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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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상무장관직과 총리직을 역임했다. 전임 총리 레오폴트 피글과 마찬가지로 파시즘 정권에 부역한 전적이 있다.
2. 생애[편집]
1892년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상크트 푈텐(Sankt Pölten) 지역에서 중산층 가톨릭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빈에서 공대를 다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징집되어 이탈리아 전선에서 군복무를 한 바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귀국하여 학업을 지속하고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러나 결혼을 한지 2년만인 192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랍 본인도 정치계에 발을 담그게 됨에 따라 그는 공대를 중퇴하게 되었다.
그는 우파 성향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에 입당하고 192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32년 후일 당권을 두고 경쟁하게되는 레오폴트 피글의 준군사조직에 가입하고 엥겔베르트 돌푸스와 인연을 맺어 극우 파시즘 정당인 조국전선에 입당했다. 이후 쿠르트 슈슈니크 정권 하에서 상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불과 한달만에 안슐루스가 일어나 자연스럽게 장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치 독일 시절 레오폴트 피글을 비롯한 수많은 오스트리아 구정부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나[1] 그만큼은 나치 고위 공무원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구금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발목을 잡게되어, 오스트리아 신정부가 세워질때 유력한 총리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부역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총리직에 오르면 안된다는 소련의 압박 때문에 결국 총리직을 레오폴트 피글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글 내각 당시에 오스트리아 연방 경제 회의소 회장을 맡으면서 영향력을 확대했과, 1953년 피글 총리가 파시즘 정권 당시의 유착 논란과 사민당과의 갈등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제14대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총리직을 지내는 동안에는 오스트리아 중립국 선언, 자유주의에 기반한 강력한 경제 성장 정책으로 오스트리아의 부흥을 주도하였으며 높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56년에는 인민당이 46%를 득표해 압승하고 총리 연임에 성공한다. 1957년에는 테오도르 쾨르너(Theodor Körner) 대통령의 사망으로 잠깐 대통령 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는 강력한 보수주의자였음에도 사민당과의 연정을 당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유지했고, 중도파에게도 지지를 받으며 인민당의 장기 집권기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195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961년 총리직을 알폰스 고르바흐에게 물려준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사민당 소속의 아돌프 셰르프(Adolf Schärf)에 패배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 은퇴 1년 뒤인 1965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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