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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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왕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Queen of Bohemia


파일:Elizabeth,_Queen_of_Bohemia_by_Gerrit_van_Honthorst.jpg

이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출생
1596년 8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 파이프 던퍼믈린 궁전
사망
1662년 2월 13일 (향년 65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장례식
1662년 2월 17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1613년 결혼 / 1632년 사망)
자녀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1세 루트비히, 엘리자베트, 루프레히트, 모리츠, 루이제 마리아,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헨리에테 마리, 요하네스 필리프 프리드리히, 샤를로테, 조피, 구스타프 아돌프
아버지
제임스 1세
어머니
덴마크의 아나
형제
헨리, 마가렛, 찰스 1세, 로버트, 메리, 소피아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결혼
2.3. 보헤미아의 왕비, 그리고 망명
2.4. 말년
3. 여담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1세의 장녀이자 찰스 1세의 누이. 그녀의 외손자 중 한 명이 하노버 왕조의 시조가 되는 조지 1세이다.

팔츠 선제후국선제후이며 보헤미아 왕국국왕프리드리히 5세의 아내이다. 이와 관련해서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1596년에 던퍼믈린 궁전에서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의 딸로 태어났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따 엘리자베스라고 이름지어졌다. 1603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여 아버지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자, 6살의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로 향했다. 잉글랜드에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해링턴 남작 내외 아래에서 양육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신학, 역사, 음악, 무용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12살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했고 말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독서를 좋아해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제임스 1세에겐 여러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귀족들이 보기에 가장 군주로 적합한 인물상이었다고 한다. 1605년에 가이 포크스를 실행범으로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 귀족들이 개신교인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건이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먼저 상원의회 지하에 대량의 흑색화약을 매설하여 왕을 폭사시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엘리자베스를 납치해 여왕으로 옹립한 뒤 가톨릭교도 군주로 키우려 했다. 암살 시도는 밀고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관련 인물들은 체포되었다.


2.2. 결혼[편집]


엘리자베스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많은 혼담이 오고갔다.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장녀를 일국의 군주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제임스 1세는 루이 13세를 눈여겨보고 있었으나 신교도 군주의 딸이 구교도 군주에게 시집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다음으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적합한 남편감으로 물망에 올랐다. 프리드리히 5세는 개신교(칼뱅파) 신자였으며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다. 1613년 2월, 엘리자베스와 프리드리히 5세는 잉글랜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엘리자베스는 남편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살았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았으며 사이에서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2.3. 보헤미아의 왕비, 그리고 망명[편집]


1619년에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 자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는 합스부르크 가문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후계자로 낙점되어 있었다. 그런데 페르디난트 2세는 골수 가톨릭교도였다.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은 페르디난트가 왕이 되면 개신교도들을 탄압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개신교 신자 중 유력 인물인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고심 끝에 보헤미아로 향했다. 1619년 11월에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는 성 비타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뤘다.

대관식으로부터 약 두 달 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에서 새로운 왕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빠르게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형세는 좋지 않게 흘러갔다. 페르디난트 2세에게는 신성 로마 제국의 명장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에스파냐의 지원이 있었다. 반면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의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칼뱅파였기에 다수인 루터파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귀족들에게 있어 왕비 엘리자베스는 껄끄러운 존재였는데, 엘리자베스는 교육 수준이 높은 잉글랜드의 공주였기에 정치에 참여하려 했다. 그런데 여성의 정치 참여는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있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군주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가운데 1620년 11월 8일,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은 제국군에게 패배하였다.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네덜란드 헤이그로 망명했다.[1] 망명 생활은 안전했지만 편하지 않았다. 1632년 10월, 프리드리히 5세는 망명 중에 사망했다. 남편의 죽음에 엘리자베스는 식음을 전폐하며 매우 슬퍼했다. 1648년에 차남 카를 루트비히가 팔츠 선제후 자리를 되찾았다.[2]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헤이그에 머물렀다.


2.4. 말년[편집]


남편 사후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았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있던 10명의 자식들 중 4명의 장례식을 봐야했다.

1660년 엘리자베스의 조카 찰스 2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극했다. 1661년에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이듬해 런던에서 폐렴으로 인한 폐출혈로 사망하였다.


3. 여담[편집]


1619년 11월에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보헤미아의 군주로 등극하자, 가톨릭교도들은 왕의 치세가 겨울을 넘기지 못할 거라면서 조롱의 의미로 '보헤미아의 겨울왕',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20년 11월 8일에 망명길에 오르면서 부부의 제위는 겨울에 시작해 겨울에 끝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5녀인 팔츠의 조피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했다. 조피의 아들인 게오르그 루트비히는 영국의 왕으로 추대되어 조지 1세가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들 팔츠의 선제후 카를 루트비히는 수많은 자식을 두었다. 카를 루트비히는 그중 딸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에게 시집보냈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외손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프란츠 1세이며, 그는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또 그들의 자손이 여러 유럽 왕실과 혼사를 맺으면서,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혈통은 유럽 왕실 전역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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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팔츠는 스페인군에게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2] 장남 하인리히 프리드리히는 어릴 때 물에 빠져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