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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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무벡스 전무
정지이
Chung Jee-Yi


파일:정지이_현대무백스 전무.jpg

출생
1977년 12월 17일 (46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
직업
기업인
학력
경복초등학교 (졸업 / 18회)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졸업 / 2기)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 / 학사)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 / 석사)
현직
현대무벡스 전무
임당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부모
아버지 정몽헌, 어머니 현정은
형제자매
여동생 정영이, 남동생 정영선[1]
친인척
할아버지 정주영, 할머니 변중석
배우자
신두식
자녀
장녀(2013년 2월 15일생)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대북 사업
2.2. 결혼
3. 여담
5. 대중 매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현대무벡스의 전무를 맡고 있다. 범현대가의 일원으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장녀다. 아버지 사후 2004년 현대상선에 입사, 2007년부터 현대유앤아이의 전무로 승진했으며 2019년 현대무벡스로 합병된 뒤에도 계속 전무직을 맡고 있다. 또한 임당장학문화재단의 이사장이다.


2. 생애[편집]



파일:정지이-정몽헌 회장.jpg

어린 시절 아버지 정몽헌 회장과 함께

1977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정몽헌현정은의 장녀로 출생했다. 1984년, 1985년에 태어난 동생들과는 7~8살 차이가 난다. 경복초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96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 입학해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 후 연세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 석사를 수료했다.

사실 정지이는 경영에 큰 꿈이 없었다. 대학 시절 미술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면서 광고전문가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학원 석사 논문도 <광고와 퍼블리시티의 시너지 효과 연구>라는 제목의 광고와 관련된 내용으로 냈고, 대학원을 졸업한 뒤 외국계 광고회사에 취직해 일했다. 2000년 왕자의 난 이후 아버지 정몽헌이 현대를 이어받는 이후에도 정지이는 경영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었다.


파일:정몽헌 회장 장례식.jpg

2003년 8월 8일, 정몽헌 회장의 영결식에서 오열하는 정지이 전무

그러던 2003년 8월 4일, 정몽헌 회장이 계동 사옥에서 투신자살하면서 삶이 180도 뒤바뀌게 되었다. 정지이는 영결식 내내 오열하며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고, 시민들이 주최한 100일 촛불집회에도 참석하였다. 2004년 1주기 때는 정몽헌 회장의 추모 카페에 직접 글을 올리며 추모하기도 하였다.

고 정몽헌 회장 촛불추모제와 창우리 참배 행사에 동행했던 정지이입니다. 정추모 카페에 가끔 들어가긴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것을 널리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추모 회원 여러분,

아버지는 저에게 가장 커다란 힘이 되어준 분이었습니다. 굳이 많은 충고나 지침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항상 행동으로써 저에게 인생의 모델이 되어준 분이셨구요. 항상 그렇게 묵묵하고 듬직하게 저를 챙겨주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가버리시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나 강하시던 분이 이렇게 우리 가족을 포기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항상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찾고자 했던 분이 평소에 자신이 부정적으로 여기던 방식으로 세상을 버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현대는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를 비롯한 현대 임직원 모두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분들이 현대를 지켜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좌절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현대를 이루어냈고 이끌어가고 있는 수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는 모습 속에서 현대가 이미 개인이 아닌 모든 분들의 기업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분들의 수고로 이렇게 현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정주영 명예회장)와 아버지(정몽헌 회장)의 혼이 서려 있고 이토록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현대그룹에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추모(정몽헌 추모 모임의 줄인 말)와 같이 현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들의 끊임없는 지지와 성원은 현대그룹을 지켜준 또다른 힘이었습니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가족과 기업의 일인데도 자발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으며,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힘이 바로 정추모와 같은 순수 열정을 지닌 네티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특히 정추모 회원 여러분은 저희 가족에게 든든한 힘이 되었습니다. 항상 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친구를 얻은 듯 든든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서명 운동을 받느라 수고하시고, 경영권 분쟁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셔서 저뿐만 아니라 저의 어머니와 온 가족이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힘으로 지켜낸 현대인 만큼, 저와 저희 가족 그리고 현대 임직원은 현대가 국민 여러분의 것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한 시기임을 느끼고 있으며, 앞으로 현대는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카페가 예전만큼 활성화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따뜻한 여러분의 마음이 느껴지는 카페라 기분이 좋습니다. 여러분의 그러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저에게는 늘 고맙게 느껴지고, 그러한 마음 영원히 간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지니고 있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는데, 이렇게 늦게나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어머니와 상의해서 조만간 운영진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날씨도 너무너무 좋은데… 매일매일 행복하세요~.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정지이 올림



파일:정지이 전무_첫 출근 현대상선.jpg

2004년 1월 5일, 현대상선 첫 출근 사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정지이는 광고 회사를 퇴직하고, 이듬 해 1월 현대상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2005년 과장으로 승진했고, 2006년 3월 현대유앤아이로 자리를 옮겨 전무로 승진한 이후 현재까지 전무직을 맡고 있다. 2019년 현대유앤아이와 합병된 현대무벡스에서도 전무로 일하고 있다.

2019년 8월, 임당문화예술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1. 대북 사업[편집]



파일:현정은-김정일-정지이.jpg

2007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하는 현정은 회장- 정지이 전무

할아버지아버지의 생전 숙원이었던 대북사업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2007년 11월 김정일의 초청으로 현정은 회장과 함께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으며 여기서 정지이는 현 회장의 비서 역할을 하며 일정을 지휘했다. 2년 뒤인 2009년 8월에도 방북해 김정일을 만나고 단독으로 회담했다.[2]

2011년 김정일 사망 때는 현정은 회장만 평양으로 조문을 갔고,[3] 이 후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더 이상의 방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2. 결혼[편집]


2011년 9월 3일, 일본계 금융회사를 다니는 3살 연상의 신두식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정몽준, 정의선, 정몽규, 정몽윤 등 범현대가 일원들이 하객으로 총출동해 화제를 모았으며 특히 몇 년간 반목했던 범현대가 사람들의 화해가 아니냐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정몽준은 인터뷰에서 "형님이 계셨으면 좋았을텐데..." 라며 짠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다만 정몽구 회장은 결혼식에 불참했다. 여러 이유가 나돌았지만 현대자동차 측에서 정몽구가 조카 결혼식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 대신 축하화환은 보냈다고.

결혼 2년 후인 2013년 2월 15일에 딸을 출산했다.


3. 여담[편집]


  • 정몽헌 회장과 얼굴이나 외모, 성격이 흡사해서 생전 정몽헌이 무척 예뻐했다고 한다.

  • 대학원을 다닐 때 주위 학생이나 교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재벌가라고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고, 지각이나 결석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매우 겸손하고 예의가 좋아서 인품에 대해서도 좋은 평을 들었다고 한다. #


4. 가족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대중 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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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동생들과는 나이 차가 7~8살로 큰 편이다.[2] 이들이 회담을 마친 다음 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3] 이희호 여사와 함께 갔다.