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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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Kurfürst von Sachsen

출생
1463년 1월 17일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토르가우
사망
1525년 5월 5일 (향년 62세)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아나부르크 로하우 성
재위
작센 선제후국의 선제후
1486년 8월 26일 ~ 1525년 5월 5일
아버지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
어머니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형제
크리스티나[1], 에른스트, 아달베르트[2], 요한, 마르가레테
종교
가톨릭루터교회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베틴 가문 에른스트계의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선제후.


2. 생애[편집]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와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Elisabeth von Bayern 1443~1484)의 맏아들로, 문화와 예술을 후원했고, 비텐베르크 대학교[3]를 설립했으며, 특히 본인은 가톨릭이었음에도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카를 5세교황청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여러 업적으로 후대에 der Weise, 즉 현자(賢子) 혹은 현명공(賢明公)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마르틴 루터는 프리드리히가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4] 학위를 취득했고 동 대학교에서 교수로 부임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직접 루터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는데, 설교를 듣고 성수는 버렸을지언정 수만 점에 달하는 성유물(물론 대부분 가짜)은 죽을 때까지 간직했을 정도로[5] 루터의 신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초기에는 루터의 급진적인 주장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딱히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으며, 임종 전에 양종성찬을 받음으로써 루터교회로 개종하고 사망했다.

이후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켜 가톨릭과 적대하게 되자, 그를 로마로 넘기든가 제국에서 추방하라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교황[6]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모든 신민은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개인적 신념으로 자신의 백성인 루터를 끝까지 보호했다. 단순히 살려만 둔 정도가 아니라 위장 신분까지 부여해 가며 적극적으로 비호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3세가 아니었다면 루터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루터의 종교 개혁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면 이후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적자가 없고 서자들만 있었기에 사망 후 선제후 직위는 동생 요한이 물려받았다. 후임 작센 선제후인 동생 요한과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루터교회로 돌아섰기 때문에 작센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 내 루터파 세력의 중심을 자처하였다.


3.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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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스의 왕비.[2] 마인츠 선제후.[3] 현재 할레의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Martin-Luther-Universität Halle-Wittenberg).[4] 학사/석사는 에어푸르트 대학.[5] 이 가짜 유물들은 루터파로 개종한 후임 선제후인 동생 요한이 죄다 고물로 팔아치워 버렸다.[6] 사실 카를 5세교황청은 같은 가톨릭일지언정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원수였다. 당장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가 이 시기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