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프리드리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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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
Johann Friedrich I., Kurfürst von Sach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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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03년 6월 30일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토르가우
사망
1554년 3월 3일 (향년 50세)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바이마르
재위
작센 선제후국의 선제후
1532년 8월 16일 ~ 1547년 4월 24일
작센 공국의 공작
1547년 4월 24일 ~ 1554년 3월 3일
튀링겐 방백국의 방백
1532년 8월 16일 ~ 1547년 4월 24일
배우자
클레페의 지빌레 (1527년 결혼 / 1554년 사망)
자녀
요한 프리드리히 2세, 요한 빌헬름, 요한 프리드리히 3세
아버지
작센 선제후 요한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조피
종교
가톨릭루터교회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선제후. 베틴 가문 에른스트 계열의 마지막 선제후이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를 비롯한 베틴 가문 에른스트 계열의 중시조이다.


2. 상세[편집]


작센 선제후 요한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조피(Sophie von Mecklenburg 1481~1503)의 유일한 아들로 마르틴 루터를 보호한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카이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루터파에 헌신하여 작센 선제후국에서 종교 개혁을 계속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 명력을 내리자 6개 신교도 제후와 14개 제국도시를 대표하여 가톨릭과 황제에게 맞서 싸웠으나, 친척임에도 선제후직에 눈이 먼 작센 공작 모리츠[1]는 가톨릭 세력과 내통하여 카를 5세의 동생인 독일왕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은 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슈말칼덴 동맹을 배신했고 카를 5세는 궐석 재판에서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에게 제국추방령과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뮐베르크 전투에서 패한 후 가족과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항복했고, 선제후직과 비텐베르크를 포함한 영지 상당 부분을 몰수당한 채 가톨릭 재개종을 강요당하며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감옥에 감금 되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직을 차지한 모리츠는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리프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 분개하여 프랑스 왕국 앙리 2세와 내통하여 다시 카를 5세를 배신하고 신교도 동맹 진영으로 돌아와 인스브루크에서 카를 5세를 격파하고 페르디난트 1세와 강화했다. 이 결과로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필리프와 함께 조건 없이 석방되었다. 이후 모리츠의 선제후직 승계를 승인하고 튀링겐에 자리잡았다. 1554년 모리츠가 전사하면서 일부 영토를 되찾았으나 선제후직은 되찾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끝까지 지지하는 루터파 신학자들은 요한 프리드리히를 따라 이주했으며[2] 이후 예나 대학교를 설립[3]하는 등 이후 바이마르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554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클레베의 지빌레(Sibylle von Jülich-Kleve-Berg 1512~1554)[4]와 결혼하여 3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자식을 차별하지 말라는 루터의 가르침에 따라[5] 죽기 전 맏아들 요한 프리드리히 2세(Johann Friedrich II. der Mittlere 1529~1595)에게 코부르크아이제나흐를, 둘째 아들 요한 빌헬름(Johann Wilhelm I. von Sachsen-Weimar 1530~1573)에게 바이마르를, 셋째 아들 요한 프리드리히 3세(Johann Friedrich III. der Jüngere 1538~1565)에게 고타를 물려주면서 영지를 분할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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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모리츠의 배신은 선제후에 대한 욕심 외에도 평소 모리츠를 무시했던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오만한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2] 이 과정에서 비교적 소수지만 비텐베르크 토박이이며 마르틴 루터의 동료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 등은 이주하지 않고, 모리츠와 동생 아우구스트의 후계자의 영지로 넘어간 비텐베르크에 남자 루터파 신학자들이 이를 비판하고 분열이 일어났다.[3] 정확히 말하면 그는 계획만 세웠고, 설립은 1558년 세 아들들이 공동으로 했다.[4] 참고로 여동생이 클레페의 앤(독일어 발음은 안나 폰 클레페)이다.[5] 절친한 동맹이었던 헤센 방백 필리프도 4명의 자녀에게 헤센 방백국을 분할상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