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루드비크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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Евге́ний-Лю́двиг Ка́рлович Ми́ллер
예브게니루드비크 카를로비치 밀러 (러시아어)
Eugen Ludwig Müller
오이겐 루트비히 뮐러 (독일어)
1867.9.25.~1939.5.11.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3. 내전 후
2.4. 최후
2.5. 여파
3. 참고문헌
4. 기타



1. 개요[편집]


예브게니루드비크 밀러는 러시아 제국의 장군이었으며 러시아 내전 시기 북서정부의 수장이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867년 디나부르크의 발트 독일인 귀족 집안에서 출생한 밀러는 참모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제국 근위대로 복무하였으며 1898년부터 1907년까지 서유럽을 돌아다니며 러시아인 부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2.2. 1차대전내전[편집]


밀러는 1차 대전 시기 러시아 제국 육군 제26군단과 모스크바군을 이끌었으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2월 혁명으로 러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자 밀러는 군대의 민주화에 반대하였으며 병사들에게 붉은 완장을 떼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후 10월 혁명 발발 당시 아르한겔스크로 도망친 밀러는 자신을 북서부의 수장으로 선언하였고, 1919년 5월에는 러시아국알렉산드르 콜차크로부터 블라디미르 마루솁스키(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руше́вский)의 후임으로 임명받았다.

그가 이끄는 러시아 북서정부는 협상국, 그 중에서 영국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철저히 대민 물의를 막았기 때문에 평판이 매우 좋았고 결속력도 높았다. 그러나 1919년 드비나강에서 적군에게 패배하며 진격이 막혔고, 영국군마저 철수하여 고립당하고 만다. 결국 1920년 2월 밀러는 피난민 800명과 함께 노르웨이로 망명하였다.


2.3. 내전 후[편집]


노르웨이에 체류하다가 프랑스로 망명지를 옮긴 밀러는 표트르 브란겔, 니콜라이 대공(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과 함께 반공 운동을 지속하였으며 브란겔의 러시아 전군연합에 가입하였다. 이후 1930년~1937년 사이에 밀러는 브란겔의 뒤를 이어 전군연합의 의장이 되었지만 전군연합 내에서 소위 '갈리폴리 야영자'도 아니었고, 남러시아 정부 소속도 아니었기에 큰 영향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 전군연합의 대소 첩보활동에 더해서 해외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에서도 평판이 좋았던 밀러의 존재는 소련에게 있어서 위협이었고, 결국 소련은 눈꼴사나운 존재인 밀러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2.4. 최후[편집]


1937년 9월 22일, NKVD 요원 니콜라이 스코블린(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коблин)은 다른 요원과 함께 아프베어 요원으로 위장, 밀러와 만나 파리의 은신처로 안내했다가 납치, 르아브르에서 화물로 위장해 소련 화물선에 태웠다. 그렇게 소련으로 끌려온 밀러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1939년 5월 11일 처형되었다.

물론 밀러가 스코블린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자신이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메모를 남겨두었으며 거기에는 스코블린에 대한 의심이 적혀 있었다. 스코블린은 프랑스 경찰의 추적에도 잡히지 않았고, 스페인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그는 스페인에서 실종되었다.

스코블린을 놓친 프랑스 경찰은 스코블린의 아내 나데즈다 플레비츠카야(Надежда Васильевна Плевицкая)를 체포하여 20년형을 선고받게 했다. 플레비츠카야는 수감되어 있다가 1940년에 사망하였다.


2.5. 여파[편집]


소련은 백계 러시아인들의 대소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밀러를 납치, 처형했지만 이는 오히려 소련의 대외적 평판을 크게 떨어뜨린 실책이었다. 원래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련에 대해 물론 싫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민족이니 완전히 적대하지는 말자는 기조를 취하고 있었는데 밀러가 처형된 이후 이들은 소련 하면 완전히 학을 떼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다수의 백계 러시아인들이 나치 독일을 지지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더해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방 국가들 역시 소련을 상종 못할 집단으로 보게 되면서 서방 각국의 공산당은 세가 크게 위축되고 반대급부로 파시즘 정당이 약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NKVD는 밀러의 처형에 대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으며 도를 넘은 무리수였다고 인정했다.


3. 참고문헌[편집]




4. 기타[편집]


밀러가 수감 중 쓴 편지들은 현재 러시아 의회 도서관의 볼코고노프 문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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