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순(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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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7년 5월 24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전·후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사망
1948년 12월 18일
경상북도 대구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재순은 1877년 5월 24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전·후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2월 24일, 경상도 독립만세운동의 연락 책임자이던 이갑성이 대구로 내려와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인 이만집·이상백·백남채등과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을 통하여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이때 정재순은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이만집·김태련·김영서·이상백·백남채·권의윤·정광순·최상원·최경학 등과 함께 만나, 서문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주민과 학생의 동원을 분담하였다. 이때 그는 기독교인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한편 시내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普)·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도 연합시위로써 이에 가담하기로 약속되었다.

3월 6일에는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김태련이 자기 집에서 이를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매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가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3월 3일에 홍주일이, 3월 7일에는 백남채가 일제의 예비 검속때에 체포되어 주동인물들을 긴장시켰으나 거사 계획은 감행되었다.

3월 8일 아침 일찍부터 도청 정문 등 요소에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그는 오후 3시에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서문외 시장에 나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각지에 몰려오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경찰서 앞의 제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앞의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군·헌병·경찰은 시위대열 안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체포된 정재순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8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정재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