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누 지프레이타스

덤프버전 :

파일:Heleno de Freitas.jpg
이름
엘레누 지프레이타스
(Heleno de Freitas)
생년월일
1920년 2월 12일
사망년월일
1959년 11월 8일 (향년 39세)
국적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출신지
브라질 제1공화국 상주앙 네포무세누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82cm | 77kg
소속팀
보타포구 FR (1939-1948)
CA 보카 주니어스 (1948)
CR 바스쿠 다 가마 (1949)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50)
산투스 FC (1951)
아메리카 RJ (1951)
국가대표
18경기 15골 (1944-1947)



1. 개요
2. 생애[1]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개요[편집]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2][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엘레누는 상주앙 네포무세누(São João Nepomuceno)에서 태어났다. 그는 축구 선수가 되기 전에 법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3]

엘레누의 유스 시절 포지션은 풀백 또는 하프백이었다. 그러나 엘레누가 플루미넨시 FC 유소년 팀에 있을 때 팀의 감독 카를로 카를로마뇨는 그의 스타일상 파울을 범하거나 경고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센터 포워드로 그의 포지션을 옮겼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엘레누는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타포구 FR에서 보냈다. 엘레누는 1939년 11월에 CA 산 로렌소와의 경기에서 데뷔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진 못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는 카르발류 레이치를 대체할 재목으로 평가받았고 레오니다스 다시우바의 플레이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기량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다. 한번은 카르발류가 엘레누와 싸우다 퇴장을 당했는데 조사 결과 엘레누의 잘못으로 밝혀져 벌금을 부과받은 경우도 있었다.

1948년, CA 보카 주니어스로 팀을 옮긴 엘레누는 단 6개월간 머물렀지만 이때에는 큰 일이 없었고 보카의 서포터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1949년에 CR 바스쿠 다 가마에 돌아온 엘레누는 그의 클럽 커리어에 유일한 리그 우승 기록을 얻을 수 있었다.

엘레누는 1950년에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51년에 산투스 FC를 거쳐 리우의 아메리카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산투스에서 훈련 중에 파울을 당했다는 이유로 코치와 팀 동료들과 싸우고 산투스에서 쫓겨났다. 그는 선수 생활 은퇴를 고려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아메리카와 계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51년 11월 4일의 경기에서 경기가 시작된 지 불과 25분 만에 팀 동료들을 모욕해 퇴장당했다. 그렇게 마라카낭에서 아메리카의 첫 경기가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2.2. 국가대표[편집]


엘레누는 1945년1946년브라질이 준우승을 할 때의 멤버였다. 1945년 대회에서 엘레누는 6골을 넣어 노르베르토 멘데스와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엘레누는 1950년 월드컵에도 참가할 수 있었지만 전성기가 지났다는 결론이 나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3. 이후[편집]


엘레누는 선수 생활을 마친 후 매독으로 요양원에서 투병 생활을 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 4년을 투병하다 진행성 마비로 인해 1959년 11월 8일 아침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엘레누는 속도, 기술, 시야, 패스, 축구 지능, 위치 선정, 게임 리딩 능력, 헤딩 및 정확한 마무리를 겸비한 공격수였다. 그는 센터 포워드였음에도 공을 자신이 가지고 플레이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공을 되찾기 위해 2선 또는 3선까지 자주 내려왔다. 또한 엘레누는 수비수를 따돌리고 공을 받아 슛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가는 능력과 골대를 등지고 플레이하는 능력으로도 유명했다.

엘레누는 1940년대에 남미 축구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재미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는 완벽주의자이자 경쟁심이 강한 선수였으며 종종 주장으로도 활약했다. 블리처 리포트의 크리스토퍼 앳킨스(Christopher Atkins)는 엘레누를 "키가 크고 우아한 스트라이커"로, 더 가디언의 조너선 윌슨(Jonathan Wilson)은 "40년대 브라질의 펠레" 및 "히우의 왕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엘레누는 수비수들의 압박에 대처하는 것과 특유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조절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때때로 성급한 플레이를 저질렀다. 그와 더불어 반항적인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로 인해 상대 선수들은 물론 팀 동료, 코칭스태프, 임원들과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자주 퇴장과 출장 정지를 당했다.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에 연루되고 경기장 밖에서 흡연[4], 음주, 도박, 마약[5] 등 자유분방을 넘어 무절제한 생활 방식까지 더해지다보니 그는 선수 생활 후반부에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4. 뒷이야기[편집]




5. 수상[편집]



5.1. 클럽[편집]




5.2. 국가대표[편집]




5.3. 개인[편집]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그는 1947년에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해 법조인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4] 엘레누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보면 그가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5] 특히 그는 코카인에 심하게 중독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4 15:06:28에 나무위키 엘레누 지프레이타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