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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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演機新編. 조선 현종 1년인 1660년에 안명로(安命老)가 저술한 한국병서. 총 3권 3책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편집]


1660년에 편찬된 한국의 병서로, 17세기 조선의 대표적 병법서적 중 하나로 통한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 왕조 군대의 공식적인 병법서적은 조선 문종세조에 의해 완성된 오위진법이었다. 오위진법은 당시 가장 위협적이었던 북방 유목민족의 대항책으로 아군의 기병으로 적 기병을 진압하는 것에 작전의 주안점을 두고 진법이 고안되었던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벌어진 후 오위진법은 사장되고 중국 명나라 척계광 장군이 지은 기효신서에 뿌리를 둔 병학지남이 대세가 된다. 이 병법은 16세기에 중국 동해안에서 약탈 행각을 벌였던 왜구에 대항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 특징으로, 아군 보병으로 적 보병부대를 제압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조선 전기 진법을 대표하는 오위진법과 후기 진법을 대표하는 책인 병학지남은 전투방법과 기본적인 전투대형 자체도 다를 뿐만 아니라 깃발과 소리를 이용한 신호체계도 다르다. 편제 용어도 달랐다. 결국 조선후기에 오위진법 대신 주로 병학지남을 보게 된 것은 단순하게 진법서적 한 권이 교체된 것이 아니라 조선군의 전술이 완전히 교체됐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기효신서나 병학지남이 무조건 만능인가 라는 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결국 병자호란이 터진 후 기효신서, 병학지남을 토대로 양성한 보병부대가 적 기병에게 사정없이 유린당하면서 척계광병법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조선 전기 오위진법을 편제로 했을 때는 북방 유목민들이 수만 명씩 기병을 끌고 내려와도 전면전으로 박살내는 것이 가능했으나, 편제가 변경된 후에는 적 기병에 의해 수도가 박살나는 데도 성벽에서 존버하는 것 외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명로 역시 이러한 사람으로 병학지남과 그 뿌리가 되는 기효신서에도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도 나름대로 장점이 많은 진법서적이므로, 이를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위진법은 만주족 기병을 상대로 한 전투에 효과가 있고, 병학지남은 왜군 보병을 상대로 한 전투에 효과가 있다는 생각에서 양 진법을 총망라하여 고안한 것으로, 오위진법 체제에서 병학지남 체제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조상들이 전법의 변화라는 중요한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고민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파일:연기신편 학익진.jpg
또한 연기신편에 실려 있는 학익진 그림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학익진 진형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다만 이러한 안명로의 연기신편과 그의 군제개편 이론은 전혀 채택되지 않았다. 이후 한국에서 결국 오위진법을 완전히 사장시켰기 때문에[1]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병법서로 끝내 채택되지 못하고 단순히 개인 저작으로 끝났다는 한계점이 있다.


3.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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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영조대에 병장도설 등으로 오위진법이 다시 나오긴 하나 이는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첩종 등에서 의례로서 사용되기 위한 것으로 반쯤 조선 조정의 사열의식 구경을 위한 축제행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