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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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편집]


楊安兒
(? ~ 1214년 12월[1])

홍오군의 수령이자 창시자로, 산동(山東) 익도(益都) 사람이다. 떠도는 백성들을 휘하에 결집시켜서 금나라에 반기를 들었지만 토벌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2. 생애[편집]


양안아의 원래 이름은 양안국(楊安國)이었지만, 그는 어렸을때 시장에서 안장의 재료를 팔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양안아(楊鞍兒)'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양안국은 이에 착안하여 자신의 이름을 양안(安)아로 개명하였다.

금나라 태화(泰和) 연간[2]남송이 금나라를 침범해와서 나라가 혼란해지자 산동의 무뢰한들은 자주 모여서 고을의 재물을 약탈하는 짓을 벌였다. 이에 금나라 조정에서는 산동의 주현(州縣)들에 명령을 내려 무뢰배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당시에 양안아는 무뢰한들을 이끄는 두목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체포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투항하였다.

양안아는 투항한 뒤 징집되어 금군에 예속되었는데, 여러차례 승진하여 방어사(防禦使)에까지 올랐다. 몽골군이 금나라를 공격해오자 양안아는 도통(都統) 당괄합타(唐括合打)의 부장(副將)이 되어 수비병을 이끌고 금나라의 국경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러나 양안아는 계명산(鷄鳴山)[3]에 도착하자 행군을 멈추었으며, 그는 부대를 버리고 도망쳐나와서 자신의 고향인 산동으로 돌아갔다.

산동에 온 양안아는 장여집(張汝楫)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모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양안아가 마침내 익도에서 거병하니 이때가 1211년 11월이었다. 양안아는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지자 피아식별을 위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붉은 웃옷(紅襖)을 입게 하고 그 웃옷을 표식으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양안아의 무리들을 홍오군(紅襖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양안아는 거주(莒州)[4], 밀주(密州)[5] 등 산동의 주현들을 공격하고 관리들의 목숨을 빼앗으니 산동의 사람들이 양안아를 매우 두려워하였고, 양안아가 반기를 들자 다른 도적들도 그를 따라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1214년, 금나라의 장수 복산안정(僕散安貞)은 양안아의 본거지인 익도로 진격하였는데, 그는 양안아를 익도성의 동쪽에서 패배시켰다. 양안아는 이에 등주(登州)[6]로 달아났는데, 금나라의 등주자사(登州刺史) 경격(耿格)은 양안아의 무리가 많은 것을 보고는 성문을 열고 그에게 항복해버렸다. 내주(萊州)[7]의 수장(守將) 서여현(徐汝賢) 또한 성문을 열고 양안아의 부하 추도통(鄒都統)[8]을 맞이하니 양안아는 내주로 가서 황제를 참칭하였다.
황제를 칭한 양안아는 황제의 격식에 맞게 연호를 임의로 고쳐서 천순(天順)으로 하였다. 또한 그는 자체적으로 관속(官屬)을 설치하여 전휘(展徽)와 왕민(王敏)을 참모(謀主)로 삼고 자신의 외삼촌 유전(劉全)을 장군(帥)으로 삼으니 급군립(汲君立), 왕림(王琳), 염통(閻通), 동우(董友), 장정충(張正忠), 손무정(孫武正) 등이 양안아에게 귀부(歸附)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으며, 양안아는 수십만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양안아를 패배시켰음에도 오히려 그의 세력이 커지자 복산안정은 산동행성(山東行省) 완안정(完顏霆)과 경력관(經歷官) 황괵(黃摑)에게 화모군(花帽軍) 3천을 이끌고 자신과 함께 양안아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양안아의 세력이 거의 섬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214년 12월, 금나라 조정에서 산동 지역의 죄수들을 대상으로 특별 사면을 실시하였으나, 양안아와 경격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2월 25일[9], 경격이 금군에 붙잡혀 복주(伏誅)되었다.

양안아는 화모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였는데, 그는 화모군에 의해 달아날 육로가 끊기게 되자 그의 부하인 급정(汲政) 등과 함께 바다로 도망치려고 하였다. 양안아는 먼저 가벼운 배를 타고 즉묵(即墨)으로 간 다음에 즉묵의 바닷길을 이용하여 거우산(岠嵎山)[10]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양안아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양안아는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즉묵에 도착하기도 전에 곡성(曲成) 등의 뱃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게 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서 자살하였다. 그가 홍오군을 창시하고 그 수령이 된지 3년만의 일이었다.


3. 사후[편집]


양안아는 죽은 뒤에 그 시체가 끌어올려졌고, 그의 목은 잘려서 금나라 조정에 바쳐지게 된다.
그의 잔당 중에 이사온(李思温)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1214년에 양안아가 자신의 정권을 세울때 태사가 되었고, 양안아가 죽자 임시로 홍오군을 이끌고 금나라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1215년 2월에 금군에게 토벌당하였다.

양안아는 아들이 없었고, 그의 조카 양우(楊友)는 스스로 '구대왕(九大王)'이라고 칭했지만 무리를 이끌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양안아의 넷째 여동생 양묘진(楊妙眞)은 교활하고 몸놀림이 재빠르면서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으므로, 그녀는 유전을 필두로 한 양안아의 잔당들에게 '마님(姑姑)'이라고 불리며 떠받들어졌다. 결국 양묘진이 양안아의 뒤를 이어 홍오군의 수령이 되었다.

한편 1215년에 이전(李全)이라는 자가 양묘진을 찾아와서 그녀에게 귀부하려고 하였는데, 양묘진은 이전과 정을 통하다가 결혼하여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양묘진이 수령의 자리를 이전에게 넘겨주니 이전은 양안아의 남은 세력을 모두 흡수하여 홍오군의 수령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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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력으로 계산하면 1215년이다.[2] 1201년부터 1208년까지의 기간이다.[3]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시(張家口市) 샤화위안구(下花園區)에 위치해있는 산이다.[4]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르자오시(日照市) 쥐현(莒縣)[5] 오늘날의 산둥성 주청시(諸城市)[6] 오늘날의 산둥성 펑라이시(蓬萊市)[7] 오늘날의 산둥성 라이저우시(萊州市)[8] 추씨 성을 가진 인물이나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다. 도통은 양안아가 그에게 내려준 관직의 명칭이다.[9] 양력 1215년 1월 26일[10] 산둥성 루산시(乳山市)에 위치해있는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