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수(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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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임대수(1882).jpg

초명
임학수(林學洙)

호경(浩京)
본관
부안 임씨(扶安 林氏)[1]
출생
1882년 2월 12일
충청도 공주목 삼기면 송담리[2] 표석골
(現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3]
사망
1911년 6월 16일 (향년 29세)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
(現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76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2년 2월 12일 충청도 공주목 삼기면 송담리 표석골(現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에서 아버지 임헌직(林憲稷, 1848. 5. 2 ~ 1907. 11. 14)과 어머니 전주 이씨(1846. 12. 9 ~ 1901. 1. 23)[4]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충청남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19개 군을 전전하며 전공을 세웠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군해산되자 50여 명의 부하를 모집해 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전의군 군내면 읍내리(現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읍내리) 전의역직산군 경무소, 정산군 헌병주재소 등을 습격했다. 특히 은진군에 주둔하던 일본군 헌병대의 헌병분견소를 습격해 총기 및 탄약, 서류 등을 탈취했으며, 구금되어 있던 항일운동가들을 구출했다. 이후 1907년 8월부터 1908년 2월까지 충청남도 공주군, 천안군, 청양군, 당진군, 보령군, 비인군, 한산군, 임천군, 면천군, 신창군, 아산군, 평택군 등을 전전하며 활약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구속되어 있던 수백 명의 항일운동가를 구출해냈다.

그러나 1911년 6월 16일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現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에서 일본 제국 경찰과 교전하던 중 동지 6명과 함께 전사, 순국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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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서공파(典書公派)-주부공파(主簿公派)-진동파(眞洞派) 29세 수(洙) 항렬.[2]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후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가 되었다.[3] 송담리가 있었던 위치에는 현재 세종호수공원이 들어서 있다.[4] 이호원(李浩源)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