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도

덤프버전 :



파일:유예도.jpg

이명
유애다
본관
고흥 유씨[1]
출생
1896년 8월 15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사망
1989년 3월 25일 (향년 92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유중권·이소제 부부는 큰아버지, 큰어머니이며, 유우석·유관순 남매는 4촌 동생이다. 한필동은 그의 아들이다.

2. 생애[편집]


1896년 8월 15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무와 어머니 강릉 김씨(1873 ~ ?. 5. 12)[2]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14년 이화학당입학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기미독립선언서 선포식에 4촌 동생 유관순과 함께 참여했고, 이어 일어난 3.1 운동에도 가담했다. 이후 3월 13일 고향 천안군 갈전면(現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으로 내려와 유관순과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동네 어른들을 설득해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에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조인원태극기와 함께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큰아버지 유중권, 큰어머니 이소제, 아버지 유중무, 4촌 동생 유관순,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김상헌(金尙憲), 김상훈(金相訓), 김상철(金相喆), 조병호(趙炳鎬), 이순구, 한동규(韓東奎) 등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여세를 몰아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군 헌병들이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주재소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큰아버지 유중권과 큰어머니 이소제 등이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에 아버지 유중무가 큰아버지 유중권의 시신을 둘러 메고 주재소로 달려간 뒤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매며 헌병보조원 맹성호(孟星鎬)[3]에게 "너희는 몇 십 년이나 보조원 노릇을 하겠느냐"며 일갈하는 등 유혈 진압에 대해 항거하다가 체포되었고, 이어 4촌 동생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유예도는 가까스로 두안골에 있던 외가로 피신했고,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1919년 5월 2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불기소처분받았다. 이후 일본 경찰이 외가로까지 수색해오자, 외숙부의 도움을 받아 충청북도 진천군으로 피신했고, 다시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농촌계몽 지도원, 신탁통치 반대 운동 지도위원, 애국부인회 지방책임자 등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아들 한필동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1989년 3월 25일 별세했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03:01:22에 나무위키 유예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검상공파(檢詳公派) 27세 석(錫)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남자형제 유경석(柳京錫)·유정석(柳丁錫)·유인석(柳寅錫)은 항렬자를 썼다. 유예도의 족보명은 유애덕(柳愛德)이다.[2] 김병일(金秉日)의 딸이다.[3] 이후 충청남도 도순사(道巡査)가 되었고, 1927년 12월 31일에 정근증서(精勤證書)를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