 아다를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했고, 픽소다로스가 죽은 뒤에는 사위 오론토바테스가 권좌를 차지했다. 아다는 카리아에서 가장 방어가 튼튼한 곳으로 알려진 알린다 지역에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카리아를 공략할 때 도시를 그대로 넘겨줬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를 양자로 삼았고, 알렉산드로스가 할리카르나소스를 제패한 뒤에 카리아 전 지역의 통치권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에서 동방으로 출정하기 직전에 결혼한 병사들이 아내와 함께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카리아에서 귀향 조치했다. 그들을 인솔할 인물로는 근위대 장교인 셀레우코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고윕급 장교인 폴레모크라테스의 아들 코이노스와 네오프톨레모스의 아들 멜레아그로스를 선정했는데, 코이노스와 멜레아그로스가 신혼이라서 귀향자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런 한편 장교들에게는 병사들을 데리고 군대에 복귀할 때 가능한 한 많은 기병과 보병을 모집해 오도록 했다.

이후 폴레모크라테스의 아들 클레안데르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서 병사들을 징집했고, 파르메니온은 헤타이로이 기병 연대, 테살리아 기병대, 그외의 동맹군 파견대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사르디스로 향한 뒤 프리기아로 진군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리키아부터 팜필리아까지 해안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적 함대의 운신 폭을 좁혔다. 이후 소아시아 해안 지역의 남은 도시들을 돌며 항복을 받아낸 뒤, 겨울 동안 푹 쉰 후 기원전 333년 시리아로 진군했다. 이에 아케메네스 샤한샤 다리우스 3세가 요격하려 하면서 이소스 전투가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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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두스는 할리카르나소스가 위치한 반도의 서쪽 끝에 있었다.[2]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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