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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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肇
?~275[1]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서진의 장수이자 양기의 아들로 반악의 장인. 자는 계초(季初)로 사례 형양군 원릉현 사람.


2. 생애[편집]


절충장군을 지냈고 272년에 형주자사를 지내다가 손오의 장수인 보천이 투항하면서 손오의 공격을 받자 보천을 구원하기 위해 서릉으로 왔는데, 육항이 직접 삼군을 인솔해 양조에게 대항했다. 각 군영에게 서릉을 포위하는 벽을 공고하게 구축하도록 하면서 밖으로 방어를 했는데, 그 와중에 손오의 진영에서 달아나는 자가 나와 장군 주교와 유찬 등이 양조에게 왔다.

유찬에게서 들은 정보로 다음날에 과거 이민족 병사들이 지키던 곳을 공격했는데, 육항이 반격하도록 하자 사상자만 늘어났으며, 서릉에 도착한 지 1개월이 지나 계획이 좌절되자 밤에 퇴각했다. 육항이 북을 울려 병사들을 경계시키면서 추격하려는 것과 같이 하자 양조의 부하들이 떠들썩해지고 두려워 해 모두 무기를 풀어놓고 도주하면서 육항이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에게 뒤에서 추격하도록 하자 크게 패했다. 이 패배로 양조는 파면당해 평민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는데, 반악은 뇌문을 통해 초서, 예서를 모두 잘 썼고 척독(尺牘)은 반드시 보배로웠으니, 붓의 움직임이 나는 것 같고 종이의 떨어짐은 구름 같다고 했다. 장회관의 서단에서는 양조의 예서, 초서를 능품으로 평가했다.


3. 미디어 믹스[편집]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파일:external/kongming.net/074-Yang-Zhao.jpg
삼국지 9, 10,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826.jpg
삼국지 13, 14

삼국지 9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능력치는 보통 공손연군의 무장양조보다는 아주 약간 괜찮으나 이쪽도 영 좋지 않다. 삼국지 12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69/지력 72/정치력 71로 의외로 제법 준수하다. 병법으로는 분전, 돌진, 제사, 몽충, 혼란, 매도를 가지고 있다. 쓸만한 병법들이 제법 있는데 특히 몽충 셔틀을 시키면 수상전에서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5/무력 61/지력 67/정치력 70/매력 55로 어정쩡하다. 특기는 상업, 일제, 반목. 총 3개로 정치가 70이라도 되니 특기는 그나마 활용하라고 잘 던져준 편.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0/무력 65/지력 68/정치력 62/매력 58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하락했지만 그 대신 모든 능력치가 상향됐다. 적성은 창병 A/극병 B/노병 A/기병 B/병기 B/수군 C로 조금 모자란 만능형이다. 등장이 242년이라 역사 시나리오에서는 얼굴 볼 일이 영 없으나 노병 적성이 A에 진양에서 등장하므로 영웅집결 정원군에서는 중요한 인재로 쓰인다.

삼국지 13에서의 일러스트는 검을 뽑으려 하고 있으며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순찰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순찰이고 전법은 궁공강화.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6, 무력 65, 지력 67, 정치 62, 매력 55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4,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동요, 주의는 패도, 정책은 침략황폐 Lv 2, 진형은 방원, 학익, 전법은 제사, 고무,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3.2. 삼국전투기[편집]


히카루의 바둑의 등장인물인 오가타 세이지로 등장한다. 서릉 전투 (4)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전쟁에서는 병삘이었지만 서예에서는 명필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서릉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보천이 진에 투항한 이후 양호가 육항 견제를 위해 강릉으로 향했고, 양조는 보천을 지원하기 위해 3만의 병력을 끌고 서릉으로 향했다. 서릉에서 한참 육항군을 압박하던 도중 주교와 유찬이 투항해오자 이를 수용하고, 영도독으로 있던 유찬이 가져온 정보에 근거하여 보천과 말을 맞춘 뒤 최정예병을 이끌고 유찬이 찍어 준 포인트를 공략하고자 야습을 감행했다. 그러나 유찬이 투항한 순간 육항은 유찬이 자신들의 약점을 공략해 들어올 것임을 직감했기에 병력을 교체하고 진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양조는 전투 초반에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고 만다.

정예병을 다 잃고 나니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양조는 퇴각을 결심하나, 육항의 병사들이 양조군을 추격하면서 그대로 군이 궤멸되어 버렸다. 양조가 무너져버리며 양호도 강릉에서 물러났고, 둘 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나란히 강등을 당했다.[2] 덧붙여 양조는 좌천 2년 뒤에 병사했다고 서술되기도 했다.

[1] 사위인 반악이 지은 『양형주뢰 楊荊州誄』에 의하면 함녕(咸寧) 원년(275) 4월 을축일에 훙(薨)했다.[2] 양조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평민으로 좌천됐다. 참고로 양호는 거기장군에서 평남장군으로 직책이 깎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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